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일부러 홈쇼핑 채널을 돌려본다. 그 이유는 형제들 대화를 알아듣기 위해서이다. 홈쇼핑이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게 tv를 보는 사람들에게 홈쇼핑은 이제 그저 지나가는 채널이 아니다. 화장품에서, 옷, 신발, 그리고 먹거리, 식자재에 이르기까지 마트를 가는 대신 tv를 통해 손쉽게 구입한다고 한다. 그저 구입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요즘 '트렌디'한 제품들은 다 그곳으로 부터 시작된다. 듣도보도 못한 메이커들이 등장한다. 잠이 안올 때는 드라마나 예능보다 홈쇼핑을 틀어놓으면 부담없다나, 라는 정도이다.
방송 하나, 홈쇼핑 하나 이렇게 퐁당퐁당 연이어진 홈쇼핑 채널이 인기를 끌 수록 그 곳에 종사하는 이들의 '주가'도 오른다. 조카가 오랜 취준 끝에 홈쇼핑에 입사하자, 조카의 엄마는 '성과급' 자랑을 한다. 그러면서 그 시간을 이끄는 쇼호스트들의 어마어마한 몸값을 흘린다. '돈'이 모이는 곳,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 연간 20조가 움직인다는 홈쇼핑 시장을 tvn의 수목 드라마 <킬힐>이 배경으로 삼았다.
▲ 킬힐
ⓒ TVN
킬힐, 이 글을 쓰는 이는 머리가 희끗해지도록 엄두도 내지 못하지만, 여자들에게 '킬힐'은 자존심이라는 이야기는 전해들은 적이 있다. 제목답게 드라마 <킬힐>은 주인공 우현(김하늘 분), 모란(이혜영 분), 옥선(김성령 분)의 킬힐을 주목한다. 검은 구두를 신고 사장의 아내를 만나 고개를 조아리던 모란은 회사 앞에 차가 멈추자, 붉은색 킬힐을 갈아신는다. 이 때 킬힐은 을이던 그녀가 UNI 홈쇼핑의 전무로 기세등등하게 문을 열어젖히기 위한 '갑옷'과도 같다. 우현도 다르지 않다. 방송을 위해 나서는 그녀에게 '킬힐'은 빼놓을 수 없다. '킬힐'이라는 상징적 수단을 통해 보여주는 건, '킬힐'이라는 착장을 하고 전장과도 같은 현실에 나서는 여성들의 모습, 거기에 드라마는 촛점을 맞춘다.
그녀들, 킬힐을 신고 전장에 나서다.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전장, 하지만 그곳에서 최고로 살아가는 삶은 녹록치 않다. 그 녹록치 않음을 한때는 UNI 홈쇼핑의 에이스였지만 이젠 휴지를 파는 처지에 몰린 쇼호스트 우현의 처지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녀 정도나 되는 사람이 뭐 그리 아득바득할 게 있냐고 수근거린다. 하지만 우현에게 삶은 만만치 않다. 남편이 그녀의 목소리에 반해 고백을 했듯 '아나운서'를 꿈꿨다. 하지만 거듭된 낙방은 그녀를 홈쇼핑 쇼호스트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여전히 '탑'은 그녀에게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그런데 정점을 찍기도 전에 미끄럼틀을 탈 처지이다.
하지만 우현은 그럴 수 없다. 남들은 대기업에 다니는 줄 아는 남편은 이젠 실직을 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신세다. 그뿐인가. 남편을 꼬드겨 사업을 하겠다던 남편의 형은 여전히 '사업'을 하겠단다. 문제는 그 '사업자금'을 시어머니가 우현네 집에서 손을 벌린다는 것이다. 가장으로 딸 하나 번듯하게 키우고 싶은 처지, 그런데 그 마저도 쉽지 않다. 그저 조금 밀려나는 게 아니라 세상이 우현을 낭떠러지로 밀어버리는 것같다.
그렇게 위태로운 우현의 처지와 달리, UNI홈쇼핑의 에이스 옥선은 여전히 승승장구 중이다. 대놓고 옥선이 아니라 우현이라며 MD가 불만을 표출할 만큼 옥선의 능력은 자타공인이다. 어디 직업 뿐인가. 이제 명문 정치가 자제로 3선 국회의원에 당대표를 넘보는 이가 그녀의 남편이다. 거기에 든든한 아들까지.
이 정도면 완벽하다 싶은 옥선, 하지만 홈쇼핑 에이스인 옥선의 커리어는 시댁 어른들과 남편 앞에서는 그저 남편의 선거에 도움이 되는가 안되는가라는 잣대로 판가름된다. 그녀가 오랜 시간 쌓아온 것들이지만 그녀가 이룬 것은 아내이자, 며느리로서의 그 자리에 늘 '딜레마'가 된다.
UNI 홈쇼핑을 좌지우지하는 모란은 다를까? 평사원에서 이제 UNI의 보여지는 것과 보여지지 않는 것까지 모든 것을 꿰고 있는 모란, 하지만 '전무'라는 직함도 사장과 사장의 아내 앞에서는 무색하다. 그 누구보다 모란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단 한 번의 실수 앞에서 그녀는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래도 업무면 그럴만 하다. 사장의 아내는 그녀를 불러, 부부 사이의 일을 책임지운다. 사장 집안의 평화를 위해 궃은 일까지 처지해야 한다.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왜 지들의 정해?'라고 이기죽거리지만 그 말을 드러내놓고 할 위치는 아니다.
▲ 킬힐
ⓒ tvn
가장 번성하는 홈쇼핑 업계와 그곳에서 각자의 욕망으로 마주친 세 명의 여자, 우현, 옥선, 모란, 하지만 그녀들의 모습은 그저 홈쇼핑의 쇼호스트와 전무라는 빛나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것만이 아니다. 지금 이 시대에 '직업'을 가지고 '현실'이라는 전장에서 싸워나가는 여자들의 면면에 다름아니다. 그것이 '킬힐'을 신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화려한 곳이건 아니건, 여자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오늘도 자신의 전장에서 싸운다.
번듯한 남편이 있으면 언제든 그만 둬도 되고, 혹은 번듯한 남편의 잘 나가는 일을 위해서는 아내가 조력자가 되어야 하며, 여성 임원이라는 처지는 그녀가 쌓아올린 것과 상관없이 '하대'의 대상이 되는 '경우없음'이 여전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싸워나가야 하는 '전장'의 실태이다. 드라마는 '욕망'이라 하지만, 그건 '욕망'이라기 보다는 여성으로 살아가는 '생존'을 위한 싸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