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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르셔 꽤 Sep 16. 2020

미모는 거들 뿐

마무리 담당, 언어천재 박선생님

전 교직원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원맨쇼 ‘울지 않습니다, 울지 않아요’를 선보였던 그날, 그녀를 처음 보았다. 그녀는 6년 휴직 후 복직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차분하고 간결하게 들려주었던 것 같다. 솔직히 6년이라는 단어말고 다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게 왜 그런가 하면 사실 나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말하자면 말이야 음... 그러니까 나는... 외모지상주의자다! 맞다. 나는 껍데기에 겁나 집착하는 속물이다. (그렇다고 제가 내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건 아닙니다. 쓰레기 아님 주의.)


그래, 그녀는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예쁜 사람을 보면 감탄과 부러움의 필터를 자동 장착하고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덕분에 그날 오랜만에 미를 탐색하는 취미활동을 할 수 있었다. 나의 로망인 길고 가는 청순한 몸매, ‘왕방울 같은’이 과장이 아니라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 사실적인 표현이었구나라는 깨달음을 주는 큰 눈, 한국인에게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세련미 넘치는 오똑한 코. 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위화감 없이 편안 느낌을 주는 우아한 에티튜드까지. 신께서 나를 만들 때 아껴두신 에너지를 그녀에게 몽땅 털어부은 느낌. 이건 사실이다. 나를 만든 다음 해에 그녀를 만들었더라고.


올해 그녀와 나는 서로 맞은편 자리에 앉게 되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는 외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행동이나 말투도 적정 그 자체여서 빛이 났다.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학생들에게는 엄격하면서도 부드러워서, 그녀가 학생과 통화를 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절로 감탄이 나오기도 했다. 이노무스키, 과제를 이제서야 내면서 결과물이 이따구야라는 말이 나올 법한 상황에도 “그래, 우리 누구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과제를 내주었구나”라니! 이건 계몽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대사가 아닌가. 통화가 끝나자마자 난리가 났다. “대박, 이거 실화예요? 어떻게 그런 말이 입밖으로 나와요? 헐 듣고도 믿을 수가 없어요!” 우리의 소란에 그녀는 가볍게 웃어보이며 말했다. “제가 워낙 표리부동한 사람이에요.” 하, 반응까지 쿨하고 겸손해.


그녀의 매력 중 하나는 영어교사답게 의사소통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대화를 하다 보면 툭하고 던지는 한 마디가 촌철살인에 화룡점정이어서 자연스럽게 상황 종료, 그야말로 무릎을 탁 치게 만들곤 한다.

그러니까 학년 초 전학공회의를 할 때였다. 우리는 중1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부지런히 논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1은 부족하고 부족하고 부족해서 무엇이 특히 더 부족한지 콕 집어 얘기하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정도니까. 우리 아가들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과 배려심이 없어서 말끝마다 욕을 하고, 그게 학교 폭력으로 이어지는 사례를 들며 우리는 장탄식을 했다. 그때 한숨의 끄트머리를 슬며시 들어올리며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욕이 꼭 나쁜 것일까요? 저는 욕은 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똥은 더럽지만, 사실 배설의 기능은 꼭 필요한 거잖아요. 아무데서나 똥을 누면 부끄러운 것이지만 화장실에서 누는 건 그렇지 않죠. 욕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욕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혼자만의 공간에서 사용하는 거라고, 만약 친구에게 욕을 한다면 그건 입으로 똥을 싸는 것과 같다고 지도하면 좋을 것 같아요.”

오, 이거네요. 우와 대박. 우리 그러면 애들한테 욕실도 만들어줄까요? 기분 나쁜 일 있을 때 가서 욕하고 풀고 오는 거죠. 그거 좋네요. 욕은 똥이라니, 명언이다 명언. 이거 다른 학년부에도 알려주자. 우리 1학년부 진짜 아이디어 너무 좋다.

그녀의 클라스는 이 정도다. 전학공 회의에서 똥 이야기를 꺼내도 마냥 우아해.


며칠전 그 단축키 파동이 있던 날에도 그랬다. ‘아니. 이걸 안 쓴다고’ 부류와 ‘어머, 그런 게 있는 걸 어떻게 알아’ 부류가 서로에게 깜짝 놀랐던 그날. 우리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당연해서 다른 선택지 같은 게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해본 일들이 알고 보면 꽤 많더라라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선생은 언젠가 인터넷 카페에서 본 뒤처리 논쟁에 대해 들려주었다.

“큰일 보고 나면 물로 씻어요? 카페에서 어떻게 안 씻을 수가 있느냐? 무슨 소리냐? 누고 나면 씻는 거였냐, 난리가 났었어요. 그때 그 글 보고 딱 이 생각 했어요. 당연한 게 꼭 당연한 게 아니구나.”

“저는 사실 씻어요. 왜냐하면 화장지로 냄새까지 닦을 수는 없잖아요. 냄새가 있다는 건 성분이 남아 있다는 뜻이고. 그래서 물로 꼭 씻어요. 그러니까 밖에서는 불편해요.”라는 나의 말에 오선생이 말하길.

“맞아, 카페에도 그 얘기 있었어요. 만약 팔에 똥이 묻으면 화장지로만 닦고 말 거냐고, 물로 안 씻을 거냐고?”

“그렇지 그거죠. 똑같은 거지, 씻어야지.”

나와 오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녀가 말했다.


“잘 오므려야지.”


아, 이게 뭐야. 오므리다라니. 아 오므리다를 거기에도 쓰는 거였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그래 항문아 미안, 너의 정체성은 괄약근이지. 맞아 너의 미학은 오므림. 잘 오므리고 꼭 부여잡기. 팔이 바보네, 팔이 바보야. 냉큼 오므리지 않고 어디서 꼿꼿하게 막대기 행세를 해. 모오옷난 놈!

그녀는 이 정도. 팔과 항문의 명확한 차이를 알고, 항문의 정체성과 미덕을 뇌리에 꽂아주시는 분. 아, 몰라. 나는 이제 ‘오므리다’라는 단어만 보면 웃음이 터진다고.



#마무리담당 #미모만큼값진센스  #그녀덕분에복근터짐 #맞다나복근같은거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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