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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톺아보기 Mar 01. 2022

'사랑'이 끝나도 '인생'은 지속된다.

-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리뷰

'언젠가 저 구름 위에서/ 내 운명과 맞딱뜨릴 것임을 나는 안다./ (중략)고독한 유희의 충동/ 그것만이 구름 위 광란 속으로 나를 내몰았던 것인지/ (중략) 이 삶 죽음의 추에 견주어/ 다가올 순간이나 저 스쳐지나간 나날들이 다 부질없음을 
  - 예이츠, <한 아일랜드 비행사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다>

이렇게 삶을 회고하는 한 편의 시로 영화는 시작된다. 죽음 앞에 지나온 삶의 경중이 다 부질없었음을 절감하듯, '파탄'에 이른 사랑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글래디에이터>와 <레미제라블>의 각본가 윌리엄 니콜슨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을 했다. 이혼율 중에 '황혼 이혼'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다는 조사 결과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나이든 부부의 이혼'이야기는 이제 더는 새롭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이라는 작품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날벼락'처럼 이혼이 찾아왔다. 


그 자체로 영화의 주요 등장 인물과도 같은 깍아지른듯한 하얀 절벽이 드리워진 영국 남부의 해안 마을, 그곳에서 노년의 그레이스가 홀로 시를 읊으며 산책한다. 



'아베트 베닝'이라는 배우의 우아함을 한껏 드러낸 도입부,  그런데 상황은 그레이스의 남편 에드워드(빌 나이 분)가 등장하며 달라진다. 학교 선생님인 에드워드, 남편이 돌아와 차를 끓이자 아내는 왜 자신에게는 차를 마실 꺼냐 물어보지 않냐고 힐난한다.  이미 아내가 차를 마시고 있던 것을 알았던 남편, 하지만 아내의 기세에 눌린 남편은 마지못해 아내에게 차를 마실거냐며 묻고 차를 다시 끓인다. 



아주 사소한 이 장면, 하지만 이 장면 하나 만으로도 관객들은 29년을 함께 해왔다는 이 부부의 '균열'을 실감하게 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가 되도록 '백년해로'하겠다고 선언한 결혼, 하지만 그 '결혼'을 '파탄'에 이르도록 하는 건 '배우자의 불륜'이라는 결정적 사건이지만, 사실 거기에 이를 때까지 '차 한 잔'의 무수한 실금이 전제하는 것이다. 



그레이스는 두 사람의 관계에 '사랑'을 당연시한다. 그래서 '사랑'에 부응하는 에드워드의 태도와 행동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사랑에 대한 기대는 일방적인 요구가 되고, 따라서 '갈증'과 '아쉬움'을 결과하며, 심지어 폭력적인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남편의 따귀를 때리고 식탁을 뒤집어 엎어도 그레이스가 바라는 '사랑'은 돌아오지 않는다. 심지어 이제 에드워드는 사랑하는 이가 생겼다며 집을 나가버린다. 



일방적인 '파탄', 영화는 여기서부터가 시작이다. 독실한 믿음만큼이나 결혼에 대해서도 '독실한 믿음'을 가진 그레이스에게 결혼은 '백년해로'라는 확고한 신념이다. 그런데, 신에 대한 믿음이 내 자신이 홀로 해결할 수 있는 것과 달리, 결혼은 이인용 자전거처럼 두 사람이 함께 페달을 밟지 않으면 더는 지탱할 수 없는 것이다. 






이혼에 대처하는 자세에 대하여 


이 엇갈린 신념에 대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나가야 할 것인가. 수많은 막장 드라마는 이런 상황에 대해 우리를 학습시켜왔다. 하지만 막상 이게 내 문제라면?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들>은 두 사람의 아들 제이미를 등장시키며 파탄난 부모의 결혼에 대한 공감을 끌어올린다. 



아버지와 비슷한 성격으로 보이는 제이미 역시 집에 오는 것을 그리 마땅치않게 여길 만큼 어머니를 부담스러워하는 처지이다.  자신의 생활에 간섭하려는 어머니에게 '프라이버시'라며 선을 긋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아버지가 집을 나가버리자 제이미는 아직도 결혼의 파탄을 받아들일 수 없는 어머니 곁에서 '가족'의 해체를 온전히 겪어낸다. 



'가족'이 붕괴되었을 때 , 우리는 누군가의 잘못을 들먹이기가 쉽다. 오랜만에 온 아들에게 신에 대한 믿음을 강권한다든가, 여자친구 없는 아들의 처지에 간섭하려 드는 어머니 그레이스라는 인물은 충분히 '비난'의 여지를 들먹일만한 캐릭터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런 '관습적이고 편의적인 길'을 에둘러 간다. 집에 자주오지 않는 아들에 대해 그레이스가 불만을 토로했을 때 남편 에드워드가 나직히 그건 제이미의 '사생활'이라고 일침하듯, 영화는 위태롭지만 현명하게 '한 개인'이라는 존재를 존중하는 태도로 일관한다. 남의 집안 일에도 갑론을박, 감놔라, 배놔라 식의 공동체적인 사고 방식이 우세한 우리의 정서에서는 이 영화의 화법이 낯설지 모르겠다. 그러나 '개인'의 삶, 그 가치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 시대에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이 말하고자 하는 개인의 존재론은 눈여겨볼 만 하다. 



제이미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집을 나가버린 아버지에 대해서도, 아버지에 대해 늘 사랑을 당연시여기다 못해 강권하듯 어머니의 태도에 대해서도 '비난'이나 '비판'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제와 결혼이라는 생활이 파탄에 이른 부모님에 대해 '냉담'하지도 않는다. 집에 자주 오지도 않는 아들이었지만, 막상 집을 나가버리면서도 어머니를 걱정하고 아버지의 부탁을 듣고, 제이미는 매주 어머니를 찾으며 시련의 시간을 함께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은 그저 상처입은 어머니를 돌보는 시간만이 아니라, 제이미 스스로도 이제 더는 '가족'으로 함께 할 수 없는 자신과 부모님의 시간을 겪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루 아침에 마침표를 찍은 결혼, 그게 남편의 부도덕한 결정이었건, 거기에 어머니의 일방적인 태도가 전제되었건, 그리고 아버지가 토로하듯이 애초에 잘못탄 열차처럼 잘못채워진 시작이었듯, 이제 더는 '사랑'으로 묶여질 수 없는 공동체에서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에게는 자신을 추스릴 '시간'이 필요하다고 영화는 말한다. 






여전히 '가족'이라는, '부부'라는 이름으로 자신과 에드워드를 바라보는 그레이스는 시행착오를 거듭한다. 남편의 잘못을 되돌이킬 수 있는 '실수'로만 바라보던 그레이스이다. 그러나 결국 이제 더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은 현실을 깨닫는다. 남편을 무시하고 자신을 앞세운 그레이스,  오랜 시간 그녀를 세워주었던 잇몸같았던  남편의 부재는 견디기 힘들다.  하얀 절벽 아래 부서지는 파도와 운명적인 음악이 어우러지는 장면들이 강인한 그레이스에게 닥친 운명의 시간을 설명한다. 



이제 더는 부부로서 함께 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피폐해진 채 홀로 바닷바람을 맞는 어머니에게 제이미는 비로소 말을 건넨다.  어머니가 걸어가는 그 힘든 여정이 그 뒤를 따라갈 자신에게 귀감이 되어주기를 바란다고. 내 어머니, 내 아버지를 넘어, 혹은 제이미가 여자 친구랑 헤어져서가 아니라, 삶의 어른으로서 어머니를 존중한 제이미의 설득이다. 



그레이스는 결혼은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요, 순종이었지만, 에드워드는 되돌아보니 그저 잘못탄 열차라고 하듯, 결혼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루는 관계이다. 영화는 파탄난 그레이스의 결혼을 '심판대'에 세우는 대신, 서로 다른 이들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의 결과물로 받아들이려 애쓴다. 



자존감도 높고, 자신과 자신이 선택한 결혼에 대한 자부심에 당당하던 그레이스는 더는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무너진다. 하지만 아픔의 시간을 거쳐 결국 다시 '자신'의 삶을 일으켜 세운다.  영화의 시작이 시를 읊는 그레이스이듯, 다시 '자신'을 찾은 그레이스는 아들과 함께 자신의 작업을 완성해 간다. 결혼은 그저 인생의 한 여정이라고, 사랑이 끝나는 순간에도, 그리고 사랑 후에도 인생이라는 여정은 여전히 지속된다고 영화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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