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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가고

유럽축구여행_4 London

by 이대로

Stamford Bridge


"실전은 기세야".라는 기생충의 대사로도 많이 익숙해진 '기세'는 어떤 일을 해나감에 있어서의 좋은 흐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 이것이 지닌 큰 힘을 실감할 때가 수차례 있을 것이다. 무언가 될 것 같은 자신감이 괜스레 생길 때면 정말 무얼 하든 되고, 또 하나가 되면 곧 둘도 되곤 하는 그런 경우 말이다. 축구에서도 '기세'는 중요하다. 꼭 이겨야만 하는 경기에서 전력상 한 수 아래의 팀을 상대하더라도 일단 하나라도 안 풀리기 시작하면 평소보다 맥없이 무너지는 경우도 많고, 또 엄청난 분위기로 몰아치다가도 PK 등 결정적인 찬스를 놓치면 얼마 안 가 되려 실점까지 내주기도 한다. 기계가 아닌 사람이 하기 때문에, 축구를 포함한 모든 스포츠에서 흐름은 정말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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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축구계에서 가장 좋았던 기세를 보여준 경우 중 하나는 2011-12 시즌의 첼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챔피언스 리그'의 첼시. 지금이야 어느덧 2회나 우승했지만, 당시 첼시는 지금의 맨시티처럼 분명 유럽 최정상의 전력을 지녀왔음에도 챔피언스리그 에서만큼은 우승운이 따라주지 않던 팀이었다. 게다가 (논란의 여지야 있을 수 있겠지만) 첼시의 입장에선 굉장히 불운하게 문턱에서 좌절한 적이 많았기에(루이스 가르시아의 유령골 사건, 모스크바에서의 대단한 선택, 오브레보 논란 등), 챔피언스리그에 있어서만큼은 첼시의 기세가 영 좋지 않다고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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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2011-12 시즌은 이전 시즌과 달리 애초에 우승 후보로도 여겨지지 않았다. 존테리, 램파드, 드로그바, 체흐 등 첼시를 지탱하던 코어 라인의 선수들이 점차 노쇠화되기 시작했고, 토레스, 칼루, 미켈 등 전성기 나이의 선수들은 기대치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했다. 이에 더해 제2의 무리뉴가 될 것이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안드레 빌라스 보아스 감독이 팀 장악에 실패하며 경질되기에 이르렀다. 단연코 로만 인수 이후 가장 약했던 첼시였다. 이후 수석코치였던 로베르토 디마테오가 임시감독직을 맡게 되었으나 빅클럽 지도 경험이 전무했던 그에게 기대를 걸었던 사람은 아마 그의 가족 정도가 전부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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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놀랍게도 모두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이 시즌은 구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시즌이 되었다. 첼시는 나폴리에게 역전승, 역대 최강이라 불리던 바르셀로나에게도 승리를 거두며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드라마의 대미는 결승전이었다. 레알 마드리드를 이기고 올라온 바이에른 뮌헨과 그들의 홈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맞붙게 된 첼시. 경기 내내 바이에른 뮌헨의 공세를 정말 힘겹게 막아내던 첼시였으나 경기 종료를 10여분 남겨두고 선제실점을 허용한다. 경기 내내 이렇다 할 찬스가 없던 첼시였기에 득점은 정말 불가능해 보였으나 그날 새벽 나는 왜인지 첼시가 질 것 같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골이 터졌다. 실망스러웠던 시즌 막판 영웅적 면모를 연이어 보여주던 드로그바가 그의 선수 커리어, 그리고 첼시 구단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골을 터뜨렸다. 그제야 나는 확신했다. 첼시의 기세는 우승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후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승부차기 끝에 첼시가 정말 승리를 거두었다. 그토록 강했던 첼시가 절대 얻지 못할 것처럼 보였던 빅이어는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초라했던 첼시가 쟁취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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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탬퍼드 브릿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지소연 선수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경기 관람에는 실패했지만, 굳이 런던의 많은 구단 중 첼시의 구단 투어를 신청했던 것도 이 시즌에 대한 기억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2012년의 그 팀은 축구를 넘어 정말 안 될 일은 없음을, 기세라는 것의 힘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거대함을 알게 해 주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과 기억을 다시 한번 생생히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게만 해주더라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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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의 홈구장 스탬퍼드 브리지는 도시 외곽에 자리 잡은 대부분 축구 경기장과 달리 중심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실제로 가까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다 보면 도대체 어디에 축구장이 있을까 싶은 거리를 걷던 중 갑자기 튀어나온다. 또한, 구단 명은 첼시이지만 스탬퍼드 브리지는 첼시가 아닌 풀럼에 위치해 있다. 서울 월드컵경기장이 사실 상암동이 아닌 성산동에 있는 것처럼. 그리고 한 가지 더 놀라운 점은 프리미어리그를 즐겨 보는 팬들이라면 아시겠지만 구단의 규모에 비해 경기장의 크기는 물론 시설도 생각보단 좋지 않다. 같은 런던팀인 토트넘과 아스날이 새로운 구장을 건설하며 유럽에서도 손에 꼽히는 시설을 갖추었기에 런던에서 이 구단들의 구장들을 모두 방문해 본다면 더더욱 초라해 보일 것이다.(물론 첼시가 돈은 제일 많다.) 이 문제는 첼시가 위치한 풀럼지역이 런던에서도 가장 땅값이 비싼 지역이기도 하고, 구단 증축 혹은 재건 등과 관련하여 여러 어려움이 맞물려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두 구단 간의 규모차를 물론 감안해야겠지만, 같은 풀럼 지역에 위치한 풀럼 FC의 홈구장 크레이븐 코티지를 먼저 방문한 후 스탬퍼드 브리지를 방문한다면 스탬퍼드 브리지의 세련미와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스탬퍼드 브리지에 큰 기대를 가진 분들이라면 이 방식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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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는 대략 20-30여 명 정도의 인원이 한 시간여 동안 구장 내부 곳곳을 가이드의 설명과 함께 누비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워낙 세계 각국에서 관람객이 와서인지 가이드의 영어는 그리 어렵지 않고 명쾌하게 들리는 편이다. 또한 중간중간 농담도 섞어 주시기에 좋은 분위기 속에 관람이 진행되었다. 투어 중에는 선수들과 스태프들이 실제 앉는 벤치와 그라운드, 라커룸과 기자회견실 등을 직접 가볼 수 있고 각 구역마다 사진 찍을 시간도 넉넉히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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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투어는 구단 스토어에서 끝을 맺는다. 즉, 한 시간 동안 구단을 향한 애정을 깊이 심은 다음 스토어에서 그 애정을 돈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세심히 코스를 마련한 셈이다. 참고로 이 방식은 누가 발명했는지는 몰라도 특허를 냈다면 떼돈을 벌었을 텐데, 구장 투어를 진행하는 유럽 내 모든 구단이 투어의 마지막을 스토어 방문으로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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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석 화면에는 우연히도 램파드가 나오고 있었다. 이로부터 약 8달 후, 램파드는 해당 시즌 첼시의 세번째 감독으로 부임한다. / 스토어에 비치된 유니폼들


이에 더해서 첼시는 뮤지엄 티켓 역시 함께 판매하고 있다. 나는 투어가 끝난 후 뮤지엄 방문을 했고, 뮤지엄 역시 상당히 흥미로웠다. 첼시 뮤지엄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건은 역시나 첫 챔스 우승이었던 2011-12 시즌이었다. 심지어 뮤지엄에 들어서면 당시 결승전 승부차기 상대 골키퍼였던 노이어의 사진을 벽에 붙여 놓고 페널티킥을 차 볼 수 있게 하는 코너도 마련되어 있다. 런던 어딘가에서 자신의 사진을 향해 하루에도 수백 번씩 사람들이 공을 차고 있다는 사실을 노이어 본인도 잘 알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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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어 챌린지/ 2011-12 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 선발 선수들의 유니폼 / 꽤나 최근의 일이던 2020-21 시즌의 우승 역시도 한켠에 마련되어 있다.


모든 축구 구단 뮤지엄의 꽃은 트로피룸이다. 엄청난 기세로 트로피를 수집해 온 첼시의 트로피룸은 공간이 크진 않았지만 빈틈없이 채워 놓은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2개의 빅이어와 5개의 프리미어리그 트로피. 개인적으로는 빅이어보다도 푸른색 끈을 늘어뜨려 놓은, 다닥다닥 배치된 5개의 프리미어 리그 트로피가 더 위용 있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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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뮤지엄 관람까지 마친 후 경기장을 나서려는데, 경기장 입구 쪽에 팬들이 웅성웅성 몰려 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보니 선수들이 올 수도 있다고 한다. 지난 맨시티 홈경기 관람 당시 괜히 사람들이 기다리길래 같이 기다렸다가 선수 코빼기도 못 본 체 귀가했던 기억이 있어 그냥 갈 생각이었는데, 점점 사람들이 많아지고, 안전 요원으로 보이는 스태프들이 여럿 와서 펜스를 치기까지 하는 걸 보니 이 현장의 기세가 선수들을 부르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렇게 속는 셈 치고 한 번 기다려보자며, 삼십여분을 기다렸을까. 중형차량 한 대가 들어온다. 캉테가 미니쿠페를 타고 다닌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했기에 생각보다 비싸 보이진 않는 차였지만 모두들 누가 내리나 궁금해했다. 곧 창문이 열렸는데, 인상 좋은 노부부가 선수가 아니라 미안하다는 듯 인상 좋은 웃음과 함께 손을 들어 보이며 지나갔다. 바로 옆 건물에 호텔이 있어서였는지 일반인 차량도 들어오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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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투헬 / 티아고 실바 / 코너 갤러거


그다음 차량은 굉장히 작은, 대략 두 명 정도 탈법한 전기차였다. 누가 봐도 일반인이라 생각했던 그 차에는 놀랍게도 192cm의 거구 토마스 투헬 당시 첼시 감독이 굉장히 불편해 보이는 자세로 타고 있었다! 투헬 감독은 창을 내려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이후에는 선수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일단 차량에 타고 있으면 보기 힘들었는데, 저 멀리에서 내려 걸어가는 모습은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인기가 많았던 선수는 마운트, 하베르츠, 스털링 등이었다. 하베르츠는 여성팬들에게 상상 이상으로 사랑받고 있었다. 그리고 전혀 몰랐는데 스털링의 인기가 상상 이상이었다. 빅네임 이적생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한국에서와 달리 잉글랜드 내에서는 스털링의 인기가 워낙 좋다고들 한다. 반면 가장 환영받지 못했던 선수는 케파였다. 내 옆에 있던 엄청난 리액션으로 선수들을 반겨주던 소녀는 케파에겐 관심을 전혀 보이지 않자 물어보니 '싫다'는 표현까지 할 정도였다. 실제로 팬들은 케파에게 놀라울 정도로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었고 교체거부 논란 등의 사건도 있었기에 팬들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같은 사람으로서 축구선수라는 직업이 심적으로도 전혀 쉽지 않은 직업임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여기서도 이 정도면 경기장 안에서는 오죽하겠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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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기가 많던 선수들. 심지어 나도 케파 사진은 스킵했다... 라힘 스털링 / 메이슨 마운트, 벤 칠웰, 로프터스 치크 / 카이 하베르츠


스탬퍼드 브리지 투어는 이렇게 생각지 못했던 선수들과의 만남으로 잊지 못할 경험이 되었다. 특히 나에게 짠한 감정을 안겨주었던 케파는 가장 큰 인상을 주었다. 그가 누구도 생각지 못한 반전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미운털이란 미운털은 다 박히고, 가장 서럽다는 후보 골키퍼로 전락한 케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좋은 태도를 보이며 묵묵히 주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노력해왔다고 한다. 이때의 만남으로부터 얼마 후 그는 주전 골키퍼 자리를 되찾음과 함께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있는 첼시에서 몇 안 되는 제 몫을 다하고 있는 선수가 되었다. 당장의 부진 혹은 불행에 힘들어하더라도, 한 번의 결정적 기회를 기세로 바꿀 수 있다면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상황으로 전개될 수 있다. 2012년의 첼시 그리고 2023년의 케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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