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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르셔 꽤 Nov 01. 2020

된장찌개에 눈물을 말았다

 데이트가 끝나고 그가 돌아가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함께 눈을 뜨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쉬면서 하루를 온전히 같이 보내고도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 다음날 함께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도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는 떠날 줄을 몰랐다.

연인 끝, 부부 시작이었다.     


오랜 연인이어서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가 이해와 배려에 특화된 성품을 지니고 있었던 덕분에 결혼 생활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자취 생활에 룸메이트가 생긴 듯한 느낌 정도. 같이 장을 보고 요리를 해 먹으면서 사진을 찍고, 가끔 지인들을 불러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주말이면 늦잠을 자고 일어나 오후 늦게야 외출을 해서 쇼핑을 하거나 밥을 먹고 돌아왔다. 평일엔 서로 일이 바빴고, 출퇴근 거리가 먼 나를 위해 그가 아침을 차려 주었다. 서로 집안일을 미루지는 않았으나 가끔 옷방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먼지 덩어리가 발견되곤 했다. 이것이 아이가 없었던 때, 즉 신혼 시절에 대한 내 기억의 전부이다.


 그리고 그가 했었던 몇 마디 말.      

“늘 호텔에 온 듯한 느낌이 들게 해줄게.” 매일 아침 침구를 깨끗이 정리하면서 한 말이었다.

“너를 데려다주고 돌아오는데 너무 외로웠어. 솔직히 자유롭고 좋을 줄 알았거든. 그런데 너무 허전해서 눈물이 났어.” 내가 친구와 둘이서 인도 여행을 떠나자, 잠깐 좋았고 금세 슬퍼졌다고 했다.

“뭐가 지겨워. 전혀 그렇지 않은데?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너랑 새로운 것들을 해보고 싶다면 몰라도. 나는 너로 충분해.” 참, 반듯한 녀석.

“우리 오늘은 밖에서 몰래 만날까? 불륜처럼.” 더러 실없는 소리도 했다.     





있고 없고는 천지 차이
    

아이가 태어난 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무엇을 먹을까, 오후에 뭘 할까 따위의 사치스러운 질문이 사라졌다. 먹이고, 달래고, 씻기고, 재우는 일의 무한반복. 나는 이 뫼비우스의 띠에 갇혀 하루 24시간을 고스란히 내드렸다. 바닥에 내려놓기만 하면 우는 첫째의 탁월한 등센서 때문에 얼마 안 가 손목에 엄청난 통증이 찾아왔다. 얼굴을 부비며 세수를 하거나, 화장실에서 뒤처리를 하거나, 방문의 손잡이를 돌릴 수도 없을 만큼 손목이 아팠지만 나를 돌볼 시간은 없었다. 내가 사라졌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씻고 싶을 때 씻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없었다. 모유 수유를 하면서도 내 끼니는 놓치기 일쑤였고, 씻을 때는 물소리에 아이의 울음이 섞여 들려와 몇 번이나 샤워기를 끄고 아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급한 마음에 욕조에서 넘어진 적도 있었다. 밥을 먹다가 아이의 똥을 닦아주어야 했고, 아이를 안고 내 볼일을 봐야 했다.      


‘모성애’라는 거룩한 이름을 붙여 가며 의미 부여를 해봐도 아이를 돌보는 일은 그저 힘들고 지치는 것이었다. 어른 한 명이 아이 한 명을 돌보는 것일 뿐인데 왜 그렇게 많은 시간과 공이 필요한지, 아이를 키우며 내 바닥을 보았다. 인내와 끈기의 미덕이 없어도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이제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생겼다는 사실에 종종 두려움을 느꼈다. 처음으로 된장찌개에 밥을 말아 먹던 날 나는 펑펑 울었다. 어떤 음식을 먹든 국물은 국물대로 밥은 밥대로 먹는 걸 좋아하는데, 된장찌개는 좋아하지만 그 국물에 밥은 넣고 싶지 않아서 울었다. 찌개에 눈물이 떨어지는 게 싫어서 또 울었다. 시간을 쪼개어 쓰느라 이토록 소박한 취향마저 포기해야 한다는 게 서러워서, 나는 없고 아이만 있는 게 버거워서, 찌개를 핑계로 한참을 울었다.(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난다.)     



“어머, 그럼 운전을 하는 그 한 시간은 온전히 네 것이겠네.”

결혼 후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를 하면서 출퇴근 거리가 왕복 두 시간으로 늘었을 때, 아이를 키우고 있던 친구가 내게 한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힘들겠다’라거나 ‘고생이 많구나’ 같은 말들을 건넸기 때문에 뜻밖의 반응이었고, 그래서 내게는 꽤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았다. 몇 년 후 내가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 그 말을 자연스럽게, 온전히, 온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친구가 아이를 어르며 그 말을 건네던 날, 오후 햇살이 마루 안쪽까지 비추었을 때 내 시선이 가 닿았던 식탁 밑의 허연 음식 부스러기도 이해가 되었다. 그즈음 몇 년 만에 연락이 닿았던 또 다른 친구네에도 다녀왔었는데, 오랜만의 만남이 무색할 만큼 손님을 맞을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거실과 주방은 어수선했고 우리는 아이를 돌보며 어렵게 대화를 이어가다가 늦은 오후에 함께 라면을 먹고 헤어졌다. 그 장면 역시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었다. 아이를 돌보며 틈을 내 음식 준비를 하다가 멈춘 주방이 고맙게 느껴졌고, 몇 년 만에 만난 친구에게 라면을 준 친구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니 내가 다 속상해졌다.    

  

아이는 예뻤지만, 별개로 육아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그랬다. 이 버거운 일을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아서, 얼른 숙제를 마치고 싶은 마음에 둘째를 가졌다. 언젠가 카페에서 “연년생 어때요?”라고 묻는 글에 달린 “지옥은 죽어서만 가는 게 아니었어요.”라는 댓글을 본 적이 있어서 두 살 터울을 계획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아이가 둘이 되자 또 다른 명언을 실감해야 했다. “하나는 발로 키우죠. 하나랑 둘은 비교가 안 돼요.”라는 말이었다. 하나는 내 몸이 바스라지더라도 안아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둘은 내 몸 하나로는 해결이 안 되었다. 요구가 다른 둘을 케어하는 건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문이 열리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하나가 늘었지만 육아는 합이 아니라 곱으로 늘었다. 눈물도 두려움도 원망도 세 배 네 배 커졌다.   

   

남편이 미웠다. 그가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절대다수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원망이 나날이 커졌다. 그는 집에 있는 시간 전부를 온전히 육아와 가사에 썼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래서 늘 못마땅했다. 내 감정의 기저에 지울 수 없는 억울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무원이 뭐하러 몸 바쳐 일해? 나는 일 안 해? 왜 내가 이 모든 걸 짊어져야 해? 왜 다 내 몫이고 넌 거들기만 해?’

“넌 열심히 일하는 걸 선택했어. 덕분에 유능하다고 인정받겠지. 하지만 알아둬. 밖에서 인정받는 대신 집에선 비난받게 된다는 걸. 이 모든 건 네가 선택한 거야. 선택에 책임을 져. 집에서도 널 알아주길 바라지 마. 넌 형편없는 남편이야.”     


다툼의 대부분은 그의 늦은 귀가에 대한 내 불만에서 비롯됐다. 우연히 구청장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구청장님께서 내게 건넨 첫 마디가 “아이고, OOO씨를 집에 못 보내서 죄송합니다.”였을 만큼 그는 구청에서 살았다. 그는 늘 미안해 했지만, 가끔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며 덩달아 짜증을 냈다. “어쩔 수 없긴 왜 어쩔 수 없어. 삼성 다니는 것도 아니고 짤리는 것도 아닌데 적당히 해.” 나는 내 처지가 힘들어서 남편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미웠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모두들 그를 칭찬했다. 아침에 내가 먼저 집을 나서면, 그 후 30분 정도 시간을 들여서 그가 두 아이를 차례로 등원시키고 출근을 했는데 그것을 두고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했다. 가끔 아이를 씻기고 재워주거나, 아이를 데리고 나가서 놀아주거나, 아이들과  여행을 가거나, 나에게 약간의 자유 시간을 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과한 칭찬을 들었다. 모든 시간을 아이에게 쏟아도 나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참 가정적인 사람이야.”라는 말을 그는 종종 들었다.

그는 여전히 다정했고, 내게 최선을 다했으며, 내 말 한마디에 웃고 울었지만. 내 입에서는 더  이상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랑해, 고마워.”라는 그의 말에도 늘 “응.”이라고만 답했다. 그게 미안할 땐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마,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남자 중엔 네가 1번이야. 남자는 지긋지긋하거든.”     


나는 아내로 사는 것도, 엄마로 사는 것도 버거웠다. 사실 나라는 사람은 자신 하나 건사하기에도 부족한 인간인데 그걸 몰랐다. 결혼도 출산도 때 되면 해야 하는 숙제인 줄 알았다. 누구 하나 이 거대한 서사의 진실에 대해서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당해보고야 알았다. 나는 가끔 탄식했다. “결혼은 인류 존속을 위한 음모였어.”라고. 비혼인 친구가 말했다. “그걸 몰랐느냐고, 난 진즉에 알았다고.” 와, 연대에 세 번이나 합격한 사람은 클라스가 다르구나, 어떻게 그걸 겪어보지도 않고 알았지.


“이런 건지 몰랐어요. 이렇게 억울하고 힘든 건지 알았으면 안 했어요. 저는 그저 시켜서 했어요. 모르고 당했어요.”라는 내 말에 동료 선생님께서 누가 시켰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대한민국이죠.” 

이 나라에서 삽십 년을 살면 자연스럽게 세뇌된단 말이에요. 취업하라고, 결혼하라고, 애 낳으라고, 하나 말고 둘 낳으라고 자꾸만 등 떠민단 말이에요. 그냥 놔두지 않는단 말이에요.      




만약은 없지만, 돌아갈 수 있다면 아이는 낳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 번잡한 삶은 이번 생으로 족하다고. 다음엔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 ‘독거중년’, 다음 생이 있다면 이뤄보고 싶은 꿈이 생겼다. 이번생은 태어난 김에 사는 거고, 결혼한 김에 같이 가는 거고, 낳은 김에 키우는 걸로 마무리를 해야할 것 같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만, 내 아이 역시 사랑하니까 이생망. 아니아니 망했다뇨, 그게 아니라 '연자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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