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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르셔 꽤 Oct 06. 2020

아무래도 숟가락을 하나 치워야겠어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어흑, 이 박복한 년, 지지리 운도 없지!’

지금 이 순간 이 상용구만큼 적확한 표현은 없다. 누굴 탓하랴. 눈치 없고, 재수 없는 내 손가락을 탓해야지. 하필이면 왜 그 숟가락을 뽑는 거냐고. 늘 아니었지만 지금은 더 아니라고. 오늘은 진짜 아니야. 정말 왜 그랬어. 귀신같이 17번만 콕콕 뽑아내는 너 때문에 진짜 울고 싶다.

     


“17번이네. J야, J가 한 번 말해볼까.”

( …… )

J야, 지금 322번 문제 풀고 있어J는 뭐라고 답했니?”

( …… )

인물의 행동에 대해 공감하거나 비판하는 거니까 편하게 자기 생각을 말하면 돼요.”

( …… )

J야, J야?

( …… )     


아놔, 됐어. 내가 졌어, 내가 졌다고. 대한민국은 삼세판이지. 세 번이면 됐어.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유 윈!           



 판인즉슨.

조금 늦거나, 많이 늦거나 둘 중 하나인 J군이 수업에 들어오지 않아서 전화를 했다. 안 받는다. 다시 걸어 보자. 안 받는다. 또 걸어 보자. 안 받는다. 한 번만 더 걸어 보자. , 받았다. “여보세요J?”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긴다. 그리고  바로 들리는 띵띵소리, 참가자가 대기실에 입장했을 때 나는 알림음이다. , 일부러 끊은 거였어.      

 예의가 없구나라는 말에 맞아요라니. 주저함 따위 없는, 한없이 무결한, 저 순도 100퍼센트 당당함! (연락 받기 싫으면) 연락하는 일 없게 알아서 잘 들어오라는 이야기(명령 같지만 요청이자 절규임)에 답장 같은 건 하지 않는 쿨가이.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한 나만 초라해지고요. , 누가 봐도 저의 1패로군요.       


    

두 번째 판인즉슨.

수업을 조금 안 듣거나 많이 안 듣거나 둘 중 하나인 J군이 비디오를 켜지 않아서 비디오를 켜달라고 요청을 했다. 안 듣는다. 다시 요청을 했다. 안 듣는다. 또 요청을 했다. 안 듣는다. , 한 번 더 J야, 비디오 켜세요.” , 켰다. 하지만 얼굴은 빛의 속도로 사라지고 카메라는 쓸데없이 천장의 전등만 비추고 있다. , 저의 2패입니다.      


이 두 판으로 나는 이미 충분했다고. 많이 아팠다고. 그런데 왜 망할 손꾸락이 17번을 뽑아서는 기어이 나를 삼세판에 던져 넣는 거냐고. 결국 내가 세 번이나 졌잖아. 손꾸락 너, 나한테 왜 이래. 엉엉엉.

, 저 솔직히 전부터 ‘7반 수업할 때만 17번을 슬쩍 빼놓하는 충동을 느꼈던 게 사실이에요. 이상하게 진짜 이상하게, 놀랍게 정말 놀랍게, 뽑아 놓고 보면 딱 17번이지 뭐예요. 진짜 귀신이 곡할 노릇이죠. 굳이 지 인생 지 손으로 꼬는 꽤슨생의 기구한 팔자를 어쩌면 좋아요. 일말의 교육자적 양심과 매번 때를 놓치는 게으름으로 인해, 발본색원하지 못하였더니 기어이 오늘의 치욕을 당하고야 말았네요. 더 이상은 안 되겠어요. 이제는 때가 됐어요. 숟가락을 하나 치워야겠어요.      




솔직히 숟가락을 치우는 진짜 이유는 J군을 위한 거예요. 사실 저런 상황에서 더 힘든 건 학생이지 교사는 아니거든요. 저렇게 대치를 하고 있으면 교사는 조금 답답하고 그러다 화가 좀 나는 정도이지만, 학생은 민망하고, 괴로울 거예요. 하기 싫어서 못하고, 못하니 더 하기 싫고, 싫은데 참고 있으려니 얼마나 고역이겠어요. 수업에 들어온 것만도, 퇴장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만도 나름대로 애쓰고 있는 건데 비디오를 켜라, 대답을 해라 연이어 주문을 하면서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면 얼마나 곤란할까요. 심드렁하고 무심한 척해도 친구들에게 그런 장면을 보여주는 건 자존심 상할 거예요. 반 친구들 역시 그런 불편한 상황과 비효율적인 과정들을 감내하는 게 쉽지 않죠. 친구들이 J군을 미워하게 만들면 안 되죠. 그러니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해야 해요.      



교실에 서른 명이 앉아 있으면, 서른 개의 세상이 있는 거죠. 그래서 아름답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려워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말도 누군가에는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요. “쌤이 이름 헷갈려서 미안해. 그런데 너희 엄마도 이러시지 않니? 너희랑 언니 오빠 부를 때 한 번에 부르는 거 아마 못하실걸? 맞지? 쌤 나이 정도 되면 친구랑 핸드폰으로 통화하면서 미안한데 나 조금 늦을 것 같아, 얼른 핸드폰만 찾고 나갈게.’ 이런다. 어쩔 수 없어.”라고 말해놓고는 철렁해. 엄마 없는 아이가 듣고 마음 시릴까봐.



저마다 다른 무게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참 미안하다.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어 주길 바라는 것도 참 염치없다. 저마다 이유가 있고, 저마다 견디고 있는 것이니 내가 져주는 게 맞다. 이걸 악용하는 아이가 있다고 해도 하는 수 없지. 때가 되면 스스로를 돌아보는 순간이 올 테니까. 그때 깨달아도 전혀 늦지 않으니까.      




국어 시간


이번 시간이 국어 시간이라 들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쉰다.


그리고 국어시간에 나는 책에다가

낙서를 그리면서 시간을 때운다


그리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멍 때릴 때

공포의 숟가락 뽑기가 다가 온다

그리고선 내가 뽑히진 않겠지


하고 자기 암시를 건다

하지만 하늘은 도와주지 않고

내가 뽑혀 버렸다


내가 발표할 때는 말을 하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가 버린다

내 발표가 끝나고


나는 다시 책에다가 낙서를 하고

시간을 때운다


나는 국어 시간이 왜 이리

재미없고 지루한 것일까


이상하게도 국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다


나는 알고 싶다

국어 시간이 왜 지루하고 힘든지를     


이것 봐. 반듯하고 마음씨도 착한 Y가 국어 시간이 이렇게 지루하고 힘들다는데. 그걸 이렇게 솔직하게 고백하는데, 스스로도 그 이유를 찾으며 괴로워하는데. 나무라면 안 되지, 딴짓하지 말고 더 열심히 공부하라고 채근할 수도 없지. 암 그렇고말고. 서로 다른 이유로, 서로 다른 무게로 각자의 자리에서 아프고, 저마다의 속도로 자라는 걸.



그런데 3반 수업에 갈 때는 6번 숟가락을 하나 더 추가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사위 삼고 싶은 훌륭한 학생이 있다.




아, 깜짝이야!


오늘(이틀 후) 4교시 실황. 그반의 첫 타자가 17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니야 아니야.


아직도 치우지 않은 내가 바보.


어서 치우라고 혼내시는 걸까.

치우지 말고 보듬으라고 하시는 걸까.

이쯤 되니 보이지 않는 신비한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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