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르셔 꽤 Oct 27. 2020

호르몬에 문제가 있지 않고서야

갑.분.연애사

우리는 과 CC(아, 이런 단어가 존재했었지.)였다. 첫 1년은 동기로, 다음 1년은 절친으로, 그 후 8년은 연인으로 함께했다. 그냥 동기였을 때 나는 그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음 해에 같은 학과를 선택하면서 늘 함께 다니게 되었는데 시간표도 모르고, 강의실도 모르고, 과제도 모르던 내가 모든 것을 그 아이의 전화번호 하나로 해결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빈틈 때문에 친해지게 된 것. 여름 방학엔 둘이서 정동진에서 일출을 보고, 부산까지 내려갔다 오는 며칠 간의 무박 여행을 다녀왔다. 원래 함께 가기로 했던 친구가 두엇 정도 더 있었는데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은 우리뿐이었다. 기차와 버스에서, 새벽까지 문을 연 달맞이고개의 까페에서 잠을 잤다. 카페가 문을 닫은 후 목욕탕이 문을 열기 전까지의 공백에는 목욕탕 앞에서 노숙을 했다. 나는 피곤할 때마다 곯아떨어졌지만 녀석은 내가 머리를 기대와서, 또 모기를 쫓아주어야 해서 잘 수가 없었다(고 했다. 나중에 들으니). 석굴암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가볍게 비가 왔는데, 우리는 호젓하고 싱그러운 숲길을 우산을 나눠 쓰고 나란히 걸어 내려왔다. 그때의 풍경이, 그 순간이 참 좋았다.    

  

여행 전이었는지, 후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즈음 녀석은 나에게 고백을 했었다. 나는 별다른 마음이 없었고, 어떻게 거절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아마 나랑 사귀면 네가 힘들 거야.”라고 가볍게 둘러댔다. 그해 가을에 내가 신었던 신발은 장식 리본이 종종 풀리곤 했는데 그럴 때면 녀석이 매번 무릎을 꿇고 묶어주었다. 그가 나보다 잘 묶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국회도서관이나 국립중앙도서관에 함께 갔다. 녀석은 자료를 찾고 복사를 하는 일에 능숙해서 나는 늘 도움을 받는 편이었다. 겨울의 초입, 도서관에 다녀오던 길이었고, 급하게 전철에 올라탔던 것 같다. 통로에 마주 서서 신나는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고, 손뼉을 치고 있는 녀석의 손을 내 두 손으로 감싸며 “맞아, 맞아!” 류의 리액션을 할 때였다. 갑자기 몽글몽글한 기분 좋은 느낌이 올라와서 멈칫했다. 사실 남자 아이의 피부가 너무 부드러워서 깜짝 놀라기도 했던 터라 그 순간은 내게 꽤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았다. 어쩌면 그날 ‘나도 녀석을 좋아하게 된 걸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해 겨울, 함께 과제를 하던 어느 밤에 우리는 입맞춤을 했고,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나는 책임감 있는 누나로서 ‘하는 수 없이… 오늘부터 1일’을 세게 되었다.      


우리는 코드가 잘 맞았다. 그가 나에게 맞춰주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날, 녀석은 아침으로 준비해 온 삶은 감자를 꺼내 보이며, "느집엔 이거 없지?" 하면서 생색을 내고는 제가 준 것을 남이 알면 큰일 날 테니 얼른 먹어 버리라고 했다.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한참을 웃었다. 사이좋게 감자를 나눠 먹으며, 우리는 소설 속의 감자가 삶은 감자인지 구운 감자인지 옥신각신했다. 녀석은 그 분위기상 구운 감자는 안 어울린다고 했고, 나는 내가 울타리 엮을 때 점순이가 불 피워가며 감자 굽는 장면을 생각해 보라고. 그게 나를 사랑하는 점순이 마음이 더 잘 드러나는 거라고 말했다.(정답은 구운 감자였다. “언제 구웠는지 아직도 더운 김이 홱 끼치는 굵은 감자 세 개가 손에 뿌듯이 쥐였다.”)


대개 남자들은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는 것도, 쇼핑을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는데 그는 예외였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기꺼이 함께해 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하루 종일 붙어 있었다. 아침이면 한 시간 거리의 우리 집으로 나를 데리러 와서 다시 한 시간 거리의 학교에 함께 가기도 하고, 내가 과외 알바를 하는 동안 근처에서 지루한 시간을 견디며 과외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고는 했다. 우리를 아끼는 교수님은 “그렇게 둘만 다니면 다른 것들을 놓치게 될 수도 있다.”고 걱정하실 정도였다. 우리는 둘만으로 충분했고, 둘이서도 바빴다. 교수님의 말씀대로 내 대학 생활은 졸업장과 녀석, 달랑 이 두 개를 얻고 끝이 났다. (아니 하나 더 있다. 나는 구입하지도 않은 졸업 앨범을 갖게 되었다. 녀석이 그걸 들고 장가를 왔기 때문이다. 오호, 뜻밖에 얻은 것도 있군그래.)  


그는 다정한 남친이었다.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사람이었다. 내가 시골집에 내려가는 날, 녀석은 버스터미널에서 나를 배웅하며 직접 싼 삼 단 찬합 도시락을 내밀었다. 그 과한 정성이 웃기고, 부끄럽고, 좋았다. 내 음력 생일과 양력 생일 사이의 간극은 일명 ‘생일 주간’이었다. 짧게는 1주일에서 길게는 3주 정도 되는 그 기간에 그는 매일매일 이벤트를 하며 나를 살뜰하게 챙겼다. 나중에는 나도 언니들도 생일 주간을 설레며 기다리게 되었다. 철없이 백화점에도 자주 갔었는데, 마음에 들었지만 사지 않고 돌아온 옷이 어느 날 내 사물함에 들어있기도 했다. 어느 더운 여름엔 수험생 처지에 나에게 에어컨을 선물해 주고 돈이 없어서 자신은 내내 김밥만 먹으며 버틴 적도 있었다.      


북적대는 마을버스를 타고 전철역으로 가던 중이었다. 녀석에게 기대어 서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때 녀석은 그곳이 버스 안이라는 걸 잊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녀석의 입술이 내 입술에 가볍게 닿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깜짝 놀랐는데, 의자에 앉아계시던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응, 좋을 때야. 잘한다, 하던 거 계속해.”

얼마 전에 본 영상에서 진행자가 어린아이에게 사랑이 뭐냐고 물었더니, 아이는 “갑자기 꼭 끌어안고 싶어지는 마음”이라고 했다. 고개를 들어서 눈을 마주친 것뿐인데, 갑자기 입을 맞추고 싶어지는 녀석의 마음이 느껴져서, 할아버지의 너그럽고 유쾌한 반응 덕분에 그날의 하굣길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그가 군대에 다녀와, 졸업을 하고, 수험생이 되는 동안, 나 역시 졸업을 하고 대학원을 마치고 수험생이 되었다. 한없이 쪼그라들기 마련인 수험생 시절에도 나는 녀석이 있어서 든든했다. 물론 불안하고 초조하고 자신 없는 시간들을 보내야 했지만, 적어도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정하고 헌신적인 남친 덕분에 외로움과 우울함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는 연애 7년 차의 세 계절을 노량진에서 함께 보내고 나란히 공무원 시험과 임용 시험에 합격했다.      


주변에선 그를 두고 어떻게 그렇게 한결같은지 신기해했다. 모두들 그의 건강을 의심했다. 호르몬 분비가 정상적이지 않다고. 사실 나도 그렇게 느꼈다. 9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안 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내게 화를 낸 적도 한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나는 부럽다거나 신기하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싫지 않았다. 더러 싸우기도 했지만 한 번도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지나가던 할아버지께 “아이고, 잘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한 번 더 있었다.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내가 화를 내며 녀석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돌아서던 때였다. 녀석에게 받은 것들이 많은 만큼 나도 아주 가끔은 무언가를 주기는 했다. 정강이를 걷어차 주거나, 면박을 주거나, 마음에도 없는 이별을 통보해서 겁을 주었다. 이것들은 자주 주던 것이 아니니 누가 봐도 나는 받는 쪽이었다.(거 봐, 내가 미리 말했잖아. 나 만나면 힘들 거라고. 분명히 도망갈 기회를 주었었잖아.)      



그의 사랑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지만, 나는 가끔 내 마음이 궁금했다. 녀석이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괜찮을 것 같은데.

'이 정도만 사랑해도 되는 걸까' 하고.





갑분연애사... ^^

매거진의 이전글 된장찌개에 눈물을 말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