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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ce Upon a Time in Britannia

유럽축구여행_2 Manchester, Glasgow

by 이대로

National Football Museum


축구팬이 맨체스터에 왔다면 가야 할 곳에는 올드 트래포드와 이티하드 스타디움 외에도 한 곳이 더 있다. 바로, 국립 축구 박물관(National Football Museum)이다. 영국을 포함해 각 국가마다 축구 협회가 있고, 대개 모두 그들만의 축구 박물관을 운영하곤 한다. 그럼에도 맨체스터에 위치한 잉글랜드 축구 협회의 국립 축구 박물관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영국이 축구 종주국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축구협회는 KFA(Korea Football Association), 독일의 독일축구연맹은 DFB(Deutscher Fußball-Bund)인 것처럼 각 국의 축구협회 혹은 그 역할을 담당하는 기관들은 그 앞에 국가명을 붙인다. 하지만 잉글랜드 축구 협회만큼은 EFA 등이 아닌 그저 FA(Football Association) 일뿐이다. 그 이유에는 1863년 런던에서 창립된 이 최초의 축구 공식 기구가 비로소 축구의 규칙들을 정립, 즉 오늘날 축구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그로부터 약 4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창설되었으니 영국인들이 축구 종주국의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런 잉글랜드 축구 협회가 관리하는 국립 축구 박물관은 원래 프레스턴이라는 작은 도시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비교적 최근인 2012년 맨체스터로 이전했다. 그래서인지 건물 외관도 상당히 현대적이다. 맨체스터 중심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경기장들과 달리 접근성도 굉장히 좋은 편이다. 박물관은 원래 무료로 운영되었었다고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일단 2022년 기준 유료로 입장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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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축구 박물관의 외관 / 벽에는 영국 축구계 상징적 인물들의 그림이 붙어 있다.


어쨌든 '축구' 박물관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기에, 나는 이곳이 축구라는 스포츠에 관한 지엽적 전시를 다룰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잉글랜드 축구 협회가 'FA'이지만 잉글랜드 축구 협회인 것처럼 이곳 역시 축구 박물관보다는 '잉글랜드 축구 박물관'이라 보는 게 더욱 적합할 듯싶었다.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영국 프로 축구 리그와 컵의 역사, 팀들과 그 팬 그리고 신문과 방송을 아우르는 미디어 등 기나긴 잉글랜드 축구 역사에 관하여 다룬다. 생각만큼 규모가 크진 않았으나, 전시 구성이 알찼고 상당히 가치 있는 전시품도 여럿 있었다. 페널티킥 게임 같은 액티비티도 즐길 수 있기에 축구 팬, 특히 가족과 함께라면 한 번쯤 와볼 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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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 Trafford


영국 축구 박물관을 다녀온 후 간 곳은 올드 트래포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인 올드 트래포드는 '꿈의 극장'이라는 별명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축구 경기장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 팬들에게는 더욱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데, 해외축구의 아버지라 불리는 '해버지' 박지성이 전성기에 곳곳을 누볐던 경기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해외축구를 처음 보기 시작할 당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던 박지성의 맨유 경기를 자주 봤었고, 올드 트래포드는 내게 꼭 가봐야 할 경기장으로 남아 있었다. 다만 아쉬웠던 건 경기를 보지 못했다는 점. 물론 경기장 투어라는 선택지도 있긴 했지만, 다른 클럽들에 비해 맨유의 경기장 투어비는 꽤나 비쌌다. 내가 맨유팬이었다면 주저하지 않고 투어를 신청했겠지만, 리버풀 팬으로서 내 피 같은 돈을 맨유 운영비에 보탤 수는 없었다. 또한 이번이 아니라도 언젠가 이곳에는 경기를 보러 꼭 보러 오리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그리고 맨체스터에 와서 올드 트래포드를 안 가 볼 수도 없기에 경기장 구경이나 해보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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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트래포드는 이티하드 스타디움처럼 맨체스터 외곽에 위치해 있지만, 올드 트래포드가 좀 더 중심부에서 멀었다. 이티하드 스타디움까지는 걸어갈 수 있을 만 하지만, 올드 트래포드는 걸어서는 못 갈 거리였다. 시내로부터 적잖은 시간을 버스를 탄 후 올드 트래포드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을 때는 꽤나 놀랐다. 물론 경기가 없는 날이어서 더욱 한적하기도 했겠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장치고는 너무도 한적하고 주변에 이렇다 할 인프라가 너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DSCF8558.jpeg 올드 트래포드 앞 도로. 한적한 교외의 풍경이다.


어쨌든 경기장 앞 광장으로 가보니, 그럼에도 맨유답게 투어를 신청한 사람들이나 나처럼 그냥 구경온 사람들까지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날이 더웠기에 팬샵을 먼저 가보았는데, 개인적으로 이번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은 정말 괜찮은 편이어서 사고 싶다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특히 유니폼계의 전설 중 하나라 볼 수 있을 98-99 트레블 시즌 어웨이를 오마주한 듯한 어웨이 유니폼은 최근 몇 년간 맨유 유니폼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또 하나 눈에 띄었던 건 그 인기답게 온갖 콜라보 제품들이 많았다는 점. 작년 올드 트래포드로 화려하게 돌아온 레전드 호날두의 컴백 기념 티셔츠가 당시 이적 파문으로 인해서인지 10파운드에 떨이 판매하고 있었다. 딱히 호날두에 큰 애정은 없지만, 그나마 하나 사자면 가성비 자체는 가장 좋은듯하여 하나 구매해 보았다. 당시 투어를 마친 한 꼬마가 아빠에게 유니폼을 사달라고 계속 조르고 있었는데, 이 호날두 티셔츠를 발견한 아버지가 이건 어떠냐고 하니 꼬마가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결국 겨울 이적시장을 통해 최악의 이별을 한 호날두의 현 상황을 생각해 보면 꼬마의 사자후는 현명한 판단이었다. 팬샵을 나와서는 경기장을 한 바퀴 돌아보았는데, 비교적 최근에 건축한 이티하드 스타디움과 달리 벽돌로 쌓인 외벽이 굉장히 독특했고 왜인지 영국 스럽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경기장 앞 가장 넓은 광장에는 사람들이 모여 다들 사진을 찍고 있던 네 인물의 동상이 있었다. 먼저 그중 하나는 박지성이 뛰던 맨유의 감독이자,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 명인 알렉스 퍼거슨의 동상이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마주한 곳에 위치한, 경기장 앞 광장 세 선수의 동상이 있다. 이들은 바비 찰튼, 데니스 로, 조지 베스트로 각각이 모두 발롱도르 위너이며 1968년 맨유의 첫 챔스 우승을 함께 이뤄낸 전설적인 트리오이다.


1958년 비행기 사고로 인해 선수 8명을 포함해 23명이 사망하는 참사를 겪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그로부터 10년 후,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유럽의 챔피언으로 거듭나며 유럽 전역에 성공적 재건을 알렸다. 이 우승이 없었다면 맨유가 지금처럼 빅클럽이 되진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면 비약이 지나치다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이 우승이 값졌던 이유는 여전히 아물지 않았던 커다란 슬픔을 극복해 낸 결과였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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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비행기 참사를 기리는 시계 / 바비 찰튼, 데니스 로, 조지 베스트 그리고 알렉스 퍼거슨의 동상


올드 트래퍼드 방문을 마친 후에는 걸어서 약 10-15분 거리에 있던 맨체스터 미디어 시티에 가보았다. 미디어 시티에는 영국의 지상파 방송이라 할 수 있는 BBC와 iTV를 비롯해 몇몇 스튜디오들과 회사들, 샐포드 대학교가 위치해 있으며 큰 쇼핑몰과 영화관도 있었다. 과거 산업혁명 당시 번창했으나 이후 쇠퇴의 길을 걷던 샐포드 부두 지역의 성공적 도시 재생 사례이다. 실제로 미디어시티는 내가 영국에서 방문해 본 그 어느 곳보다 현대적인 모습을 갖춘 곳이었으며, 야경도 굉장히 아름다웠다. 축구장과 그 근처의 방송국들이 다수 위치한 도시 재생 지역... 상암을 떠올리게 한 맨체스터 미디어 시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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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tic Park


맨체스터에서의 며칠을 지낸 후 글래스고로 향했다. 글래스고는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거대한 두 클럽의 연고지이기도 한데, 바로 올드펌 더비의 라이벌 관계에 있는 '셀틱'과 '레인저스'가 그 주인공이다. 사실 글래스고에서는 1박 2일의 짧은 일정으로 머물렀고 두 클럽의 경기를 보거나 경기장을 방문할 계획은 없었다. 예상보다 일정에 여유가 조금 생겨 무작정 글래스고 파크에 가보게 되었다. 레인저스와 셀틱 중 굳이 셀틱의 경기장에 방문한 이유라면 기성용과 차두리가 뛰며 익숙한 팀이어 서기도 하고, 레인저스 팬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셀틱이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최고의 팀이라고 생각해서이기도 하다. 셀틱의 홈구장인 글래스고 파크 역시 여느 축구장처럼 중심가에서는 꽤나 거리가 있다. 버스를 타고 가장 가까운 정류장에 내렸을 때, 같은 주택가였던 올드 트래퍼드나 이티하드 스타디움과는 달리 좀 더 낙후되고 거칠어 보이는 분위기를 풍겼던 것이 기억난다.


DSCF9990.jpeg 버스에서 내린 후 셀틱 파크로 가는 길. 상당히 영국스럽다


경기가 없는 날이라 경기장은 역시나 한산했지만, 드문드문 방문객들이 있었다. 마침 경기장을 방문하는 오후가 되자 날도 흐려지고, 앞서 말한 대로 한적한 동네에 위치해 있고, 경기장에 사람도 없다 보니 셀틱 파크에 대한 나의 인상은 경기장의 별명인 '파라다이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칙칙하고 스산하기까지 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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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틱 파크에는 네 인물의 동상이 있었는데, 먼저 메인스탠드 앞에 위치한 윌프리드 수사, 조크 스타인, 지미 존스톤 그리고 그로부터 좀 더 걸어 나와 경기장 입구 쪽에 위치한 빌리 맥닐이 그 주인공들이다. 윌프리드 수사는 1887년 글래스고 동쪽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모금을 목적으로 셀틱을 창단한 인물이다.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은 셀틱 역사상 최고의 순간이었던 1966-67 전관왕을 전후로 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들이다. 조크 스타인은 감독, 지미 존스톤은 공격수, 빌리 맥닐은 주장이자 수비수였다. 이들에게 최고의 순간은 리스본에서 열린 1967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당대 최고의 팀 인테르를 물리치고 우승컵을 들어 올린 순간일 것이다. 당시 축구계를 지배하던 카테나치오 전술을 공격 축구로 파훼하며 전술사적 흐름의 변화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이 우승으로써 셀틱은 오늘날의 '빅이어'로 알려진 챔피언스리그 트로피를 처음으로 들어 올린 팀 그리고 영국 최초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 팀이 될 수 있었다. 또 하나 놀라운 기록은 당시 인테르를 상대로 한 66-67 챔스 결승 선발 선수 전원이 경기장으로부터 30km 이내에서 출생한 로컬 보이로만 이뤄진 팀이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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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존스톤, 조크 스타인, 빌리 맥닐. 리스본에서 당대 최고의 방패 인테르를 상대로 용감한 승리를 가져온 이들은 '리스본 라이온스'라 불린다.


셀틱파크의 팬샵은 내가 가본 축구 구단 팬샵 중 가히 최고였다고 할 수 있었다. 보통 축구 구단의 굿즈는 나 축구팬이오~하는 느낌이 짙은 경우가 많고, 사실 이 돈이면 더 이쁜 거사지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k리그의 구단들... 하지만 셀틱은 구단의 아이덴티티를 확실히 살리면서도 굉장히 세련된 굿즈들을 많이 팔고 있었다. 부담스럽지 않은 엠블럼과 마치 스타벅스를 떠올리게 하는 초록색이 제 몫을 다했다. 특히나 유니폼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셀틱답게 유니폼은 물론 트레이닝 킷 등도 너무나 구매욕을 자극했다. 여기서는 하나 꼭 사야겠다는 생각에 무엇을 살지 고심하던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반값 세일 중인 지난 시즌 긴팔 유니폼이었다. 레플리카 수집가들에게는 '셀틱은 긴팔'이 마치 공식처럼 자리 잡았을 정도로 인기 있는 긴팔인데, 지난 시즌에 우승까지 한 데다가, 개인적으로 유일한 흠이라 생각했던 스폰서도 제거된 버전이었다. 이렇게 유럽에서 나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유니폼을 구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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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틱의 팬샵 슈퍼스토어와 인상 깊었던 굿즈들.


오늘 방문한 맨유와 셀틱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영국 클럽 중 트레블을 달성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유이한 팀이라는 점. 뿐만 아니라, 두 클럽의 트레블 당시에는 구단 유스 출신들이 주축이 되었다는 점도 같다. 맨유의 경우에는 퍼거슨 아래 베컴, 긱스, 스콜스, 네빌 등 선수들이 주축이 된 그 유명한 Class of 92이 있었고, 셀틱의 우승 당시에는 조크 스타인 아래 전원이 셀틱 파크 인근에서 태어난 Lisbon Lions가 있었다. 영국에서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구장에 방문하는 모습을 많이 봤는데, 이렇게 아버지를 따라 축구를 보러 가고, 축구를 사랑하게 되고 축구를 하게 되며 성공적 유스 시스템과 팬 기반층이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국가대표팀은 왜 항상 부진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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