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그렇게 임용고시도 덜컥 붙더라. 그 어렵다는 서울을, 그것도 초수에. 바로 군대에 간 너는 남는 시간이 많다며 글공부를 시작했다고 했지. 근무 시간에 인강을 듣는다고 했었나, 자기계발비로 작법서를 샀다고 했었나. 너는 그렇게 신춘문예에도 덜컥 붙더라. 기사에서 '대한민국을 이끌 젊은 작가 10인'에 너와 네 글을 소개하는 내용을 봤어. 짧은 머리여도 너는 여전히 잘생겼더라. 전역 후, 너는 글 쓰는 게 지루해졌는지, 아니면 이미 모든 것을 통달한 건지, 글쓰기를 관두고 그림을 그린다고 했어.
그런데 꼭 그랬어야만 했니? 꼭 그런 선택을 했어야만 했니?
너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지. 분명히 아직 때가 아니었어. 생리 시작까지는 아직 일주일의 유예가 있었는데, 갑자기 내 사타구니 안쪽이 따뜻해지기 시작했어. 머릿속이 새하얘졌지. 지금은 수업 시간이었고, 여분의 생리대를 가져오지 않았거든. 이러다가는 내 긴 치마와 양말이 모두 붉게 물들 것 같았어. 수치심과 당황스러움에 수업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어.
그때였어. 내 뒷자리였던 너는 내 어깨를 톡톡 쳤지. 설마 눈치챈 건가? 짓궂은 농담을 하려는 건 아닌가? 나는 순간 너무 무서웠어. 너는 말없이 공책에 무언가를 적더니 끄트머리를 찢어서 나에게 줬어. 무슨 내용일까. 내 심장이 자꾸만 두근거렸어. 정말 과장 없이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니까.
조심스럽게 펼쳐본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어. "혹시 여분 옷 필요해?" 그 쪽지를 보고 고마움보다 놀란 감정이 먼저 들었어. 어떻게 알았지? 아니, 그보다 옷이 다 더러워질 텐데, 나한테 빌려줘도 되는 건가. 하지만 지금은 찬밥을 가릴 때가 아니었어.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너는 바람막이를 내 허리에 묶어주었어. 물론, 무릎을 다 가릴 정도로 길게 늘어뜨려서. 그 후 보건실에 가서 여분의 속옷과 생리대를 받고, 친구에게 체육복 바지를 빌렸어. 참 길었던 하루였지.
나중에 안 사실은 그 바람막이가 사실 엄청 귀한 한정판이었다는 것. 원래는 드라이클리닝인가 뭔가 따로 세탁하는 방법이 있지만,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냥 세탁기에 넣어버렸다는 것.
후에 그날 도대체 어떻게 알았냐는 나의 질문에 너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 "여자애가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얼굴이 새빨개질 만한 이유가 그거 말고 뭐가 있냐"고. "계속 보고 있었는데 당황해하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고. 자기는 누나가 있어서 남들보다 섬세하다나 뭐다나.
그 순간은 너의 허풍스러운 표정도 멋지더라.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난 널 좋아하게 되었어. 네가 수업 중에 날 계속 바라본 것처럼, 난 내 두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을 전부 너에게 할애했어.
너는 나와 참 달라. 키도 크고 잘생겼고, 성격 좋고 운동도 잘하지. 수학여행에서 우리 반 여자애들의 인기투표에서 네가 1등을 했을 때, 기쁘면서도 속상했어. 모두가 널 좋아하는구나, 넌 나 같은 애보다 수지 같은 애랑 훨씬 잘 어울릴 테니까.
공부를 해도 너는 항상 1등, 나는 하위권. 피구를 해도 너는 항상 에이스, 나는 깍두기. 세상 참 불공평하다, 그치?
너는 아이들을 참 좋아했지. 그래서 교대에 가겠다고, 꼭 멋진 선생님이 되겠다고 했어. 잘 어울려. 내가 학생이어도 나 같은 애보다는 너한테 훨씬 수업 듣고 싶을 것 같아.
근데 그거 아니? 너한테는 한 번도 말 못했지만 사실 나도 아이들 참 좋아해. 나도 교사가 하고 싶었어. 그런데 내 성격에, 내 성적에, 내 주제에 무슨 교사야. 모두에게는 도망치듯 미대에 지원한다고 했어. 미대는 수시보다 정시를 많이 본다는 핑계로 내신을 버렸지. 사실은 그냥 도망치고 싶은 건데. 미술은 경험이 중요하다는 핑계로 수업이 끝나면 홍대로 가는 공항철도에 몸을 실었어. 사실은 그냥 어디든 멀리 떠나고 싶은 건데.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던가. 결과는 너도 알잖아. 수능 망치고, 재수 망치고, 내 성적에 딱 맞지만 마음에 안 드는 대학에 들어가, 진짜 실력은 훨씬 좋지만 자칭 수능 울렁증이 있어서 이 대학에 왔다는 수많은 동기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야작을 핑계로 밤새 술을 마시며 시간을 날리다, 미래가 안 보이는 현실에 현타가 와서 반수를 준비하다, 반수보단 편입이 나은 것 같아 편입 준비를 다짐하고, 부모님께 또 염치없이 학원비를 달라 하고, 결국엔 한국은 답이 없다는 자기 합리화를 하며 유학을 못 보내주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뻔한 이야기.
예체능에서 가장 위험한 게 애매한 재능이라고? 지랄하지 마. 애초에 애매한 재능이란 게 어디 있어. 재능은 애매하지 않아, 뛰어나지. 애매한 재능이라는 건, 그냥 재능이 없는 거야. 난 공부에 재능이 없고, 미술에는 더 재능이 없어. 사실 알고 있었어. 그런데 아니라고 믿고 싶었어. 조금 더 노력하면 될 줄 알았어. 아닌 걸 알면서, 환경 탓하고, 부모님 탓하고, 현실을 탓하며 도망쳤어. 내 꼴을 좀 봐. 나이 서른에 편의점 알바나 하는 내 꼴을 좀 봐.
너는 나와 다르게 참 성격도 좋고 못하는 게 없어. 나는 그런 완벽한 너를 질투하고 시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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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네가 서 있는 곳과 멀찍이 떨어져 이 비루한 삶을 버티고 있어. 네 소식은 항상 누군가의 입을 통해, 혹은 무심코 본 뉴스 기사를 통해 내 귀에 들어왔지. 너의 전시회 소식, 네 그림이 얼마에 팔렸는지, 네가 만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너는 여전히 늘 성공적이었고, 빛났으며, 언제나 모두의 중심에 있었어. 반면 나는 그저 한쪽 구석에서 숨죽이며, 누군가의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존재일 뿐이었어.
그런데 왜 그랬어? 대체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며칠 전, 난 휴대폰 속 어둡고 짧은 한 줄의 기사를 보았어. '유명 작가이자 교사 A씨, 미성년 제자 성폭행 혐의로 피소,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 설마 했지만, 사진 속 희미한 얼굴은, 찢어버리고 싶도록 선명하게 네 모습과 겹쳐졌지. 모든 것을 가졌던 네가, 왜? 대체 왜. 나는 그 소식에 망치로 얻어맞은 듯 멍해졌었지. 내 안의 질투와 시기는 한순간에 녹아내려, 거대한 공포와 비극적인 이해로 변했어. 마음속에 피어나는 수많은 질문들은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못하고,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무거운 침묵만 한참을 게워냈어.
내가 사랑했고, 질투했으며, 그토록 완벽하다고 믿었던 네가 한순간에 사회적으로 매장되고, 윤리적으로 가장 추락한 존재가 되었지. 인터뷰에 나온 동료 교사들은 "글 쓰는 걸 핑계로 수업을 자주 빼먹고, 학생들 관리에 소홀했다", "오래전부터 아이들에게 비정상적인 친분을 보였다"는 등 비난을 쏟아냈어. 기사 속에서 너는 학생과 서로 '사랑'했다고 주장하더라? 그런데 어쩌라고, 그게 뭐가 중요하니.
내가 평생을 바쳐 동경하고 질투했던 '너'의 실체가, 이토록 추악하고 더럽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어. 혀끝에서 쓴맛이 맴돌고, 위장 깊은 곳에서부터 모든 것을 토해내고 싶은 역겨움이 치밀었지. 그 선한 눈빛, 섬세한 배려, 빛나는 재능. 그 모든 것이 가려진 가면이었고, 그 뒤에 숨겨진 진실은 끔찍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어. 네가 그 어린 학생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을 때, 나는 네 그림자 안에서 나를 비난하고 있었어. 네가 그 더러운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나는 재능 없는 나를 자조하며 눈물 흘렸다고.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어. 동시에 기이한 해방감이 내 안을 파고들었어. 그토록 나를 몰아붙였던 기준이 애초에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지. 내가 도망친 것은 과연 비겁한 선택이었을까. 어쩌면 그 완벽한 가면 뒤에서 자신마저 속이며 살아야 했던 너보다, 훨씬 솔직하고 깨끗한 삶을 살고 있진 않았을까. 나의 '애매한 재능'은 적어도 타인의 삶을 짓밟지 않았고, 나의 초라함은 최소한 타인의 순수함을 더럽히지는 않았어.
그 지독한 역겨움과 해방감 속에서 나는 비틀거리며 편의점 유니폼을 벗어 던졌어. 더 이상 네 그림자는 내 목을 조르지 않았지. 스물, 스물다섯, 서른. 나이를 먹는 내내 나를 짓눌렀던 완벽의 기준이 얼마나 텅 비고 더러웠는지 알게 되었을 뿐이야. 네가 가진 그 모든 '완벽함'은 결국 한 꺼풀의 위장이었고, 나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과 싸우느라 내 삶을 스스로 고통 속에 던져 넣었지.
창밖을 보니 새벽 동이 트고 있었어. 늘 해가 떠오르면 시작되는 비루한 하루가 두려웠지만, 이제는 더 이상 '너처럼 되지 못한 나'를 비난할 이유가 없어졌어. 나의 애매한 재능이 네 더러운 성공보다 훨씬 더 진실하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알았으니까. 이 진실 앞에서 나는 나 자신을 더는 미워하지 않기로 했어. 네가 보여준 추악한 끝은, 나의 부끄럽고 비루한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것이었는지를 가르쳐 줬으니까. 그리고 나는 이제 고개를 들고, 엉망진창인 내 하루를 다시 시작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