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슬로에는 스노우맨의 영혼을 치유해줄 '오은영'쌤이 없었다.
<금쪽 같은 내 새끼>는 인기 예능이다. 이른바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상담사례자로 등장한다. 하지만 정작 이 예능의 호스트 정신과 의사 오은영 쌤이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대상은 대부분 아이의 '부모'이기가 십상이다.
등장하는 아이들의 상황은 심각하다. 욕하고, 자해하고, 심지어 5년 째 구토를 하는 경우까지 자신의 분노와 아픔을 '소화'해내지 못하는 아이들은 이렇게 스스로를 괴롭힌다. 하지만 어쩌면 그래도 오은영 쌤을 만나서 '치료'를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이다 싶다.
<금쪽같은 내 새끼>가 인기있는 건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한테만이 아니다. 외려 젊은이들이 즐겨보는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다 컸는데도 새삼 육아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 어디 청년들 뿐인가. 저마다 살아가며 쉬이 넘어서지 못한 '트라우마', 그 근원에는 '부모'가 있는 경우가 많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자아를 구성하는 한 영역으로 '초자아'를 상정했다. 아이들은 성장하며 부모를 통해 세상을 배운다. 부모의 모습을 통해 도덕적 기준을 '내재화'시키고, 그 기준에 맞춰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거나, 벌을 주거나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부모가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혹은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아이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로 자리잡게 된다.
상처입은 소년, 하지만 소년을 돌보아 주는 '오은영' 쌤이 없었다. 자신의 상흔을 안은 채 성장한 소년은 '스노우맨'이 되었다. 자신의 고통을 부정한 어머니때문이었다고 생각한 어른이 된 소년은 그 '트라우마'로 '부정'한 여자들을 '살해'했다. 십수년이 넘는 동안, 물론 여자들만이 아니라, 그런 자신의 범죄에 방해되는 형사들도 '처형'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과 함께 살던 라켈의 애인 해리 홀레 형사에 의해 '처단'되기 전까지.
그런 면에서 요네스뵈의 작품이 '영화'화된 건 뒤늦은 일이다 싶다. 마이클 패스벤더가 주인공 해리 홀레로 분한 <스노우맨>이 <대니시걸>, <렛미인>의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 작품으로 '넷플릭스' 영화로 찾아왔다.
늦은 밤 돌아온 엄마, 딸은 엄마를 반기지만 아빠는 늦은 엄마를 힐난하며 집을 비운다. 돌아온 엄마는 딸에게 집 앞에 만들어 놓은 눈사람(스노우맨>을 칭찬하지만 정작 딸은 자신이 만든 게 아니란다. 그런데 보통 눈사람과 달리, 집 앞의 눈사람은 집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감시'하듯이. 그날밤 집을 휘감는 한기에 잠이 깬 딸, 엄마를 찾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엄마는 사라졌다. 해리의 동료 형사인 카트린이 냉동고 안에서 잘려진 그녀의 시체를 찾아낼 때까지.
눈사람이 자연스러운 정경의 일부가 되는 눈으로 뒤덥힌 광활한 스웨덴이라는 배경을 한껏 드러내보이며 스릴러 <스노우맨>은 시작된다. 영국, 스웨덴, 미국의 합작 영화답게 마이클 패스벤더 등 익숙한 영국 배우들과 조화를 이룬 스웨덴 배우들, 그리고 모처럼 반가운 발 킬머의 등장으로 요네스뵈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스노우맨은 '협연'된다.
주인공을 캐릭터로 앞세운 스릴러물이 그렇듯 우선은 주인공 캐릭터의 '개성'이 먼저다. 하늘 아래 셜록 홈즈나 루팡 만한 인물이 있을까 싶지만, 스릴러의 시리즈만큼이나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해리 홀레는 직업으로서 '형사'이지만, 영화 속에서도 알콜에 취해 범인에게 자신을 고스란히 노출한 채 거리에 쓰러져 잠든 모습을 보이듯이 그닥 멀쩡한 인물이 아니다. 당연히 동료는 물론, 상부의 지시 따위가 그에게 통할 리 없다. 그런데도 그가 여전히 '형사'인 이유는 귀신같이 사건을 해결하기 때문이다.
청바지가 여전히 잘 어울리는 40대 남자라는 해리 홀레, 마이클 패스벤더가 분한 외양은 가장 해리 홀레스러웠다. 하지만, 요네스뵈가 구현한 해리 홀레 시리즈의 매력을 <스노우맨>이 십분 발휘했는가에 있어서는 이견이 오간다. 원작을 보지 않은 함께 영화를 본 아들은 무난했다고 평가를 내린 반면, 원작을 본 기자의 입장에서는 어쩐지 원작의 개성이 탈색된 무난한 블록버스터급 스릴러 한 편을 본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범인인 스노우맨의 전사를 장황하게 보여주듯이, <스노우맨>은 해리 홀레와 스노우맨의 대결 구도로 진행된다. 현실적 삶에 있어서는 무기력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적인 해리와, 냉철한 범죄를 거듭하며 해리를 옥죄어오는 스노우맨과의 지적인, 심리적인 구도의 대결이 원작의 묘미이다.
하지만 영화는 스웨덴이라는 북구의 눈덥힌 풍광을 배경으로, 스노우맨이라는 엽기적 살인마가 벌이는 갖가지 살인 사건의 '전시'에 치중한 반면, 해리 홀레가 사건을 해결해 가는 과정으로서의 '스릴러'적 긴장감에는 느슨해 보인다. 외려 해리보다 자신을 던져 사건 해결에 나서던 캐트린(레베파 퍼거슨 분)이 시선을 끈다. 그러기에 그녀의 도발적이고도 무모한, 그리고도 소모적인 죽음에 분노가 앞선다.
무엇보다, 스노우맨이 이른바 자신의 트라우마를 내걸고 '정죄'하는 과정에 대한 도덕적 질문과 회의를 통해 인간적인 삶에 대한 관조가 세계관이 영화 속에서는 그저 평범한 스릴러적 결말로 대체된다. 애초에 소년의 분노는 방향이 잘못되었었다. 그는 자신과 어머니를 '폭력'적으로 대했던 '삼촌'이라던 아버지에 대해 분노했어야 했다. 하지만 '폭력적인 아버지'를 자기 정체성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눈 앞에서 죽어간 어머니로 인해 버림받은 상흔을 대체하려 했던 소년은 결국 스노우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