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이란 말이야

by 이십삼

오늘은 참 신나는 날이다. 오래된 친구의 결혼식 날이기 때문이다. 그녀를 축하해 줄 생각에 잠이 오지 않는다.

본능이란 말이야 다 그런 거야. 갓난아이를 물에 집어넣으면 숨을 참는 것.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았지만, 당연히 행하는 것. 오래된 유전자 속에 이미 각인된 것. 나만이 아닌, 모두가 응당 따를 수밖에 없는 것. 그래, 본능이란 게 원래 그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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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기억나니. 왜 나를 괴롭히냐는 물음에 네가 던진 말.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냐고, 그게 본능이자 이치이며,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그래, 너는 사자처럼 주변의 먹잇감을 찾아 두리번거렸고, 나는 토끼마냥 무서운 포식자가 있나 눈치를 살폈지. 그래서 사냥놀이는 좀 재밌었어? 아이들이 네 시야를 피해 숨고 벌벌 떠는 모습을 보며, 너는 본능적으로 행복감을 느꼈니?

그때 기억나니. 점심시간, 학교 뒤 소각장으로 날 부르던 날. 쭈뼛거리며 기다리고 있는 나를 보자마자 넌 쌍욕을 퍼부었지. 내가 걸레라나 창녀라나. 네 옆에는 3학년 오빠들과 언니들이 팔짱을 낀 채 비웃고 있었어. 날 넘어뜨려 윗옷을 벗기고, 브라끈을 풀어 헤치며 수치스럽게 만들었지. 그때 네가 뭐라고 했더라. 나 같은 창녀에겐 이 꼴이 더 어울린다고 했었나. 셀 수 없이 터지던 핸드폰 플래시 세례를 피해 고개를 처박던 나를, 아직 잊지 않았지?

그때 기억나니. 체육 시간에 네가 내 손목을 보던 날. 옅게 패인 자국을 가리키며 네 친구들을 불러 모았지. 너는 그 흔적을 마치 네 작품이라도 되는 양 자랑스럽게 만지며, ‘내가 새겨준 문신’이라고 자랑했어. 꼴값 떨지 말고 조용히 자살하라던 너는, 이미 차갑게 식은 내 손목에 틴트를 부으며 깔깔대며 웃었지. 너희를 피해 화장실로 도망치자, 내가 숨은 칸 위로 걸레 빤 물을 냅다 부어버린걸, 아직 잊지 않았지?

그때 기억나니. 내 열여덟 번째 생일날. 넌 생일을 축하해 준다며 단체 채팅방을 만들었어. 곧 그곳을 가득 채운 욕설과 조롱, 그리고 치욕스러운 사진들. 나는 도망치듯 채팅방을 나왔어. 손발은 덜덜 떨렸고 두 눈에선 뜨거운 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지. 근데 그게 끝이 아니더라. 너는 노비를 추노하는 노비 꾼처럼 나를 무한한 채팅방에 가두었고, 나는 그 공간을 영원히 떠날 수 없었어. 그때 너희가 내게 준 생일 선물은 모두 잘 받았어. ‘너 같은 애가 태어났을 때도 부모님이 미역국을 먹었냐’부터, ‘생일 기념으로 목매달고 죽으라.’라는 말까지. 그 선물들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어. 버리고 싶은데, 찢어발겨 태워버리고 싶은데, 도저히 그게 안 되더라.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었어.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갔지. 그런데 그 인간이 뭐라고 한 줄 알아? “너는 노력해 볼 생각은 했니?” 그 말을 듣고 이해가 가더라. 자기 수업 시간에 날 괴롭히는 걸 봤으면서도 왜 모른 척하고 교무실에 갔을까. 당신 앞에서 내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걸 봤으면서도 왜 허겁지겁 전화받는 척을 했을까. 노력은 했냐고? 내가 안 했을 것 같아? 나를 죽일 듯 증오하는 사람에게 웃으며 초콜릿을 나눠주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알아? 내가 죽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생일 선물을 주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아냐고. 당신이 말한 노력은 그저 비겁하고 무능한 어른의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날 알게 되었어. 그렇게 늦게 안 내가 병신이지.

그 후로도 나는 열심히 노력했어. 어제의 악몽이 채 가시지 않아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오늘도 제발 무사히 지나가기를’ 주문처럼 외며 이불을 걷어내는 것. 찢어진 교복을 몰래 꿰매고, 멍든 자국을 가리려 화장품을 덧바르는 것. 네 눈을 피해 화장실 가장 안쪽 칸에서 도시락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 그게 나에겐 온몸의 근육을 뒤틀어야만 겨우 해낼 수 있는 처절한 노력이었어.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이딴 노력이 무슨 도움이 될까. 차라리 그냥 세상에서 사라지기 위한 노력을 하자.

지금도 기억나. 그날 교무실을 떠나는 내 발걸음은 솜털처럼 가벼웠어. 더 이상 누구에게도 기대할 것이 없었으니까. 아무도 나를 구해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은지야 네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어. 너를 위해 준비한 선물, 기대해. 나 정말 노력 많이 했어.

먼저 너의 SNS 계정에 들어갔어. 네 계정은 남편과 행복한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더라. 한 게시글에는 아기를 위한 작은 양말과 편지가 보였어. "우리 사랑하는 꼬물이 8개월 뒤에 보자. 엄마가 영원히 사랑해." 아… 네 뱃속에는 작은 생명이 있구나. 누군가의 생명을 짓밟아버리면서, 정작 너는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냈구나.

태그된 남편의 계정으로 들어가 메시지를 보냈어. 네 추악한 과거부터, 나에게 했던 말까지. 메시지를 읽은 남편은 며칠째 답이 없더라.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불안과 함께 묘한 쾌감을 느꼈어. 아마 고민했겠지. 곧 이게 무슨 일인지 너와 이야기를 나눴겠지. 너는 당연히 변명했을 거야. 가짜 계정이라고 무시하라 했을까,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를 뗐을까. 하지만 남편도 뭔가 이상함을 느낄 거야. 거짓이라기엔 너무 구체적이고, 진실이라기엔 도무지 말이 안 될 테니. 너는 얼마나 속에서 열불이 날까. 네 일그러진 얼굴이 그려진다, 은지야.

십 년 동안 조용했으면 이미 다 잊은 거 아니냐고, 학생 때 한 ‘사소한’ 잘못에 비해 너무 큰 복수 아니냐고, 왜 이렇게까지 날 괴롭히냐고 넌 생각하겠지. 정신 차려 은지야.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나 말이야, 네가 했던 짓들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적어놓았어. 내가 음침하다고? 어쩌겠니, 난 원래 이런 사람인걸. 그래서 네가 날 유난히 싫어했잖아. 내 눈깔이 이상하다고, 쳐다보는 게 음침하다고.

SNS에 다 올렸어. 우리의 일들 말이야. 사람들의 관심이 대단하더라.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너와 네 남편의 신상, 심지어 네 부모님까지 사람들은 찾아내더라. 그들은 나보다 더 분노한 것 같아. 마치 자신의 가족이 그런 일을 당한 양. 한 나흘 지났나. 네 남편에게 메시지가 왔어. 내용을 보니 네가 쓴 것 같더라. 그때 네가 한 잘못들을 사과하며 용서를 빌었다지. 한 번만 봐달라며 눈물을 흘렸다지. 평생 쥐 죽은 듯이 살겠다, 어렸을 때 철없이 한 행동이었다, SNS의 올린 글 제발 내려달라며 애원했다지. 정신 차려, 은지야. 이 정도로 끝낼 거면 시작도 안 했어. 왜 이제라도 울면서 사과하면 내가 "그래, 은지야… 너도 속으론 많이 힘들었겠구나…"라며 용서해 줄 줄 알았어?

내가 SNS에 글을 올린 이유는 무슨 대단한 정의감 따위를 위해서가 아니야. 단지 널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어. 널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 거야. 너뿐만 아니라, 네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 불행했으면 좋겠어.

다 죽었으면 좋겠어.

너도,

네 남편도,

네 뱃속의 아기도,

그리고,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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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지야 네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한 번도 신지 않은 작은 양말과 함께.

통쾌함과 동시에 가슴 깊이 비틀리는 통증이 느껴졌어. 잠시,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을거야. ‘아이는 무슨 죄일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당연한 복수일까, 아니면 또 다른 폭력일 뿐일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을 못 내리겠더라.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알았어.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것, 복수는 내 존재 이유가 돼버렸다는 것.

기사에선 너에 대한 이러저러한 말들이 많이 나와. 나 역시도 그 가십에서 빠질 수 없었지. 사람들은 이제 나를 욕하더라. 너무 과한 거 아니냐고, 가정이 생긴 사람을 용서해 줄 순 없냐고. 참 웃기지? 네가 있을 땐 널 죽일 듯이 욕하던 사람들이, 막상 네가 사라지니 나에게 화살을 돌리는 게. 사실 사람들은 그냥 뭔가를 증오하고 싶은 게 아닐까? 그게 누구든, 어떤 잘못을 하든.

근데 있잖아. 네 가정은 파탄 났고, 너는 사라졌고, 내 목표는 모두 이뤘는데, 왜 웃음이 나지 않을까. 후련해야 하는데, 행복해야 하는데 왜 나는 울고 있을까. 네가 불행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아니, 네가 죽길 바랐어.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됐는데 왜 내 마음은 자꾸만 욱신거릴까.

어쩌면 본능은 사냥하는 쪽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은 쪽에 각인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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