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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톺아보기 Jan 11. 2024

내 기억에 남은 첫 그림책이 장화홍련이라니

<옛날에 내가 읽던 책>

내가 어렸을 적, 그러니까 초등학교 대신 국민학교가 있던 시절에는 요즘의 어미 '습니다' 대신, '읍니다'라고 썼었다. 받아쓰기에서 소리나는대로 '습니다'라고 쓰면 쫙 하고 틀렸다고 빗금이 쳐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0년 한글학회의 <한글맞춤법>에 맞추어 1989년부터 맞춤법이 바뀌었다.



내 어릴 적 그림책 이야기를 한다면서 왜 맞춤법 이야기부터 시작할까? 맞춤법이 바뀌었다는 건 그냥 이제부터 이렇게 쓰기로 하자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그 이전의 맞춤법으로 만들어진 모든 지적 저작물들이 이제 더는 쓸모가 없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맞춤법이 바뀐 이후, 많은 저작물들이 쓸모없는 폐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 졌던 것들은 더더욱 '무쓸모'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막상 옛날에 내가 읽던 책에 대해 써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자료를 찾으려 해보니 인터넷 상에 자료가 드물었다. 우리 사회가 재개발을 거쳐 낡은 주택들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즐비한 도심으로 거듭나듯이, 우리 사회의 문화적 성과물들도 '맞춤법 개정'이라는 재개발을 거쳐 사라져 갔던 것이다. 



그림책 공부를 하며 세계 그림책 역사에 대한 공부를 했었다. 강사님은 수십 장의 피피티를 넘기며 그림책의 시조가 되는 영국, 미국, 유럽, 러시아, 일본의 그림책을 소개해 주셨다. 각 나라들은 시조라 할 수 있는 일러스트에서부터 그림책의 단초가 되는 저작물들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맞춤법 개정과 함께 사라져간 60년대의 그림책 


그런데 막상 내가 어릴 적, 1964년에 태어난 내가 유치원을 다닐 정도의 나이에 읽었던 그림책을 찾으려니 쉽지 않았다. 1980년대 이전 어린이 책에 대한 글들은 


짤막했고, 사료들은 드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방정환 선생님이 만든 잡지 <어린이>는 있는데, 내가 봤던 60년대 그림책은 찾기 힘들었다. 마치 아파트촌 사이에서 내가 살았던 동네를 가늠해보는 처지가 되었다. 



내 기억에 남은 첫 그림책을 떠올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장화홍련전>의 선명한 붉고 푸른 그 색채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런데 찾아보니 <장화홍련전>의 출판 기록은 도무지 찾을 길이 없다. 그저 내가 봤던 기억에 가까운 느낌이다 싶은 것이 1956년 개봉한 <장화홍련전>이 아닌가 싶지만 그저 내 기억 속의 '편린'이니 증명할 길이 없다.



계모가 데리고 온 장쇠가 장화의 이불 속에 핏덩이 같은 걸 넣어 장화가 결국 짙푸른 연못 물에 몸을 던지고, 장쇠는 결국 자신의 죄 갚음으로 호랑이에게 팔, 다리가 잘리는 내용들, 지금 돌이켜 보면 매우 '고어(Gore, 잔인한 장면에 의해서 느끼는 공포 및 혐오감)한 장면들, 아마도 지금이라면 어린 아이가 보기에 적합하지 않다 하여 출판 자체가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도 장화홍련전이 있지만 매우 순화된 표현으로 그려져 있으니 말이다. 아직 발전되지 않은 인쇄와 어린이 저작물에 대한 낮은 고려가 그 시절 '극사실주의적인 고전' 장화홍련을 탄생시키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뿐이다. 




그리고 첫 그림책을 찾고자 인터넷을 뒤지다  어효선 선생이 쓰신 한문당 그림책을 만나게 되었다.  몇 십 년 만에 '국민학교' 시절 대표적 아동문학가이신 '과꽃'의 어효선 선생님 이름을 만나니 뵌 적이 없는 데도 괜히 반갑다. 



출판사 한문당에서 낸 '한문당 그림책' 씨리즈로 <용궁 이야기-토끼와 거북>(김인평 그림, 어효선 글, 1968)과 <두 가지 이야기-나무꾼과 선녀, 나그네와 호랑이>(김인평 그림, 어효선 글, 1969)는 현재 자료로서는 가장 드물게 만날 수 있는 옛이야기 그림책에 속한다. 저작자 표기도 '그림 김인평 선생, 글 어효선 선생' 이렇게 돼 있어 그림에 중심을 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인쇄도 4원색을 모두 쓴 올컬러로, 4.6배판 크기에 종이는 표지뿐 아니라 본문까지 모두 합지를 쓰면서 위아래 모서리 부분을 둥글게 처리했다. 어린이 독자를 배려한 정성스런 그림책으로 보이다.
- 그림책 박물관 


저 두 권의 그림책에 대한 기억도 떠오른다.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용왕님은 이제 생각해보면 자기 살자고 토끼 간을 탐하고, 거북이를 다그쳤던 권력자였고, 요즘 시대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보자면 나무꾼과 그를 도운 사슴은 공모자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시절의 그림책을 보면 자란 나에게는 거북이나 나무꾼은 안타깝고, 토끼는 얄미웠고, 선녀는 야속했으며, 사슴은 고맙기만 했다. 아마도 이런 그림책들을 통해 근시안적인 선악 구도와 관계 중심적인 세계관이 어린 시절부터 스며들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런 그림책에 더해 심청천, 흥부놀부전 등 그 이후로도 꽤 오래도록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책들의 목록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유치원은 못가도 그림책은 


지금도 내 또래 여성들 중 키가 작은 편이 아닌 나는 어려서부터 성장이 빠른 편이었다. 기억에 어머니가 유치원에 보내려고 데리고 갔다가 나 혼자만 너무 '멀대'(키만 크고 야물지 못한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같이 크다고 유치원을 보내주시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물론 정말 키가 커서 안보내 주신 건지, 사립 유치원비가 만만치 않아서 그런 건지는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시절 초등학교 1학년 내 짝꿍은 '식모'를 가야한다며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당시 내가 살던 울산의 신작로(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게 새로 낸 길)에는 소나 말이 끄는 마차가 삼륜차, 시발 택시와 함께 다녔다. 그런 시절이었다. 



지금이야 카드로 찍고 타지만 돈을 챙겨 내야 하는 그 시절만 해도 어머니들이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마음에 아이들이 제법 클 때까지도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며 버스비를 '패쓰'하시곤 했다. 내 어머니도 예외는 아니셨다. 그런데 문제는 '멀대'같이 큰 내가 문제였다. 이미 유치원 다닐 나이부터 버스 운전사 아저씨가 얘는 안 내냐고 했었는데, 초등학교에 가서도 어떻게든 안내려고 실랑이를 벌였으니...... 지금도 어머니가 나와 버스를 타거나, 목욕탕에 갈 때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고 하라고 다그치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런 어머니였는데도 내가 초등학교 다니기 전에, 아니면 다닐 무렵에 이미 그림책이 몇 권 집에 있었다. 유치원은 보내주시지 않았어도 그림책을 사주셨던 어머니, 덕분에 내 책의 연대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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