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권이 윷놀이 상품으로 걸렸다. 구정을 맞아 주유소에서 일하는 한국인 직원들과 모여 윷놀이를 하는데, 남편이 복권을 상품으로 건 거였다.
주유소에서 복권을 팔기만 했지, 난 한 번도 복권을 사본 적이 없었다. 그 정도로 딱히 복권에 대한 욕심은 없었지만, 그래도 기왕에 하는 윷놀이 열심히 해보지 싶었다.
열성껏 윷을 던진 결과 결국 몇 장의 복권이 내 손에 들어왔고, 난 그걸 받자마자 긁어봤다. 그런데 당첨 방법이 너무 복잡해 얼마가 됐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보통 주유소에서는 손님이 복권을 가져오면 스캔으로 찍어 얼마가 됐는지 확인한다고 했다. 당장 옆에 스캔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직원에게 물어물어 분석해 본 결과 15불이라는 당첨 금액이 나왔다.
너무 신이 난 나는 복권을 쳐들고 남편을 향해 외쳤다. "나 15불 됐어!"
그러자 남편이 콧방귀를 끼며, "내일 스캔해 봐서, 만약에 네가 15불이 됐으면 내가 20불 얹어준다."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왜 내 말을 안 믿냐고 강력히 항의하는 내게 그때 남편이 던진 한마디, "넌 낙타 세 마리잖아~!"
난 그 말과 함께 바로 꼬리를 내리며 찌그러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낙타 세 마리에 얽힌 나의 복권 이야기는 이러했다.
옛날 한국에는 주택복권이라는 게 있었다. TV를 통해 방영되는 복권 추첨은 돌아가는 숫자판을 화살로 쏘아 나온 여러 개의 숫자가 정확히 일치하면 당첨되는 방식이었다. 복권이라고 하면 정말 그것밖에 모르고 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즉석 복권이라고 하는, 긁는 복권이 새로 등장했다. 하지만 그런 게 나왔다고 말만 들었지, 한 번도 사본 적이 없었기에 난 그게 어떻게 당첨되는지는 전혀 몰랐었다.
여하튼 그때가 서울대학병원에서 한참 간호사로 일할 때였다.
아침 7시에 출근해 평소처럼 근무하는데, 내게 환자 인계를 해주고 방금 퇴근했던 나이트 간호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은 내가 "안 자고 왜 전화야?"라고 묻자마자, 나이트 간호사인 A가 무척 흥분한 목소리로 내게 외치듯 내뱉었다.
"박 쌤~! 나 복권 당첨됐어~!"
"뭐? 진짜? 무슨 복권?"
"그 긁는 즉석 복권 있지. 내가 방금 그걸 긁었거든. 근데 이게 그림이 똑같은 게 세 개 나오면 당첨인데, 낙타가 세 마리 나왔어~."
날아가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A가 지금 방방 뛰고 있다는 걸 난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정확해?"
내가 되묻자, 제발 자기 좀 믿어달라는 식으로 그녀가 거의 울부짖듯 내게 외쳤다.
"그래~. 낙타가 세 마리 나왔다니까~."
그녀의 외침으로 봐선 복권 당첨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난 이럴수록 더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에 호흡을 가다듬으며 A에게 다시 물었다.
"낙타가 세 마리 나왔어도, 이게 암컷과 수컷으로 살짝 다를 수 있거든. 그러니까 정확히 다시 한번 봐봐."
내 말에 한참을 살펴보던 A가 여전히 흥분한 목소리로 다시 외쳤다.
"암컷인지 수컷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아무리 봐도 그림이 똑같아."
"그래? 그러면 이건 당첨이 확실한데. 근데 낙타 세 마리면 돈을 얼마나 주는 거야?"
"나도 그걸 모르겠어. 그래서 전화했어. 낙타 세 마리면 일억일까? 삼억일까?"
"거기에 안 쓰여 있어?"
"몰라. 안 쓰여 있어. 박 쌤! 나 일억 만 당첨돼도 당장 병원 그만둘 거야. 나 어떡해. 어떡해~!"
정확히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이미 그녀는 그 당첨된 복권 금액을 타고 저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얼마인지 그것부터 알아야 하니까, 일단 침착하고.복권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봐."
내 말에 A가 곧바로 복권을 다시 한번 확인하더니 말했다.
"여기에 주택은행 전화번호가 있는 거로 봐서는, 낙타가 얼마인지는 은행에 전화를 해봐야 알 거 같아."
"오케이! 그러면 빨리 은행에 전화해 봐!"
빨리 전화하라는 나의 재촉에, A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직 은행 문 안 열었어. 그리고 나 지금 너무 떨려서 전화 못 할 것 같은데, 나 대신 전화 좀 해줄 수 있어?"
"알았어. 그러면 내가 해줄 테니까, 빨리 병원으로 다시 와."
"알았어. 금방 갈게."
복권에 당첨됐기에 택시비 정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통화를 끝낸 A 간호사가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총알처럼 날아왔다.
분만장 문을 열고 뛰어 들어오는 A 간호사의 얼굴은 흥분에 겨운 나머지 그 붉기가 거의 붉은 사과에 가까웠다. 즉석 복권을 손에 꽉 쥔 채로 내게 달려온 그녀가 날 끌어안더니, 방방 뛰며 분만장이 떠나가도록 외쳤다.
"박 쌤! 나 복권 당첨. 복권 당첨이야. 어떡해~. 나 어떡해~?"
방방 울려 퍼지는 그 소리에 신생아실 간호사가 뛰어왔고, 당직 의사도 당직실 문을 열며 뛰어나왔다.
그렇게 A 간호사가 복권에 당첨됐다는 소식은 전화를 타고 순식간에 일파만파 병원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식에 병동에서까지 A를 축하하러 달려온 간호사들로 분만장은 거의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총대를 메기로 했던 난 그 중심에 서서 A 간호사의 손에 들린 복권을 뺏어 들고, 침착하게 낙타 세 마리를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낙타가 수컷인지 암컷인지 확인하기 위해 예리한 눈으로 뭔가 달린 건 없는지 낙타의 배 밑을 몇 번이고 훑어봤지만, A의 말처럼 점하나 틀리지 않았다.
"이건 정확히 당첨이야!"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A 간호사를 둘러싼 모두가 손뼉을 치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인제 병원 그만두니까 쌤은 너무 좋겠다."
"병원 그만두면 뭐 할 거예요?"
모두가 부러움에 찬 목소리로 A에게 질문을 던지는 가운데, 그 흥분을 가라앉히느라 난 손을 번쩍 쳐들며 모두에게 외쳤다.
"조용! 조용! 지금 은행에 전화해 봐야 하니까, 다들 조용!"
나의 외침에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전화기 옆으로 모여들었다. 환자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도 침착함을 유지해야 하는 게 간호사였다. 직업이 간호사인 만큼 나는 그 침착함을 십분 발휘해 차분한 손길로 주택은행 전화번호를 눌렀다.
은행 직원이 전화를 받자마자, 침착하자는 내 마음과는 달리 나의 입에서 따발총처럼 튀어나온 말은,
"여기 낙타가 세 마리 나왔는데요. 이거 얼마예요?"
"네?"
"제 친구가 지금 복권에 당첨이 됐거든요."
"네."
"지금 낙타가 세 마리 나왔는데, 암컷인지 수컷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절대 그림이 다르진 않거든요."
"그런데요?"
"이 낙타 세 마리는 얼마예요?"
"거기 나와 있을 거 아녜요?"
"어디요? 없는데요?"
"옆에 긁어보면 얼마라고 나올 거 아녜요~."
답답해 죽겠다는 듯한 은행 직원의 대답에, 순간 싸늘한 느낌이 내 등골을 스쳤고, 숨죽인 채 내 주위를 둘러싸고 당첨금액만 기다리던 모두가 뻥 한 눈으로 서로의 눈을 쳐다봤다.
"네. 알겠습니다." 말하며 수화기를 내려놓는 내 앞에 달라고 말하기도 전에 누군가 동전을 얼른 내려놨다.
난 그 동전으로 낙타 세 마리 옆을 긁기 시작했다.
오..백..원이 나왔다.
그 뒤는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두 상상이 갈 것이다.
너무 큰 절망감에 여전히 얼굴이 사과처럼 벌게져 있는 A 간호사를 분만장 문 앞까지 배웅하며 내가 말했다.
"오늘 밤에 다시 근무 나와야 하니까 빨리 가서 자. 갈 때 버스 타고 가고. 오백원이라 택시비도 안 빠져."
다른 일반 간호사들보다 조산사 면허증까지 있었던 난 거기서 일 하나는 그래도 딱 부러지게 하는 간호사였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 단지 그날 복권 당첨 바람잡이를 했다는 이유로 나는 '분만장 띨빵 간호사 1호'로 등극했다.
그러고 며칠이 지났을까?
몇 명의 간호사들과 모여 내가 환자 인계를 하고 있는데, 한 닥터가 나를 보더니 갑자기 내게로 직진해 걸어왔다.
그 닥터가 간호사들을 뚫고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는 내 앞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살짝 몸을 숙여 무슨 비밀이라도 말하듯 아주 은밀하게 내게 말했다.
"박 간호사! 이거 가지고 주택은행에 가면 차 두 대하고 낙타 한 마리 준다니까, 내가 이거 줄 테니까 가서 받아와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가 내 손에 즉석 복권을 꽉 쥐여주고는 돌아섰다. 그렇게 돌아서 멀어져가는 그의 등짝이 흔들리는 거로 보아, 얼굴을 안 봐도 그가 키득거리고 있음을 난 알 수 있었다.
그가 내 손에 쥐어주고 간 자동차 두 대와 낙타 한 마리가 나온 이미 긁은 즉석 복권을 보며, 옆에 있는 간호사들 또한 웃음을 참느라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표정으로 그 꽝이 난 즉석 복권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떨구며 중얼댔다.
"제기랄! 계~속 놀리게 생겼구만. 망했다!"
그 뒤로도 내 주위 사람들은 그 이야기만 나오면 배를 쥐고 꼬꾸라졌다.
그렇게 그날의 복권은 돈벼락이 아니라, 내게 웃음벼락을 안겨주었다.
주유소를 하다 보면 정말 많은 사람이 와서 복권을 산다.
당장 돌아가실 것 같은 노인들도 매일 와서 사가신다. 코에 산소를 꽂고, 지팡이에 의지해 다리를 절며, 반신불수의 몸으로도 힘겹게 오셔서 꼬박꼬박 복권을 사가신다.
위태로워 보이는 그분들에게 복권을 팔 때마다, 우린 복권을 손에 쥐고 나가는 그분들 뒤에서 기도한다.
"제발 저 복권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 되면 저분 그 자리에서 바로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부디 저 분을 살려주세요! 그래도 꼭 뭔가 주고 싶으시거든 쓰지도 못할 돈벼락 말고, 저에게 주셨던 것처럼 웃음벼락이나 내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