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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톺아보기 May 21. 2023

엄마로 살아가는게 스릴러 - 엄마의 선택

- 넷플릭스 <더 체스트넛맨> 

이제는 명실상부 '노르딕 스릴러'라는 명칭이 생길 정도가 되었지만, 하나의 장르로 유명해지기 이전 북유럽 스릴러 물에 매료되었던 적이 있다. 아마도 시작은 넬레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의 죽음>이었던 것같다. 셜록 홈즈나, 아가사 크리스티 등등 고전 추리 작가에서 미의 하드보일드나 메디칼 스릴러를 거쳐, 일본의 사회파, 박연선의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같은 코지 미스터리, 중세 캐드펠시리즈까지 '잡식'하던 내게 노르딕 스릴러는 신선했다. 



독일 <백설공주의 죽음>을 시작으로 현실적으로 떠나기 힘든 '노마디즘'의 욕구를 유럽 각국의 작품들을 통해 충족해 나갔다. 유일한 길조차 얼어버려 밀실이 되어버린 지역에서 범인과의 숨바꼭질을 벌이는 넷플릭스 작품으로 돌아온 <트랩트>라던가, 상상하는 그 이상을 보여주는 북유럽 추리의 여왕 이르사 시구르다르도티르 작품, 고전이 된 스티그 라르손,  요네스뵈의 시리즈들은 물론 헨리 망켈 시리즈,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등 모두 각국의 고유한 지리적 공간감과 함께, 북유럽만의 사회적 배경과 그 속에 살아가는 실존적 존재들의 고민을  인상깊게 담아냈었다. 그렇게 섭렵하던 중에 꼭 봐야지 하고 적금처럼 남겨두었던 작품이 쇠렌 스바이스트루프의 <더 체스트넛맨>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작품이 넷플릭스의 6부작 시리즈로 찾아왔다. 





체스트넛이 떨어지는 덴마크의 가을에 연쇄살인이  


체스트넛은 밤나무 열매이다. '노르딕 스릴러'답게 드라마는 체스트넛이 생산되는 덴마크의 깊은 가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아름다운 건축물과 역사적 명소로 유명하다는 코펜하겐, 가을이라는 계절과 스릴러의 배경이 되어 등장하면 빼곡한 건물들로 채워진 공간이 그 자체로 장르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곳에서 아이들이 체스트넛 열매로 재미삼아 만드는 인형을 남겨두는 연쇄살인이 발생한다. 대상은, 좀 더 정확히는 아이 엄마이다. 처음에는 손 하나, 다음에는 손과 발, 이런 식으로 잔인해지는 범죄, 더 이상 잔혹한 희생을 막기 위해 빨리 범인을 잡아야 하는데 ...... 



시리즈을 이끄는 건 두 명의 여성이다. 그 중 한 명은 툴린이라고 하는 이 사건을 담당하게 된 여성 수사관이다. 학교를 다니는 딸과 함께 사는 미혼모, 그녀가 바쁠 때면 멘토를 넘어 보호자같은 은퇴한 형사가 돌보지만 늘 아쉬움에 시달리는 그녀는 '강력계' 대신 디지털 범죄쪽으로 전과를 요구하는 중이다. 하지만, 팀장은 좀처럼 허락하지 않고, 그러던 중 사건이 벌어진다. 



사건을 수사해 갈 수록 대상이 극중 주인공인 툴린처럼 아이를 홀로 돌보는 미혼모라는 점, 그리고 범인은 범행을 저지르기 이전에 그녀들이 자신의 아이를 '방기'했다고 사회 복지국에 고발을 할 정도로 '엄마로서의 의무 방기'를 범행을 통해 징벌하려 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기에 보는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늘 아이와 함께 할 시간이 없어 힘들어 하는 툴린이 수사관이 아니라, 범행 대상이 되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해진다. 심지어 후반부에 가면 아이는 친구와의 갈등으로 학부모가 와야 하는 학교 모임에도 빠지는 엄마를 외면, 자신을 돌보는 할아버지 집에 가있겠다고 선언할 정도다. 범죄도 수사해야 하고, 엄마도 해야 하고, 6부작 내내 툴린의 '고전'이 그 자체로 인생의 스릴러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여주인공이 있다. 사회복지부 장관 로사 하르퉁이다. 그녀는 1년 전에 큰 딸이 유괴되어 살해된 사건의 피해자이다. 1년 동안 휴직(덴마크는 그런 사건을 겪으면 사회복지부 장관도 1년 동안 휴직이 되더라)했던 로사가 복귀하는 것으로 극이 시작된다. 사건의 피해자였던 정치인의 의연한 복귀, 수상은 그런 그녀의 불행을 정치적 이슈로 적절히 이용하고자 한다. 드라마는 정작 살인 사건과 무관해보이는 그녀 가정이 겪은 불행, 그리고 드러나는 그녀를 향한 누군가의 협박이 사건과 궁극적으로 맞물려가는 과정을 통해 스릴러의 묘미를 드러낸다. 





엄마로 살아가는 게 스릴러 


누군가 로사의 차에 'murder'이라고 크게 써놓는다. 살인자라니, 그녀는 피해자아닌가. 그런데 이 단어의 의미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사회복지의 천국이라 여겨지는 덴마크라는 국가의 명암이 드러난다. 2020년 영화 <리슨>에서도 보여지듯이 가난한 이민자 가정, 특히 한 부모 가정에 대해 복지 국가의 법은 '보호'가 아니라 감시와 징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알고보니 사회복지 차원에서 아이를 뺏긴 엄마, 그런데 정작 보호 차원에서 격리시킨 아이가 죽음에 이른다. 엄마는 이 모든 것이 그렇게 아이의 분리 정책을 밀어붙인 로사의 잘못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로사의 큰 딸도 죽인 것일까? 



드라마는 프롤로그에서 1987년의 한 사건을 보여준다. 외딴 시골의 농장, 그 농장의 소가 마음대로 돌아다닌다는 신고를 받고 간 경찰의 눈에 잔혹한 일가족 살해 현장이 목격된다. 두 부부는 물론, 그들의 두 딸이 낭자하게 살해됐고, 입양된 두 아이들 역시 겨우 목숨을 건졌는데...... 어찌보면 드라마는 프롤로그에서 보여진 그 사건의 의미를 푸는 과정이다. 과연 현실에서 보여진 사건이 그 과거의 사건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거기에는 복지 국가의 제도와 그 그림자, 그리고 그 가운데 희생되는 '아이들'이 있다. 범인은 희생자이자, 동시에 그 희생을 빌미로 자신을 '선택받은 자'로 스스로를 각인시키며 '심판자'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심판의 대상에 '엄마'가 있다. 제도의 맹점으로 인해 학대받았는데 그 억울한 화살은 '엄마'에게로 향한다. 





드라마는 다양한 엄마를 통해 '엄마'를 묻는다. 이민자로 먹고 살기 위해 아이를 돌보는 데 소홀히 했던 엄마는 아이를 뺏겨야 할까? 혹은 엄마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방기하는 엄마들은 어떻게 해야 하지? 방기와 보호의 경계는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두 주인공을 통해 오늘날 엄마의 역할을 고민한다. 



툴린은 아이를 위해 자신의 일을 덜어내고자 하려 했지만, 사건이 거듭될 수록 수사 속에 그녀 자신이 휘말린다. 그녀의 눈앞에서 사지가 짤린 채 죽어간 여성들이 지워지지 않는다. 결국 그녀를 배려하려 애쓰던 남자 친구도 욕을 하며  떠나고, 매번 약속을 지키지 않는 엄마에게 아이는 멀어진다. 이번에는 꼭 가겠다고 했던 그날, 그녀는 드디어 제목 속 그 체스트넛맨의 결정적 키를 발견한다. 아이에게 갈 것인가, 사건을 해결하려 떠날 것인가. 이 선택의 문제는 그저 툴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여성에게 던져진 질문이기도 하다. 



질문이 던져진 건 툴린만이 아니다. 사회복지부 장관으로 복귀했지만, 여전히 여진이 남은, 아니 다시 불거져나온 사라진 큰 딸 아이의 문제로 인해 장관직이 위태로워진 로사, 그 가운데 그녀 역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엄마가 될 것인가, 정치인이 될 것인가. 



아이가 자기 대신 할아버지를 택했을 때, 기꺼이 그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던 툴린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스릴러라는 장르물을 통해 개인과 그 개인이 어우러져 가는 사회, 그 딜레마를 체스트넛 맨은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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