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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휘날리며

유럽축구여행_3 London

by 이대로

Tottenham Hotspur F.C. vs Wolverhampton Wanderers F.C.


유럽에서는 버스나 기차를 타고 국경을 쉽게 드나들 수 있다. 그중 ‘플릭스 버스’라는 버스 회사가 유명하다. 플릭스 버스는 유럽 대부분 국가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국내 여행뿐 아니라 타국가로 여행할 때도 굉장히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이동 수단이다. 이제 단점을 말해보자면, 유럽 내 많은 저렴한 이동수단들이 그러하듯 플릭스버스 역시 지연으로 악명이 높다. 한 번은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플릭스버스가 1시간이 넘게 지연된 적이 있었다. 문제는 이때가 나의 첫 플릭스 버스 이용이었을 뿐 아니라 아우크스부르크 플릭스 버스 정류장은 허허벌판 공터의 길 위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일단 내가 서있는 이 길이 플릭스 버스 정류장이 맞긴 한지, 또 왜 버스는 안 오는 것인지, 혹시 내가 놓친 것인지 등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게 여기가 플릭스 버스 정류장이 맞고, 자신들이 기다리는 버스와 같은 버스이니 함께 기다리자고 했던 외국인 가족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아직도 선명히 그 기억을 가지고 있음은 당연하다.


DSCF8024.jpeg 아우크스부르크의 플릭스 버스 정류장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그 가족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대화는, 가장 보편적이기도 한 질문인 ‘Where are you from’으로부터 흘러나왔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그들은 오징어게임, 기생충, 손흥민, 블랙핑크 등 한국의 자랑거리를 술술 말하며 나를 놀라게 했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그들이 어디서 왔을지를 미리 예상하여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나열할 채비를 마치고 물어봤다. 답은... '세비야'였던 것 같다. 스페인의 세비야를 말한 건가 싶어 에스파냐냐고 물어보니 아니라고 하며 세비야라고 몇 번을 연신 반복한다. 하지만 아무리 들어봐도 세비야 말고 떠오르는 곳은 없었다. 그렇게 서로 답답한 상황에서 가장인 아버지분께서 테니스라켓을 휘두르는 동작을 선보이며 "조코비치!"라고 외치셨다. 나도 그제야 "아! 세르비아!!!"라고 단말마 비명과 같은 한마디를 터뜨리고 비디치, 이바노비치, 마티치, 블라호비치 등 세르비아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이라고 해도 축구선수밖에 없었지만)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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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는 자조적 밈처럼 쓰이는 ‘두유노우’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비교적 작은 국가들에게는 필수적인 수단이자, 반대로 외국인이 그 나라에 대한 자신의 애정과 관심을 드러내기에도 적합한 수단임을 느낀 순간이었다. 세르비아인들에게 현시점 세계 최고, 아니 역대 최고라고도 볼 수 있을 조코비치에 대한 자부심은 엄청났다. 코로나 이후 그가 겪은 문제에 대해 너무도 안타까워하는 마음에도 공감할 수 있었다. 조코비치가 그들에게 줬던 자부심과 유사한 그것을 우리나라 국민에게 준 사람이 있다. 바로 '손흥민'이다.


2002년 월드컵 4강 이후 우리 축구계에서 가장 놀랄만한 사건을 하나 꼽아야 한다면 나는 손흥민의 2021-22 시즌 프리미어리그 득점왕(골든부츠) 수상을 주저 없이 꼽을 것이다. 아시아인 선수가 유럽 빅리그에서 두 자릿수 득점에만 성공해도 역사에 남을 정도의 기록이었는데, 세계 최고 리그인 프리미어리그에서 득점왕을 수상한 건 정말 말이 안 된다. 그래서일까, 나는 토트넘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과는 별개로 이번 유럽에 있으며 토트넘의 경기는 꼭 봐야겠다고 다짐했고 이렇게 생각한 한국인은 나뿐만이 아닌듯했다. 심지어 상대팀 울버햄튼에는 황희찬도 있었으니, 이번 경기에 유독 한국인들이 많이 몰리는 건 당연했다. 실제로 토트넘 스타디움에 가까워지자 나는 신기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제까지는 유럽 그 어디를 가더라도 동양인이면 중국인이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토트넘 스타디움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인이 훨씬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손흥민의 입지를 느낄 수 있던 또 다른 장소는 토트넘 스타디움에 위치한 팬샵이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이 너무도 많았고, 이 때문인지 한국인 직원도 있었다. 다만 살갑게 응대를 해주던 외국인 직원과 달리 오히려 한국인 직원은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보통 축구 구단의 팬샵/스토어의 하이라이트는 유니폼 판매대이다. 아무 마킹이 되어 있지 않은 유니폼을 사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킹과 패치를 부착할 수 있지만, 많은 수요가 예측되는 인기 선수들은 미리 그들의 마킹이 부착된 유니폼을 판매하곤 한다. 즉, 팬샵에 그 이름이 마킹된 유니폼이 얼마나 비치되어 있느냐가 그 선수의 인기에 대한 반증이라 볼 수 있다. 놀랍게도 토트넘 팬샵에서 가장 많이 비치된 마킹 유니폼의 주인공은 손흥민이었다. 지난 시즌 케인의 이적 파동과 손흥민의 득점왕 수상 등이 원인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유스출신이자 팀 내 최고 스타인 케인보다도 손흥민의 유니폼이 훨씬 많았던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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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토트넘 팬샵의 사진들 / 토트넘 구장 내에 파는 치킨. K리그 푸드트럭 닭강정이 훨씬 낫다.

경기장에 들어서니 현재 프리미어리그를 통틀어도 가장 좋은 구장이라 할 수 있을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의 내부 시설이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평소보다 서둘러서, 경기가 시작하기 한 시간 반쯤 전에 들어왔는데 이렇게 먼저 경기장에 입장해 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한국인들이 인증숏을 찍고, 손흥민과 황희찬이 몸 푸는 것을 보기 위해 일찍이 들어와 있었다.

다만, 토트넘 스타디움에 모인 수많은 한국인들의 바람대로 경기양상이 흘러가진 않았다. 황희찬은 선발에서 제외되었으며, 손흥민은 후반 도중 교체되었다. 이번 시즌 심상치 않은 부진을 겪고 있는 둘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적어도 전시즌 득점왕 손흥민의 부진은 잠깐의 슬럼프 정도로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토트넘의 답답한 경기력과 함께 손흥민 역시 활약을 하지 못했고, 경기가 끝난 후 환하게 웃는 손흥민에게 사인이라도 받아볼 생각이었던 많은 한국인들 역시 멘붕에 빠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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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문제가 더 있었다. 손흥민의 활약도 활약인데, 토트넘의 경기력도 최악이었다. 축구를 직관하며 졸아본 적은 없었는데, 8월 런던의 따스한 햇살과 토트넘 치킨을 먹고 부른 배, 완공이 2년밖에 지나지 않은 아늑한 경기장, 시간이 지날수록 화이트 노이즈 정도로 들리는 응원가와 영국 아재들의 욕, 그 무엇보다도 참으로 맛깔난 경기력의 콘테볼... 어느 순간 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여담이지만, 한 달쯤 후 개강을 하고 도르트문트 팬인 독일인과 대화를 한 적이 있었는데, 런던에 가서 토트넘 경기를 봤다고 하자 "너 축구를 정말 사랑하는구나!"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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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고 있는 2023년 3월 기준으로, 손흥민과 황희찬 두 선수는 여전히 모두 만족스럽지 못한 시즌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선수는 불과 얼마 전 2022 카타르 월드컵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16강행을 견인한 골을 합작해 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이후 지속된 국가대표팀의 암흑기를 끝낸 순간이자, 2002년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그것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었던 2022년 한국 축구 최고의 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골을 통해 인생에서 포기 대신 찾아올 기적을 믿게 되었고, 축구 그리고 나아가 스포츠의 묘미를 알게 되었다. 누가 그들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은 토트넘과 울버햄튼의 경기장을 찾아 태극기를 흔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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