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축구여행_1 Manchester
내 또래의 축구팬들이 으레 그렇듯 내가 축구를 보기 시작했던 2010년 경, 내가 가장 많은 경기를 챙겨본 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현재 손흥민의 토트넘 그 이상으로 당시 박지성의 맨유는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고, 토트넘과 달리 축구도 잘했다. 그렇기에 축구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안 그런데가 어디 있었겠느냐만,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맨체스터'는 '유나이티드'였다.
그러나 2010-11 시즌, 퍼거슨 감독이 '시끄러운 이웃'이라 치부했던 맨체스터 시티가 준결승에서 맨유를 이기고 FA컵 우승 달성 및 첫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성공했으며 다음 시즌에는 프리미어리그 역사에 남을 극적인 우승 확정까지. 특히나 2012-13 시즌 이후 맨유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은퇴와 2016-17 시즌 펩 과르디올라의 맨시티 부임 이후 맨체스터 두 팀은 그야말로 ‘전세역전’되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우승은커녕 챔스진출조차 불규칙적인 팀이 되었지만, 맨시티는 시즌당 우승컵 하나는 기본으로 가져가며,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다 승점 기록 1, 3위를 차지하는 등 명실상부 2010년대 후반부터 현재 2020년대 초반 프리미어 리그 최고의 팀으로 자리 잡았다.
사실 난 맨체스터 시티를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다만 그리 싫어하지도 않을 뿐. 그럼에도 내가 맨체스터 시티의 경기를 보고자 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 번째, 표를 구하기 쉬웠다. 원래 계획은 런던을 시작으로 맨체스터로 마무리하여 영국을 한 바퀴 도는 여정이었다. 런던에서 첼시와 토트넘의 경기를 본 후, 맨체스터로 와 맨유와 리버풀의 경기를 볼 예정이었다. 하지만, PL 티켓 구매하는 법을 알아보기 시작한 순간 이미 이 경기들의 표를 구하려면 한참 전에 시도했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도 정반대의 루트, 즉 맨체스터에서 런던으로 여행하더라도 흥미로운 매치를 관전할 수 있었다. 맨체스터에서 디펜딩 챔피언 맨체스터 시티의 시즌 첫 홈경기와 런던에서 토트넘과 울버햄튼의 코리안 더비. 심지어 이 두 경기는 표를 구하기도 쉬워 당장 여행 떠나기 전주에 표를 구매했음에도 각 구단 공식 홈페이지에서 꽤나 만족스러운 좌석의 표를 구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의 경기력이었다. 펩 과르디올라가 팀을 맡은 지도 어언 6년, 맨체스터 시티는 오늘날 유럽에서 가장 완벽한 경기력을 뽐내는 팀 중 하나이다. 소위 말해 최첨단 축구를 구사하는 팀. 이런 팀의 경기를 직접 보고픈 마음은 축구팬이라면 누구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내가 좋아하는 FC서울도 맨체스터 시티의 풀백 운용법 등을 유사하게 활용했는데 결과가 좋지 못했었다. 과연 맨시티는 어떤 지점에서 차이를 보이는지 등도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런던에 도착한 후, 곧장 맨체스터로 향했다. 맨체스터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현대적이었다는 도시임에 놀랐다! 유럽을 가보지 않고 축구로만 접한 나로서는 항상 '런던은 대도시, 맨체스터와 리버풀은 깡촌이야!'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어서 맨체스터를 얕잡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맨체스터는 생각 이상으로 거대한 도시였고, 충분히 발전된 도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런던에 비해 작다고 해도 영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도시가 낙후된 건 말이 안 된다. 나의 무지로부터 비롯된 착각이었다.
맨체스터 시티 홈구장 '에티하드 스타디움'은 맨체스터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다. 걸어서도 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붐비는 버스를 타느니 그냥 걸어가는 팬도 쉽게 볼 수 있었다. 난 버스를 택했고, 맨시티 팬으로 꽉 찬 2층 버스에 타니 괜스레 흥분되기 시작했다. 당시 옆자리 아저씨가 맨시티 유니폼을 입기에 말을 걸어 보았다. 아저씨는 무려 사우스햄튼에 거주하고 계시는데, 20년째 모든 홈경기를 보러 오셨다고 했다. 참고로 맨체스터에서 사우스햄튼은 약 350Km 정도로, 대략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정도 된다. 또 한 번 나의 고정관념이 깨지던 순간이었다. 이티하드 스타디움의 별명이 엠티하드(emptyhad) 일 정도로, 맨시티는 경기장에 빈자리도 많고 응원 열기도 적다고 알고 있어서, 맨체스터 시티는 팬도 적고 역사도 짧은 클럽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순전히 나의 섣부른 착각일 뿐이었다. 어느 팀이든 진심으로 사랑하며 유니폼을 입고 머플러를 두르고 응원가를 목청껏 부르는 팬이 있다. 맨시티 역시 마찬가지다. 맨시티의 역사가 시작된 때는 만수르가 인수한 2008년이 아닌, 1894년임을 몰랐던 듯 지내왔던 것 같다.
그렇게 고대하던 첫 유럽 축구 직관이어서였을까. 나는 이 이후의 많은 직관과 달리 유독 많은 맨시티 팬들과 대화를 시도해 보았는데, 가장 좋아하는 선수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가장 많이 언급된 선수가 구단 최다 득점자인 세르히오 '쿤' 아구에로였다. 그런 그들에게 New 아구에로로 불리는 사나이가 있으니, 바로 엘링 홀란드 되시겠다. 현재 음바페와 더불어 가장 주목받는 유망주로 꼽히는 엘링 홀란드는 2022-23 시즌을 앞두고 그의 아버지가 선수 시절 뛰기도 했던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했다. 그런 그에게 이번 경기는 홈팬들과 마주하는 첫 경기였다. 지난 시즌 우승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톱이 없었던 맨시티였기에 현시점 세계에서 가장 핫한 스트라이커 홀란드에 대한 팬들의 기대감은 엄청났다. 경기 시작 전 라인업 소개에서도 팬들이 가장 열정적으로 반겨준 선수도 홀란드였고, 경기 중 공을 잡았을 때 가장 큰 함성소리를 이끌어낸 것도 홀란드였다. 당시 경기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홀란드의 득점을 바랐다. 하지만, 아쉽게도 홀란드는 득점에 실패했고 74분경 교체되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3월 기준으로 홀란드는 벌써 27골이나 득점하고 있는데, 이런 역대급 득점페이스의 한 장면을 직접 보지 못했던 점이 아직도 아쉬울 뿐이다.
경기는 예상대로 맨시티의 우세로 흘러갔는데, 이상할 정도로 본머스는 아무런 반격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고 싶은 듯 보일 정도였다. 일찌감치 4-0으로 스코어가 벌어지자, 본머스는 의욕을 잃은 듯 보였고, 맨시티 역시 주전 선수들의 교체를 통해 힘을 뺐다. 그렇기에 전반은 너무도 만족스러웠던 반면 후반은 다소 아쉬웠던 경기였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선수 중 한 명은 카일 워커였다. 일방적 경기 양상에서, 카일 워커에게 놀랐던 부분은 그의 공격적 재능이었다. 알렉산더 아놀드, 리스 제임스, 키어런 트리피어 등 공격적 재능이 출중한 라이트백들이 넘쳐나는 잉글랜드 대표팀이기에 워커의 수비력에 비해 공격력은 과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사실 그는 토트넘 시절부터 완성형 풀백이었음에도 말이다. 어쨌든 이날 직접 본 워커는 굉장히 테크니컬 한 선수였다. 워커가 빌드업의 시발점이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직관은 K리그만 봐온 나로서는, K리그의 웬만한 수준급 미드필더들이나 성공시킬만한 롱패스와 과감한 전진패스를 척척 성공시키는 그에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경기의 최우수 선수로 선정된 케빈 더브라위너에 대해서도 몇 마디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어느덧 서른이 된 케빈 더브라위너는 현재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선수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다만 이번 경기를 비롯해 올 시즌에는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이전에 비해 꽤 높은 지점에 위치시키고 플레이메이킹보다는 찬스메이킹과 득점에 집중시키는 듯했다. 미드필더보다는 쉐도우 스트라이커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그렇기에 생각보다 그가 볼을 잡는 경우도 많지는 않았는데, 그럼에도 조금의 과장을 섞자면 더브라위너가 공을 잡으면 그 공격은 어떻게든 위협적인 장면으로 모두 이어졌다. 심지어 단독 드리블 돌파에 이은 놀라운 득점까지 성공. 진짜 월드클래스를 처음 두 눈에 담은 순간이었다.
이렇게 나의 첫 유럽 축구 직관은 끝이 났다. 경기가 끝난 후 이티하드 스타디움에 울려 퍼지던 오아시스의 노래, 다시 비워져 보이기 시작한 하늘색 좌석들과 여름 맨체스터의 뜨겁게 내리쬐던 해와 푸르른 상공.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는 꿈만 같던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