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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톺아보기 Jan 19. 2024

나의 첫 학습지, 일일공부

<옛날에 내가 읽던 책>

내 기억에 남은 첫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그 시절 내가 읽은 '글자'의 분량으로 치자면 그림책보다 '일일공부'가 더 많지 않을까.


찾아보니 지금도 '일일공부'가 있다. 여전히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와 매일매일 공부를 해야 하고, 학습지의 형태로 일일공부는 여전히 '생존'해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70년대 초 내가 했던 학습지로서의 일일공부를 찾아보니 기록이 없다. 서대문 역사 박물관에 '아이템플이 1981년부터 우편으로 학습지 배달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미 1960년대부터 '일일공부'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구체적인 기록이 불분명하다. 앞서 찾을 길 없던 <장화홍련전> 등의 그림책처럼 일일공부의 흔적도 사라져 버렸다. 



지금도 아이들 교육에 관심있는 집에 가보면 아이들 방이나 거실 한 켠이 아이들 책으로 가득차 있다. 책을 많이 읽는 것과 아이들의 학습은 비례한다고 부모들이 생각하고 있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미국의 어느 유서깊은 대학은 대학에 들어가 4년 내내 학생들이 하는 수업이 대부분 '독서'인 곳도 있단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남자라면 평생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의 서구적 버전이라 하겠다. 그렇듯이 일찌감치 그림책을 사주었던 내 어머니 역시 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일일공부'를 나에게 시켰다. 


마루, 당시만 해도 거실이라는 표현은 낯설었다. 양옥집이라 해도 마루라 했다. 방마다 연탄을 때던 시절이라, 한겨울이면 냉골이던 마루, 그곳 한 구석에 일일공부를 하던 자리가 있었다. 나름 신식으로 사들인 테이블에 마주 놓여진 의자, 일일공부를 해야 하는 당사자 나와, 그 맞은 편에서 그걸 지도하는 어머니의 자리였다. 



한겨레 21에 일일공부 사업을 한 내용을 연재한 전순예 씨의 말처럼 당시만 해도 미성년들이 신문 배달을 하는 일이 흔하던 시절, 그처럼 매일 우리집 우편함에 '일일공부'가 꽂혔다. 갱지로 된 10절지나, 12절지쯤 되는 시험지 앞 뒤로 채워진 문제, 지금이야 그까짓거 하겠지만 갓 '국민학교'를 입학할 무렵이거나, 입학한 어린 내가 매일 그 분량을 해내야 한다는 건 꽤나 고역이었던 듯하다. 처녀 시절 우리 집에 함께 살던 이제는 여든이 되신 이모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그 '일일공부'를 하며 어머니한테 야단맞던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그 시절 벌써 그림책을 사주던 어머니는 그 열성답게 나의 학습에도 교육열을 보이셨고, 그 열의를 따르지 못하던 나는 꽤나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왜 그리 그 한 장의 일일공부를 하는 시간이 길고 지리했는지, 그래도 끝자락에 몇 컷짜리 만화가 덧붙여 있어 매일 새 만화를 보는 재미로 일일공부를 기다렸다. 국민학교 1학년의 '고진감래 (苦盡甘來)였다'.


지금도 아이들이 벌써 초등학교만 가도 엄마들이 '어려워서' 혹은 '아이들이 따라오지 않아서'라며  저는 못가르치겠어요'하며 두 손 들고 아이들을 일찌감치 학원으로 보내 버리는데, 그 시절 내 어머님도 그러셨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벌써 '과외'를 했으니 말이다. 


지금이야 당장에 '밥줄'이 끊길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부업'으로 과외를 하셨다. 아니 그게 더 본업이었달까. 1968년까지는 중학교도 시험을 치르고 들어가야 했고, 화장실 갈 시간도 아끼느라 방에 요강을 넣어놓고 공부를 하고, 명문학교들이 있는 동네에 '과외방'이 성행하던 그 시절, 내가 살던 울산이라고 그 '교육열'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촌지를 드리는 게 당연하던 시절에, 꼭 공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담임 선생님께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라도 좀 형편이 되는 집들은 담임 선생님 과외를 했었다. 학교 소풍에 아버지 회사 차를 대절해 줄 정도로 '치맛바람'을 날리던 어머니가 그 대열에서 빠질리가.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 2학년이 뭘 과외까지 하면서 배울 게 있었을까 싶지만 당시는 꽤 어렵게 배웠고 못한다고 혼도 많이 났던 거 같다.


그래도 생각해 보면 '지홍'이라고, 다들 사투리를 '허벌나게' 쓰던 시절, (나 역시도 예외가 아니라, 학교에서 쓰던 사투리를 집에 가서도 쓰다 서울 사람인 엄마한테 혼나곤 했었다) 말간 얼굴에 또박또박 서울말을 쓰던 남자 아이와 함께 과외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아했던 것같다.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은 얼굴의 그 아이 이름을 잊지 않은 거 보면. 


2학년을 다니다 우리 집에 '평지풍파'가 일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 후 이 집 저 집을 왔다갔다 하다 서울 휘경동의 친할머니 댁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서울 국민학생들은 '일일공부' 대신 '수련장'을 풀고 있었다. 또 집집마다 아직 신문을 보던 시절, 어른 신문을 보면 함께 껴줘서였는지,  기사와 함께 학습 문제와 만화, 숨은 그림 찾기, 동화 등이 총망라된 '어린이 조선'이니, '어린이 동아'니 하는 신문들이 인기가 있었다. 


돌아보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상대적으로 넉넉했던 집안 형편과 열의 넘치는 어머니 덕에 그게 혜택인지도 눈 뜨기도 전에 일찌감치 사교육의 세례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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