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BS 다큐프라임 - 예술의 쓸모, 2부, 내 일은, 예술>
길 위에 소원 팔찌 하나가 떨어져 있다. 두 사람이 나누어 끼고 있었을 팔찌였을 텐데, 그 중 하나가 길에 남겨져 있다니..... 떨어진 소원 팔찌는 정세랑 작가의 7년묵은 작은 사진 폴더 안에 살포시 담겼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이 길에 두고 가는 '아름다운 것들'에게서 이야기가 탄생된다.
<보건교사 안은영>, <피프티 피플>, <시선으로부터>의 정세랑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방식이다. 때론 시내버스를 타고 자신이 사는 곳을 멀리 벗어나 보곤 한다. 자신이 사는 곳, 그 땅 밑의 광맥을 찾듯 그렇게 이야기를 찾아나선다.
'광맥'을 찾듯 발견해낸 정세랑 작가의 이야기는 어떤 쓸모가 있을까? 작가는 자신이 하고 있는 문학이 열린 구조의 '미로'와도 같다고 말한다. 작가가 열심히 숨기고, 독자들은 그걸 찾아내려 애쓴다. 아니 때론 작가가 숨기지 않은 걸 찾기도 하고, 다른 문을 열고, 다른 보물을 찾아내기도 한단다. 그 미로를 통해 작가가 숨기고자 한 보물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 그럭저럭 다 잘 살 있다는 위로와 외롭고 힘들고 이해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작은 구원'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족두리에 꿰어진 빨주노초 구슬을 보고 눈이 확 뜨였다던 아이는 색깔이 주는 환타지 세상의 행복에 눈을 떴다. 아이는 자라 춤을 추고 만들었고, 그녀의 무대에서는 빨간 내복이 무용복이 되었다. 1988년 데뷔이래 독특하고 과감한 안무로 '재미있는 파격'을 추구해온 무용가 안은미의 예술이다.
움직임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안은미의 무대에서는 할머니들이 자신들만의 춤사위를 통해 '자유'를 만끽한다. 무엇이 사람들을 춤추게 하는가에 '천착'하던 안은미의 눈에 들어온 건 우리 엄마들의 춤이었다.
그때부터 카메라를 메고 10년 동안 전국을 돌았다. 그곳에서 만난 어머니들의 춤은 그 자체가 인문학적 자료였다. 살아온 과거가, 고통이 대하 드라마가 되어 춤사위가 되었다. 역사책이 몸에서 흘러나왔다. 그런 안은미의 시도는 2021 국제 현대 무용제의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가 되었고, <아저씨들을 위한 무책임한 댄스>, 수험생들의 <사심없는 땐스>로 구현되었다. '당신의 몸에 자유를 허하라'는 안은미의 일갈이 그녀의 작품이요, 그녀 예술의 쓸모이다.
조각가 양정욱은 입체물과 그 움직임, 소리 등으로 표현한 <당신은 옆이라고 하고 나는 왼쪽이라 말했다>, <대화의 풍경; 우리는 가끔씩 휘어지던 말을 했다>를 통해 결혼 생활이란, 대화란 서로의 반대 지점을 알게 되고, 그걸 통해 나의 것을 알게 되는 과정임을 보여주었다. 과거 쓰레기 저장소였던 공간을 유영하는 듯한 그의 작품들은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때로는 예술은 그 자체로 '수행'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1931년에 태어난 박서보 작가는 현대 미술의 거장이다. 하지만 20대부터 2009년까지도 하루 14시간씩 작품을 해왔다. 지금도 떨리는 손으로 캔버스를 만드는 작업부터 한다.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그 자체로 삶의 태도이자, 수신의 내용이다.
둘째 아이가 세살 무렵 바둑판같은 형의 국어 노트에 글자를 쓰려다 맘대로 되지 않자 '에잇'하며 연필로 마구 선을 그어버렸다고 한다. 그런 아들의 모습이 그대로 작품이 되었다. 캔버스에 유백색의 칠을 하고 그 밑칠이 마르기 전에 연필로 수없이 선을 긋는 묘법 연작 시리즈의 탄생이다.
박서보 화백에게 예술은 손재주가 아니다. 수없는 반복을 통해 자기 순화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품격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예술'이 된다. 수없는 선을 긋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자기 자신, 슬럼프는 수없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할 수 밖에 없다.
다큐의 주인공인 네 명의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와 마주하는 슬럼프를 견디면서도 예술을 '업'으로 산다. 까까머리에 색동 저고리를 받쳐입고 무대를 휘젓는 안은미 씨는 머리를 밀러 이발소에 가는데만 5년이 걸렸다고 한다. 머리를 안기르면 여자가 아니라는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 자신에게는 무겁기만 하고 필요없는 머리카락이지만 자기 안의 틀을 인정하고 깨는 게 쉽지 않았다고 한다. 삶의 본질을 내 잣대로만 보고 있지 않은 가?라는 질문이 '창작'의 첫 걸음이었다고 한다. 때로는 나만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슬럼프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펄펄 내달릴 때는 보이지 않던 자연의 이치가 비로소 눈에 들어오다고 한다.
무대 위의 화려한 자유를 꿈꾸는 안은미 씨, 단색화의 수행자 박서보 화백, 설치 미술로 첫 전시회를 연 양정욱 조각가, 쉽게 절망하지 않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정세랑 작가 네 명의 예술가들은 저마다 다른 분야에 다른 연배의 예술가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예술을 통해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다르다. 하지만, 그들이 저마다 전하는 다른 이야기는 각자의 방식대로 세상과 '공명'하며 우리가 사는 세속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