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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르셔 꽤 Oct 24. 2021

사랑은 랜선을 타고

랜선이모는 소녀의 눈물을 참지않긔

      

“엄마, 나는 나쁜 아이인가 봐. 나는 정말 나쁜 아이야.”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갑작스러운 고백을 하는 딸아이의 말에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내가 진분펭이를 찾게 해달라고 매일매일 빌었거든. 그런데 소원이 안 이뤄져. 내가 나쁜 아이라서 그런가 봐.”

아이는 서러움에 어깨를 들썩이며 내 가슴에 안겨 왔다. 그럭저럭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며칠 전 베란다에 서서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을 때 그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엄마, 내 사랑 진분펭이가 저 밖에 어딘가에 있잖아,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라고 말했을 때 네 마음에 뚫린 커다란 구멍을 봤어야 했는데. 내가 잊은 만큼 너도 잊을 거라고, 괜찮아질 거라고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하던 일을 멈추고 아이와 함께 잠자리에 누웠다. 아이는 온갖 사례를 들어가며 자신이 얼마나 나쁜 아이인지를 부지런히 털어놓았다. 사이사이 훌쩍이고, 코를 풀고, 일어나 세수를 하고, 다시 눕고, 울고, 코를 푸는 걸 한 시간 가량 반복하다 겨우 잠이 들었다. 그녀의 고해성사를 들으며 나는 조용히 핸드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부지런히 쓰다듬고 토닥이고 위로하면서 사이사이 웃음을 참느라 큭큭댔다. 7살 아이가 저지른 죄는 대개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이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찌 보면 자신의 성장사를 읊어주는 것 같기도 했다. “엄마, 나는 재아 엄마가 디자이너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음속으로 재아 엄마가 만든 옷은 안 예쁠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미안해. 엉엉.” 친구 엄마의 직업을 질투할 만큼 컸구나, 그 마음이 부끄럽고 미안했구나.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들여다보며 그 순간이 동화의 한 장면처럼 귀하고 아름다워서 마음이 뜨겁게 차올랐다.     

 

진분펭이는 아이의 애착 인형이다. 펭귄을 좋아하는 딸이 여의도 아쿠아플라넷에서 데려온 ‘진한 분홍 펭귄’. 밤이나 낮이나 함께한 친구. 너무 낡아서 들고 다니기 민망해 새 걸 사러 갔더니 진한 분홍 펭귄은 단종되었단다. 그 자리에 연한 분홍 펭귄만 있어서 그걸 사 왔더니 그때부턴 둘을 세트로 안고 다녔다. 연분펭이 역시 딸아이의 사랑을 듬뿍 받고는 이내 낡아서 내 부끄러움이 두 배로 커질 무렵 진분펭이를 잃어버렸다. 아이는 그날 집에 돌아오자마 종이에 진분펭이를 그렸다. 잊어버리고 싶지 않다며, 기억해야 한다며. 남편과 내가 며칠간 틈나는 대로 동선을 몇 번이나 되짚어가며 샅샅이 찾았지만 인형은 보이지 않았다. 인터넷 쇼핑몰과 중고 카페 뒤지기, 지점마다 연락하기, 비슷한 것 사드리기, 아예 새로운 것 사드리기 등 여러 모로 애를 썼다. 어떤 펭귄도 진분펭이의 빈자리를 채워주지는 못 했지만 시간이 흐른 만큼 아이의 마음도 아물어가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나 보다.      

"잊지 않을게 진분펭이야." 눈물로 그린 그림


아이는 울다 지쳐 잠이 들었지만 나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인형을 잃어버리고 슬퍼하며 자책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을 나쁜 아이로 규정하는 걸 보니 나도 눈물이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중고물품을 파는 카페에 접속했다. 부지런히 검색어를 바꿔 가며 찾아보았지만 역시나 비슷한 건 있어도 같은 건 없었다. 수년 전에 같은 제품을 구입한 후 포스팅을 했던 블로그에도 접속했다. ‘혹시 아직도 그 인형을 갖고 계시냐, 저희 아이의 애착 인형인데 잃어버려서 간절히 찾고 있다. 갖고 계시다면 죄송하지만 제가 중고로 구입할 수 있느냐’는 댓글을 한 달 전쯤 달아 두었는데 혹시나 대댓글이 달렸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더 이상 활동을 하지 않는 블로그라 그런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 달 전이나 지금이나 인터넷에서 구입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평소에 활동하던 카페에 글을 올렸다. 아이가 울다 지쳐 잠든 사연을 전하며 진분펭이와 아이가 오랜 시간 함께한 사진들을 게시했다. 딸이 엉엉 울며 자기는 나쁜 아이라고 말하니 꼭 찾아주고 싶다고 썼다. 잠시 후 랜선 이모들의 댓글이 이어졌다. ‘아이의 마음이 너무 예쁘다, 꼭 찾기를 바란다. 우리 집에도 애착 인형 잃어버리고 6개월째 훌쩍거리는 아이가 있다. 중고나라에 펭귄 인형 치니 8천 원짜리 진펭귄이 있다. 이거 부산아쿠아리움 기념품샵에 비슷한 거 있다. 윗 댓글 보니 부산아쿠아리움에 있다는데 제가 부산 사니 사서 보내드리겠다. 이 사진 속 인형이랑 많이 닮지 않았느냐’ 등등 전국의 이모들이 마음을 쓰며 걱정을 해주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이 아이를 찾고 계신가요? ^^
한화아쿠아플라넷 출신입니다.
속에 삑삑 소리 나는 것도 있구요.

라는 댓글이 달렸다.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진분펭이 사진과 함께. 그 댓글을 보자마자 눈물이 흘렀다.

“저 울고 있어요. 죄송하지만 저희 딸에게 주실 수 있을까요? 너무 뻔뻔하죠. 눈물이 줄줄 납니다. 죄송한데 또 겁나 행복한 건 뭔가요.”

“보내드려야죠♡ 저도 애착 인형 있는 딸 키워서 그 맘 알아요^^ 쪽지로 주소 알려 주셔요. 내일 보낼게요!”

“아 감사합니다. 오늘부터 저 쪼끔 더 착하게 살게요.”     

그 아래로 ‘대박이다, 세상에 안 되는 게 없다, 감동이다, 아침 방송에 나왔던 잃어버린 아이를 찾은 것 같다, 제가 다 감사하다, 눈물이 펑펑 난다. 아름다운 이야기다. 너무나 훈훈한 결말이다’ 등의 댓글이 주루룩 이어졌다. “대박입니다. 저도 감동이. 자 이제 진분펭이가 어떻게 따님 소원을 듣고 나타난 것인지 그 과정만 자연스레 연출하시면 됩니다. 저희 딸도 애착 인형 공항서 잃어버려 다시 샀는데 전 공항에서 특수 세탁한 걸로 연출했습니다.”라는 댓글을 보며 중요한 팁도 얻었다.      


랜선이모가 보내주신 진분펭이. 고마워요 이모.

목요일 새벽에 글을 올렸는데 금요일 저녁 진분펭이가 집에 왔다. 랜선이모의 실행력은 로켓배송 저리가라다. 몰래 상자에서 인형을 꺼냈다.  침대 위에 올려 두고 떨리는 마음으로 딸을 불렀다.

"은서야 네가 밤새 울어서 진분펭이가 울음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났나봐. 그래서 누군가 진분펭이를 발견하고는 경찰서에 갖다 준 거지. 경찰아저씨가 주인을 찾아주기 전에 특수세탁을 해서 이렇게 새 진분펭이가 된 거야. 진짜 경찰아저씨의 특수세탁은 실력 짱이다. 마침 아빠가 오늘 경찰서에 진분펭이가 있는지 또 물어보러 갔다가 거기서 진분펭이랑 딱 마주친 거야. 놀랍지? 엄마는 믿기지가 않아."

“엄마 이건 진짜 내 진분펭이야. 이것 봐 부리에 있는 보리도 똑같아”

“어? 보리? 그게 뭔데?”

“여기, 여기 있잖아 이거 보리 모양”

“그리고 엄마 내가 지금 얼굴을 꼬집어 봤는데 아파, 그럼 이건 꿈이 아니잖아. 이건 진짜야. 진짜로 진분펭이가 돌아왔어.”

“그래 맞아, 진짜 우리 진분펭이야, 왜냐면 엄마는 지금까지 너 말고 진분펭이를 들고 다니는 아이를 한 명도 못 봤거든. 우리 동네에서 발견된 진분펭이라면 그건 분명히 은서 니꺼지.”

“맞아 엄마, 난 너무너무 행복해. 이건 절대 꿈이 아니야.”     


펭귄의 부리에 있던 보리 모양은 찾아보면서도, 가슴에 있는 ‘다녀왔어♡’라는 글자를 누가 썼는지는 전혀 궁금해 하지 않아서, 드라이로 급히 말리느라 망가진 삑삑이가 원래의 볼록함을 회복하고 건강하게 삑삑대는 걸 전혀 의아해하지 않아주어서 고마워 딸. 진분펭이가 돌아온 후 계절이 8번이나 바뀌었고, 그 사이 ‘최상냥과 김몽실’ 두 강아지 인형이 늘었지만 진분펭과 연분펭에 대한 네 사랑은 여전하지. 오늘 오후에 고구마를 먹을 때 “은서야, 흰색이 맛있어 노란색이 맛있어?”하고 물으니 네가 말했어.      


엄마, 둘 다 똑같이 맛있어. 어느 한 가지가 맛있다고 말하면 다른 고구마가 서운하잖아. 연분펭이랑 진분펭이처럼 둘 다 똑같이 소중해. 둘 다 맛있어.     

 

고구마의 마음을 헤아리는 널 보며, 연분펭이와 진분펭이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널 보며, 오늘 새삼 랜선 이모들에게 감사했어. 하지만 네게 랜선 이모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거야. 아주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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