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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르셔 꽤 Sep 18. 2020

내가 마흔하나에 뒤늦게 깨달은 것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저는 마흔에 몇 가지 인생의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런데 마흔 하나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마흔에는 알지 못했던 걸 또 하나 갑자기 정말 퍼뜩 깨달았어요. 한 살 더 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나 쉽게 깨달음이 또 오다니 사십 대란 어느 시인이 말한 것처럼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성숙한 아름다움이 절로 갖춰지는 때인가 봐요. 제가 이렇게나 현명하고 지혜로워지다니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제가 얻은 깨달음이란 게 말하자면 유쾌한 것만은 아니에요.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관한 것인데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는 것과 알아봤자 딱히 달라질 게 없다는 사실이 당혹감과 실망감을 동시에 느끼게 했거든요.



저는 남편을 좋아해요. 마음으로 말고 머리로요. 반듯하고 상식 있고, 나름 정의롭고 성실하니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든든한 직장도 있고 돈도 잘 벌어 와요.(아니 누가 많이 번대요. 많이 벌어오는 게 아니라 그저 매월 꼬박꼬박 남부끄럽지 않을 만큼 벌어와요. 아니 아니 ‘남부럽지 않게’가 아니라 ‘남부끄럽지 않게’요. 네네 그냥 따박따박 벌어와요. 죄송해요 돈 얘기만 나오면 저도 모르게 언짢아져서요. 부부 공무원의 서울살이가 이런 건지 몰랐어요.) 오래 연애하고 10년이나 같이 살았는데도 아내 바보에 가깝고 애들한테도 그럭저럭 잘하니 뭐 이 정도면 양호하죠. 네 이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사람일지도 몰라요. 그래서 머리로는 이 남자를 좋아해요.



그런데 마음은 그렇지가 않아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거슬려요. 바쁜 아침에 외출 준비를 할 때나 늦은 밤에 빨리 아이들을 재워야 하는데 꾸물거리며 제 동선을 방해하면 그 존 자체로 바로 확 짜증이 나요. 제 이상형은 ‘식민지 지식인’이거든요. 네, 윤동주나 백석을 떠올리시면 돼요. 전 시대의 아픔에 고뇌하는 (다소 마른 편인) 지적인 미남을 좋아해요. 그런데 이 남자는 시대의 아픔에 관심은 있지만, 그래요 뭐 무식하지도 않지만, 다소 뚱뚱해져 가고 있다는 게 문제예요. 그의 배둘레에 대해 대놓고 말하거나 에둘러 말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게 한심해요. 운동을 권하면 ‘난 숨쉬기 운동 말고는 관심이 없어’라고 하질 않나, 채식이 그렇게 몸에 좋다는데 채식 위주로 먹으면 어떨까 물으니 ‘대신 고기는 입에 좋잖아’하질 않나. 벨트 위에 올라앉은 지방을 어루만지며 ‘나의 인품을 매도하지 마’라고 할 때는 진짜 입을 때려버리고 싶어요. 식민지 지식인은커녕 점점 앞잡이의 모습이 되어가는 이 사람에게 남자로서의 매력이 전혀 느껴지지가 않아요. 시간이 갈수록 부피가 커져가는 이 남자랑 살아보니 마른 남자를 좋아하는 제 취향은 참 확고한 거였어요. 이 이야기를 친구한테 했더니 어떤 게 마른 거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연예인처럼 마른 게 좋다고 조인성, 현빈, 강동원 등을 떠올리면 된다고 했더니 닥치래요. 그건 마른 게 아니라 몸이 좋은 거라구요.



오늘 낮에 딸이 귤을 먹다 볼을 깨물기에 너는 어쩜 아빠랑 똑같냐며 ‘아빠가 잘하는 게 세 가지 있잖아’하고 말하니 딸이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정답을 말하더군요. 첫째 음식 먹다가 입 안 깨물기, 둘째 걷다가 여기저기 부딪히기, 셋째 방귀 뀌기. 네 저희 남편이 잘하는 거 세 개가 이거예요. 이 따위니 제 마음이 돌아서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주말 아침에 일어나 떡진 머리로 빈둥대다 외출 직전에 씻는 것도 딱 싫구요. 가끔은(사실은 자주 종종) 음식 먹는 소리도 듣기 싫어요. 그 사람이 벗어 놓은 속옷이나 양말도 그다지 만지고 싶지 않아요. 저희는 언제부터인가 특별한 일이 없으면 통화나 문자도 안 해요. 귀찮거든요.



세상 남자 다 거기서 거기다, 암만 근사하고 멋있어 보여도 내 집에 가져다 놓고 보면 다 똑같다, 그래 이 정도면 양호하다 생각하고 있어요. 머리로는 분명 좋아하는 게 맞는데...맞는데... 마음은 그렇지가 않아요. 그냥 못마땅하고 거슬려요. 내가 이 남자를 왜 이리 싫어하는가 생각해 보니 제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았어요. 이 사람과 9년을 연애하고 10년을 같이 살며 애를 둘이나 낳고, 그 애들이 9살, 7살이 될 동안 몰랐다가 바로 어제야 깨달았어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들 ‘세상에 태어나 제가 가장 잘한 일은 바로 아이를 낳은 거예요.’라고 망설임 없이 이야기할 때 저는 단 한 번도 아이를 낳은 게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굳이 따지자면 아이를 낳은 게 가장 ‘큰일’이다 -중의적인 의미로- 정도로 생각했죠. 다른 엄마들과 제 마음이 달랐던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아요.



생각해 보니 사실 제 마음의 1순위는 언제나 그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단 한 번도 변함없이 말이죠. 그런데 저는 왜 그걸 몰랐던 걸까요. 그 사람에 대한 이 지독한 사랑을 왜 이제서야 알게 된 걸까요.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 언제나 관심 있게 지켜보면서 항상 다 해주고 싶었고 단 한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죠.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 다 해주고 싶었거든요. 그 사람이 무심코 그냥 지나가는 말과 생각으로 재미있겠다 좋겠다 맛있겠다 괜찮겠다 하는 그 모든 것들까지도 빠짐없이 다 해주고 싶었어요. 하나라도 더 주지 못해 늘 아쉽고 안타까웠어요. 커피를 좋아하는 그 사람이 자정 넘은 시간에 커피 생각을 잠깐 하기만 해도 저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내렸을 정도예요. 부담스러우면 한두 모금만 마시면 되지 생각하며 남편에게는 생기지 않는 너그러움이 그 사람에게는 한없이 솟아나는 거예요. 단적으로 그 사람이 음식을 씹는 소리는 하나도 안 거슬리고, 그 사람의 배둘레가 좀 늘어나는 것 따위는 그냥 막 이해가 되는 거죠.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는 아들이나 딸보다도 그 사람의 기분과 요구에 항상 더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 같아요. 아들이나 딸이 상처 받을 것을 알면서도 그 사람이 더 중요했어요. 그래서 가끔은 아니 사실은 자주 아이들을 내버려두고 그 사람에게 충실하기도 했어요. 네 정말 어이없게도 글을 쓰면서 제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더 확실하게 깨닫고 있어요. 제 신경은 온통 그 사람에게 향해 있었네요. 그런데 저는 정말 몰랐어요. 너무 오래전부터 항상 그래 왔고 너무 당연하게 그래 왔기 때문에 진짜 제 마음을 알아챌 수가 없었어요.



저는 오히려 제가 그 사람을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생각해 보면 딱히 잘하는 것도 없고, 성격도 별로고, 외모도 그저 그렇고, 그렇다고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성실하지도 않고,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나 비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곰곰이 따져보거나 대충 생각해 봐도 그 사람의 장점을 찾기가 어려웠거든요. 그러니 당연히 제가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던 거죠. 그 사람에 대한 제 마음이 사랑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마흔 하나가 된 어느 날 ‘아니야 이건 사랑이야, 이렇게 민감하게 그 사람에게 반응하며, 생각해 보면 매순간 그 사람을 1순위로 두고서 뭐든 다해주고 싶은 마음이 사랑 아니고 뭐겠어.’하는 걸 깨달은 거죠.



그래서 저는 당혹스럽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해요. 그것이 사랑인 줄 몰랐던 제 어리석음이 당혹스럽고, 그렇게 간절했으면서도 그것밖에 못 해준 제 자신이 실망스러워요. 제가 머리로 좋아하는 제 남편은 이런 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해 줄 남자예요. 어린 짐승 아들도, 오히려 첫째보다 더 사려 깊은 딸도 제 마음을 알아줄 거예요.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 것도 같아요. 자기들끼리 놀라고 하고 틈만 나면 침대에 가서 드러눕는 엄마를 보며, 딱 한 공기 남은 밥을 ‘미안하지만 엄마가 먹을게’하는 이 남다른 엄마를 보며 이미 눈치챘는지도 몰라요. ‘엄마는 우리보다 엄마 자신이 더 먼저야, 더 중요해.’라는 것을요.



네,  제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바로 저예요. 어쩌면 저만 빼고 다른 가족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어머 부끄럽고 미안해라.)



저는 당연하게도 남편보다, 미안하게도 아이들보다 제 자신이 먼저였어요. 어쩐지 남편이 쓰는 돈은 아까운데 저한테 쓰는 돈은 안 아깝더라구요. 옷이 그렇게 많아도 또 사주고 싶고, 구두도 가방도 사주고 싶고, 맛있는 거 먹여주고 싶고, 좋아하는 것 다 해주고 싶고, 피곤하면 쉬게 해주고 싶고, 원 없이 자게 해주고 싶더라구요. 어쩐지 아들딸 챙기는 게 그렇게 버겁고 피곤하더라구요. 아이들을 낳은 게 내 인생에서 최고로 잘한 일이야 소리가 안 나오던 게, 더러워진 집구석이 그렇게 지긋지긋하고, 애들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그렇게 싫었던 게 바로 제가 1순위이기 때문이었어요. 제 평화와 안락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용납할 수 없을 만큼 저는 저를 사랑했던 거예요. 잘하는 것 하나 없고 가진 것 하나 없다며 난 자기애도 없고 자존감도 낮구나 생각했는데 어제오늘 큰 깨달음을 얻었어요. 아니 아니 나는 이토록 나 자신을 사랑하는구나, 나는 나밖에 없구나, 나는 나만 아는구나. 제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고 너무너무 기뻐요. 물론 저도 이 사랑의 방법이 옳다고는 못하겠어요. 처먹고 처자고 닥치고 사들이는 방법 말고(거칠어서 죄송합니다.) 저를 성장하게 하고, 평안하며 풍요롭게 하는, 그리고 남편에게 너그러워지고 아이들에게 각별해지는 방법으로 제 자신을 사랑해 보려고 해요.

어쨌든 저는 제가 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기뻐요. 이건 정말 중요한 깨달음이에요.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저는 제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마음이 들거든요.



(덤. 오늘 저희 집에 놀러온 언니한테 이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늘 자신이 없었으며, 못마땅하고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아니다. 이 사랑은 이렇게나 지독하며 맹목적인 것이었다 하고 이야기하니 언니가 울었어요. 웃겨 죽겠다며 울었어요. 그리고 생각해 보니 자기도 자신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었다며 웃었어요. 저희 언니는 마흔일곱이 되었는데 아직도 깨닫지 못했더군요. 오늘 국화꽃 같은 동생에게 큰 가르침 하나 배운 거죠.)


덧. 마흔에 얻은 깨달음은 다음 기회에 들려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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