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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톺아보기 Oct 15. 2023

인권;에 나이 제한은 없다.

- <69세> 


나이듦은 많은 것을 내려놓게 한다. '성'도 그 중에 하나이다. 지난 2002년 박진표 감독은 일흔이 넘은 노인들의 '사랑', 그 중에서도 '성'을 포함한 사랑을 <죽어도 좋아>를 통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유수한 영화제에서 초청을 받고 화제작이 되었지만 그로부터 십수년이 흐른 2020년 과연 70줄의 노인들에게 '성'적 정체성이, 그로부터 비롯된 존재의 증명이 '의미'있다고 하는데 공감할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런 의미에서 8월 20일 개봉한 <69세>는 역설적인 질문을 던진다. 

 



 

69세에 성폭행을 당하면
효정(예수정 분) 씨는 69세의 여성이다. 간병인 생활을 하다 만나게 된 동인(기주봉 분) 씨와 현재 함께 지내며 퇴직 후 그가 연 헌책방에서 일을 돕고 있다. 오십견이 오도록 홀로 일하며 지내다 늙으막에 비로소 마음이 맞는 배우자를 맞이하여 하루하루가 행복해야 할 시절, 하지만 효정 씨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무릎이 아파 찾은 병원, 휴일이라 간호조무사 밖에 없는 상황에서 효정 씨는 성폭행을 당했다. 고심을 하던 효정 씨는 그 사실을 동인 씨에게 알리고 함께 경찰서를 찾았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고통을 드러내어 '신고'하기까지도 힘들었던 시간,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효정 씨가 성폭행을 당했다는 신고를 받은 경찰들, 그 가해자가 이제 겨우 29살의 젊은 조무사라는 사실을 알고 드러낸 첫 번 째 반응은 '아니 왜' 라는 어이없는 웃음이었다. 
효정 씨가 당한 '성폭행'이 아니라, 그녀의 나이 69세가 그녀가 당한 '사건'에 장막을 친다. 당연하게도 젊은 조무사는 '합의된 관계'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결국 효정 씨가 스스로 자신의 성폭행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 하지만 '치매'가 올 수도 있는 나이 69세로 인해 그녀가 한 진술에 대해 의구심이 제기된다. 그건 경찰만이 아니다. 그녀와 함께 이제 행복하게 노년을 보내기로 마음먹은 동인  씨 역시 그녀를 믿어주겠다고 했지만 한편에서 '과연?'하는 의혹이 샘솟는다. 이렇게 주변에서 조차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자, 진술을 한 효정 씨조차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진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녀가 했던 이야기들에 그녀 스스로조차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69세의 딜레마 
영화는 효정 씨가 부딪친 딜레마를 예수정 씨의 연기를 기반으로 섬세하게 표현해 낸다. 그 딜레마의 첫 번 째는 69세, '여성'이라는 성적 정체성조차 사회적으로 공감해 주지 않는 나이에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에 '사회적 인정'의 딜레마이다. 하지만 성폭행은 일반적으로 힘이 강한 남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여성에게 가하는 '성'을 수단으로 한 '폭행'으로 가해자와 피해자에 있어 연령을 불문한다. 실제 지방을 돌며 홀로 사는 노인을 성폭행하고 금품을 갈취하는 사건, 쪽방촌에 사는 90대 할머니를 성폭행한 40대 노숙인 사건 등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여성 노인들에 대한 성폭행 사건은 비일비재하다. 

영화 속 효정 씨처럼 오십견으로 스스로 저항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강제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 성폭행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피해자가 정신적 충격, 붕괴, 나아가 자살에 이를 수 있을 만큼 대중적으로 '살인'만큼 지탄받는 범죄이다, 하지만 69세의 여성은 영화 속  심리 치료사의 말처럼 설사 동영상이 있다 하더라도 성폭행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거기에 69세라는 '노인'의 딜레마가 더해진다. 그 누구도 효정 씨의 말을 믿기 전에 '혹시?'라는 의심을 한다. 그녀가 가진 기억이 정말 '치매'가 아니고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에 대해 의혹을 가진다. 그녀와 함께 지내는 동거인조차. 당연히 그녀의 기억보다 젊은 가해자의 말이 신빙성있게 다뤄진다. 

간병인 일을 하기 위해 오래도록 수영을 한 효정 씨에게 '나이답지 않게 날씬하다'던가, 곱게 옷을 차려입고 다니니 역시나 '나이답지 않게 옷을 잘 입으신다'던가 하는 말은 우리 사회가 69세, 아니 노인 전반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가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도대체 우리 사회가 생각하는  69세다움이란 무엇인가? 영화는 묻는다. '치매끼'가 있어야 하는 건가? '성폭행'이 넌센스'인 나이인건가?

결국 69세라는 존재론적 한계로 말미암아 그녀의 진술들에 대해 법적인 판단조차 의구심을 가지고 자꾸 가해자에 대한 '구속'이 기각되자, 자신감을 잃은 효정 씨는 사라진다. 법적인 상황에서만이 아니라, 그 와중에 고발문을 만들어 자신을 도우려 했던, 어렵사리 함께 하려 했던  동인 씨의 곁에서 조차 자취를 감춘다. 이는 '성폭행'을 다루는 법적인 과정 그 자체가 나이를 불문하고 한 사람의 존재에 대한 자기  '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69세 노인의 성폭행 사건을 다룬 <69세>는 노인 인권에 대한 영화이다. 

물론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웅크렸던 효정 씨 스스로 자기 진술의 진정성을 찾아 가는 과정을 통해 늪에 빠졌던 자기 존재를 스스로 길어낸다. 그녀의 손으로 또박또박 쓴 글씨로 만들어진 고발문이 하늘을 나는 순간, 효정 씨의 존재도 더불어 빛을 얻는다. 그늘에 숨어 잊혀지는 대신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의 발자국으로 세상 밖으로 나선다. 영화는 효정 씨의 주체적인 자기 증명으로 마무리되었지만, 현실의 효정 씨들이 과연 영화 속 효정 씨처럼 스스로 자신을 증명할 방법이 있을까?

그 누구도 그녀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에서 부터 '실소'를 금치 못했을 때, 그녀가 한 진술이 혹시나 '치매'로 인한 '착각'일 지도 모른다며 의구심을 가질 때, 그 높은 벽과도 같은 여성 노인에 대한 '편견'을 넘어 자신의 억울함을 피력할 방법이 있을까? 개인의 처절한 의지가 아니라, 미성년이든, 노인이든 그 누구라도 자신의 의사에 반한 성적 가해를 당했을 때 기꺼이 손을 잡아 이끌어 줄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와 사회적인 인식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라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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