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경력 워킹맘 스토리
꼴찌 엄마.
꼴찌 엄마. 2살 아들을 어린이집에 맡긴 이후로 생긴 나의 별명이다. 언제나 당직 선생님이 남아 있어야만 하는 단 한 명의 아이. 그게 내 아들이다. 퇴근하고 숨을 헐떡이며 뛰어가도 언제나 어린이집에는 아들만이 남아 있었다. 집에 가는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쓸쓸하게 혼자 남아 있을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우리는 아주 깜깜한 저녁이 되어야 만날 수 있었다.
"선생님, 하늘도 땅도 까만데 우리 엄마는 왜 안 와?"
아이가 선생님에게 그렇게 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는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가슴이 아려왔다. 미안했다. 그날 밤 나는 아이를 낳고 지금까지 지내온 약 2년을 되돌아보았다.
내 아이는 생후 4개월부터 내가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손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시어머니가 아이를 돌봐 준다는 말을 믿고 돌봄 걱정없이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지방에서 살아온 시어머니는 서울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2주도 되지 않아 다시 집으로 돌아가 버리셨다. 눈앞이 캄캄했다. 2002년 당시 고작 3개월의 출산휴가가 워킹맘이 사용할 수 있는 휴가의 전부였고, 민간 기업에서 육아휴직은 없었다. 추웠던 02년 1월, 나는 산후조리 대신 아이를 돌봐 줄 사람을 찾아 다녔다.
내 사정을 안타까워 했던 중학교 친구가 도와주겠다고 해서 사무실에서 30km 이상 떨어진 친구네 집 근처로 이사를 했지만, 친구 남편이 중국으로 발령 나며 12개월 된 아이를 돌봐 줄 사람을 다시 구해야 했다. 동네 이모님에게 3개월 돌봄을 받고 15개월부터 어린이집에 입소했다. 동분서주하며 아이를 돌봤지만, 아이에게 나는 ‘하늘도 땅도 까맣게 되었는데도 오지 않는 엄마’였다. 아이가 느꼈을 외로움, 그리움, 슬픔이 느껴졌다. 아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날, 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이를 위해 무엇이 최선일까? 나는 일을 계속해야 할까? 아무리 고민해도 엄마라는 역할도 소중하고 일터 또한 나에게 소중했다. 서울에서 2,500만 원 전세로 신혼을 시작해야 했던 우리 부부에게 맞벌이는 필수이기도 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아이와 내가 둘 다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거듭한 나는 몇 가지 현실적인 원칙을 세웠다.
-나의 형편에 맞는 보육시설을 선택하자.
-회사와 가까운 곳에 살자. 집이 좁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같이 있는 주말과 평일 저녁에 최선을 다해 아이에게 집중하자.
-사랑을 많이 표현하고, 많이 안아주고 같은 방에서 자자.
-엄마가 우리 사회에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이에게 알려주자.
그리고 회사와 어린이집이 모두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정말 작은 전셋집으로 이사했다. 다행히 집 근처에 24시간 보육하는 구립 어린이집이 있었고, 기다린 끝에 입소할 수 있었다. 이사의 힘은 놀라웠다. 비록 집은 작았지만, 아이와 스킨쉽을 더 많이 하고, 기존 편도 70분 걸린 출퇴근이 10분으로 줄면서 아이와 매일 2시간 이상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내 몸의 피로도가 줄어들고, 저녁 7시 30분에 아들을 데리러 가도, 아이는 여러 친구와 함께 어울리며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아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찾자
어느덧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돕고 싶었던 나는 더불어 사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자원봉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봉사를 통해 매번 새로운 경험을 이어갔다. 장애인 재활 시설에서 함께 달력을 포장하고 비닐하우스의 잡초를 뽑고, 무료 급식소에 수저를 나눠 드리고 음식 재료를 다듬고 설거지하고 음식을 대접하기도 했다. 노인복지센터에서 치매 할머니분들께 색종이 접기와 색칠 공부를 함께 하기도 하고 동화책을 가져가서 읽어드리기도 하고,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에게 도시락을 전해 드리기도 했다. 농촌 일손 돕기에서 콩을 털고 고구마도 캐고, 겨울이면 연탄도 배달했다. 아이는 누군가를 도울 줄 아는 사람으로 커가고 있었고, 가장 큰 수확은 봉사를 통해 나와 아이가 수많은 값진 추억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시간은 지금도 우리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아이와 즐거웠던 일들을 회상하는 시간에 아이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
“엄마, 난 어릴 적 가족들과 함께 시골 시냇가에서 물고기 잡고 고기 구워 먹고 수박 먹었던 시간이 정말 행복했어.”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사촌 동생들과 함께 담양으로 휴가 갔던 순간을 아들은 가장 행복해 했다. 학원도 거의 다니지 않던 아들과 함께 서울에 사는 것은 순전히 내가 근무하는 회사와 가까운 곳에 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들은 여기 서울보다는 시골 생활을 원하고 있었다.
“그 때가 정말 좋았구나. 엄마가 시골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생각해 볼게.”
난 회사를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 살 수는 없는 상황이라, 아들과 내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산촌 유학을 한 달간 할 기회를 찾아냈고, 아들에게 시골 생활을 선물했다. 아들은 지금도 초등학교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으로 정읍에 있는 한 산골 초등학교에서 보낸 한 달을 꼽는다. 그때 아들이 보낸 말린 들꽃이 붙여진 손 편지를 생각하면 아직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워킹맘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느 일방의 희생만을 요구할 게 아니라 서로에게 희망과 위안이 될 수 있는 대안을 찾는 노력이 꼭 필요하다. 이후에도 우리 가족은 주말에 캠핑하며 자연에서 누리는 행복을 함께 경험하는 시간을 이어갔다.
내 아들의 꿈은 엄마처럼 팀장이 되는 것
어느새 아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식 날 모든 아이가 한 명 한 명 단상으로 올라가서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졸업장을 받았다. 그때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꿈과 별명이 프로젝트를 통해 단상의 대화면 스크린에 비추어졌다. 우리 아들의 꿈은 ‘OO 회사 팀장’ 별명은 ‘봉사 수호천사’였다. 내가 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회사였다. 여러 번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어떤 일을 하고 싶어?”라고 물었을 때 “엄마 아직 모르겠어”라고 답하던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의 마음속에 일하는 엄마가 본보기였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힘들게 일하는 엄마 때문에 나의 일터를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어릴 적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니?’라는 질문에 아버지, 어머니라고 답하던 친구들을 보며 ‘저 친구 부모님은 정말 자랑스럽겠다. 얼마나 대단한 분일까’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오늘 그런 엄마가 되어 있다는 생각에 아들에게 감사하고 자신에게 뿌듯했다.
엄마의 믿음이 아이에게 전해지다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다. 이 시기는 전업 주부이건 워킹맘이건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일 것이다. 중학생 엄마로서 난 다시 한번 퇴사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주변 엄마들이 아들이 피시방에 자주 간다고 이야기하며 내 아들과 어울리는 것을 꺼리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혹시 내가 일하는 엄마라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닌지 고민에 빠졌다. 내가 아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아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아들이 무엇을 행복해하는지 고민했다. 나는 아들이 행복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율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랬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면 아들에 대한 기대는 늘어나고, 간섭을 더 하게 될 것인데 사춘기 아들은 엄마의 이런 변화에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받게 되고 관계만 망가질 거라는 그림이 그려졌다. 이건 나도 원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중학생이 된 아들은 1학년 때부터 게임에 집중하며 게임을 아주 잘했다. 나에게는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아들과 함께했던 수많은 추억과 경험으로 만들어진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게임만 하는 아들이 걱정이 되었지만, 언젠가 다시 돌아올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하지만 밤늦도록 연락 없이 들어오지 않거나 학원을 가지 않는 날이 계속되는 현실 앞에서 약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난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아들의 귀가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초등학교 시절 엄마의 퇴근을 기다리던 동안 아들이 느꼈을 외로움의 깊이를 공감하며 엄마의 마음을 글로 전했다. 이런 내 마음이 전해졌는지 아들은 '이런 식으로 더 하게 되면 폐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게임을 접겠다'고 했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 게임을 끊는 것은 어른이 담배를 끊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던데, 이걸 해낸 우리 아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 해주었다.
일을 하며 육아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인 것 같다. 가족의 도움이 있다면 좋겠지만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더더욱 힘들 것이다. 남편도 회사원으로 바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육아와 교육은 대부분 나의 몫이었다. 남편도 나도 대기업의 과장으로 가장 바쁘게 일하던 시절에 야근이 잦았다. 그럴 때면 아들이 회사로 왔고 아들은 내 옆에서 숙제를 하곤 했다. 회식이 있는 날이면 부서장인 내가 빠질 수 없어 아들을 회식 자리에 데리고 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솔직히 이런 나의 모습이 회사 동료와 직원들의 눈에는 치열하게 일하는 동료로, 상사로 보일 거로 생각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간부 사원을 대상으로 한 다면평가 리포트를 받아든 나는 울고 말았다.
‘자녀의 회사 출입이 잦고 회식에 데리고 옴’
세상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워킹맘의 치열한 삶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저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아줌마로 보였던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직장생활을 계속하는 게 맞는지 고민하던 때였다. 중학교 2박 3일 수련회를 다녀온 아들이,
“엄마 오늘 엄마 회사 근처에 수련회 버스가 멈췄어. 그래서 내가 친구들에게 엄마 회사를 가리키며 여기가 우리 엄마 회사야. 우리 엄마는 저 회사 마케팅팀장이라고 이야기했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할 정도로 엄마가 자랑스러웠어? 친구들에게 자랑할 정도로”라고 물으니, “그럼, 난 엄마가 회사에서 일하는 게 자랑스러워. 일하고 싶어도 못 하는 사람도 많은데, 엄마는 팀장으로 오랫동안 일하잖아. 그리고 엄마 회사에서 엄마가 꼭 필요한 사람이잖아. 엄마가 일하고 싶을 때까지 일하고, 엄마가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고, 나도 아빠도 신경 쓰지 말고. 엄마는 20년 동안 열심히 일했으니까 이젠 엄마가 원하는 대로. 공부, 봉사, 뭐든 엄마가 원하는 거면 다 좋아”.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느꼈던 그 감동이 다시 밀려와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 생각하는 아들이 있는데 내가 고민했었구나’ 생각하며 또 다시 힘을 냈다.
23년 경력 워킹맘의 응원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 삶에 대한 소중함을 더 느끼고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려고 한다고 한다. 2002년 엄마가 된 워킹맘의 하루하루가 그랬다. 정해진 시간 동안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해야 하니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더욱 소중하고, 충분하지 않은 시간이더라도, 그 시간 아이에게 집중하며 유한한 시간을 소중하게 보내려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정부와 기업에서 출산과 육아를 지원하는 다양한 제도를 만들고, 임신과 출산을 배려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져 가고 있어서 다행스럽다. 이런 제도가 만들어지는데 나와 같은 선배 워킹맘도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미소 지어본다. 하지만 아무리 환경이 개선되고 있어도 아이 키우며 직장 생활을 병행하는 워킹맘은 몸, 마음 정신이 힘들 수 있음을 인정하고, 함께 하는 시간의 양보다는 자녀와 연결되는 질이 중요하다는 상식을 믿고, 나와 아이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후배 워킹맘이 아이 키우기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직장에서의 자신의 꿈을 이루며 일할 수 있기를 23년간 워킹맘이 응원해본다. 마지막으로 나의 23년 워킹맘 스토리의 주인공 아들과 나에게 잘해냈다, 고맙다라는 응원을 보내고 따뜻하게 포옹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