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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보영 Sep 12. 2017

내가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이유

가난은 불행이 아니다

고도 자본주의적 금융사회라 일컬어지는 현대사회에서 난 스스로 '가난'한 삶을 선택했다.


자발적 가난의 삶을 선택한 것은 크게 두 가지 때문이었다. 

첫째는 행복해지고 싶어서다. 가난과 행복이 동의어가 아닐터인데 얼핏보면 말이 안되는 것같지만 내게는 차라리 그러하다. 가난의 반대어는 부와 풍요다. 사전적 관점에서 보자면 내가 선택한 삶은 사실 '가난'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이 '부'와 '풍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미전달을 쉽게 하기 위해 '가난'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가난은 빈곤이고 넉넉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나의 객관적 상황을 정확하게 나타내 주는 단어는 아니다. 그렇지만 난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애쓰지 않으려고 한다. 대신 돈을 벌려고 버려지는 노동시간을 행복을 추구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첫 번째 이유이다. 난 아직까지 돈을 벌면서 행복을 느껴보진 못했다. 돈을 벌면서 행복을 느낄 수만 있다면 아마 난 돈을 열심히 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돈이라는 걸 벌면서 혹은 벌려고 노력하면서 행복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불행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아예 돈에 집착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돈에 집착하지 않고 돈을 많이 벌려고 하지 않다보니 당연히 내 주머니는 가벼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태가 곧 '가난'이라면 난 지금 '가난'하다. 그리고 그 선택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발적'인 셈이다. 따라서 내가 스스로 선택한 내 삶의 형태는 돈을 행복과 대체하지 않는 '자발적 가난'의 상태인 것이다.


둘째는 자유롭고 싶어서다. 가난의 반대어가 부와 풍요라면 부와 풍요를 위해 필요한 선결조건은 당연히 돈이다. 하지만 돈은 노동과 시간을 투자 내지 소비한 결과물이다. 대체로 노동에 투자하는 시간만큼 수입은 증가할 것이다. 아! 물론 아직 우리 사회가 '건강'하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난 우리 사회가 '비교적' 건강하다고 보지 않는다. 정당한 노동만큼의 대가가 사라진 현장이 너무나도 많고 저소득층 혹은 3D업종에서는 노동의 '정당'함보다는 '불가피함'이 더 크기 때문이다. 여기서 난 사회의 '건강성'을 점검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이 문제는 이쯤에서 그만두자. 


어쨌든 하루 24시간 중에서 돈을 목적으로 한 시간의 소비가 수입의 증가로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노동에 투여한 시간만큼이나 자유를 행사할 시간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이기 때문이다. 근데 이 말도 엄밀히 따져보면 맞는 말은 아니다. 얼핏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같지만 그렇지 않다. 돈이, 부가 풍족한 사람은 시간마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돈은 시간의 낭비를 막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해준다. 돈은 목적지까지 빠르고 편하게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젊음을 살 수는 없지만 늙음을 가릴 수 있는 무언가를 돈으로 살 수 있다. 그렇지만 내가 누리고 싶은 자유와 행복은 돈이 아니라 풍족한 시간 속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수입의 증가를 위한 노동시간 연장에 투자하고 싶지 않다. 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을 확보하고 싶다. 그러려면 불필요한 노동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다. 자유를 얻기 위해 '과도한 노동'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내 삶이 가난해지는 것이므로 난 가난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행복과 자유를 위해 난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다. 이 선택만으로도 난 내가 얻고자 하는 자유를 행사했다.

이 글을 쓰면서 실제로 [자발적 가난]이라는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글은 그 책에 대한 서평이나 감상문이 아니다. 그저 온전히 내 삶을 부와 풍요를 갈망하는데 소진하지 않겠다는 자기 선언적 글이다. 내가 선택한 '자발적 가난'과 이 책이 전달하려는 메세지는 절대적으로 다르다. (내 글을 읽고 책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글은 돈을 쫓아, 돈이 빼앗아가는 행복과 자유를 되찾아 오고 싶은 개인적인 욕망을 정리한 글이다. 어쨌든 행복과 자유를 위해 난 '가난'이라는 선택을 했고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나 스스로의 사유는 충분히 자유의지의 발현이며 내 사색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이 사유를 실천으로 표현하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현재 나는 온전히 내 자유의지로 살아갈 수 없는 처지에 있다. 난 기혼이고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이 '선택'은 내 가족에게 동의받은 결과가 아니라 내 사유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실천과 경험의 과정에서 동의를 구할 부분은 구하고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은 공유하면서 나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나아가 나와 관계한 많은 사람들의 행복까지도 두루두루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직까지 우리 가족은 '가난'이라는 단어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런 삶의 '형태'에는 적극 동의한다.


가난은 소유하지 않는 것과 동의어다. 갖지 않는 것. 탐하지 않는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소유하지 않는 것이 어떠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기본 조건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구도자가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므로 스님의 무소유와 우리의 '갖지 않음'은 다를 것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수는 없다.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 것은 소유해야 한다. 그런데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 것'은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를 것이다. 난 네 식구의 가장이다. 가정의 대장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나의 지위를 '가장'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니 그 단어를 사용할 뿐이다. 하지만 독재자와 같은 뉘앙스의 대장은 아닐지언정 내가 우리 가정에서 갖는 사회적 의미마저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난 그 역할에 소홀히 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가장'의 역할은 무엇인가. 우선 가장 중요하게도 가족의 경제운영을 위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 두번째는 최소한의 장유유서에 따른 질서유지를 하는 것이다. 세번째로 육아에 대한 책임이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난 '가난'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가장'의 삶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아버지로서의 책무와 역할을 포기하지 않고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돈'을 멀리하는 방법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자발적 가난'은 '무노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한마디로 '자발적 가난'이 '놀고 먹자'는 배짱이주의가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적어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 노동의 대가를 통해 '부'를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불공정 현대사회에서 그 '부'라는 허상을 쫓지 않고 지금 당장 내가 원하고 있는 '행복'과 '자유'를 추구하는 삶을 난 '자발적 가난'이라고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그 삶을 실천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이유'이다.


"너무 혹독한 결핍은 사람을 좌절에 빠뜨리지만 적당한 결핍은 창조적 에너지를 일으킨다."
                                                                                                                -유시민(후불제 민주주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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