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나와 연결하며 살아오신 아빠를 기억하며...
2004년 아버지와 이별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로 표현하지 않으셨지만, 살아 계신 내내 나의 든든한 지지자였고 나와 연결되는 것을 평생 좋아 하셨던 분이셨다. 날씨가 좋은 오늘 같은 날, 내가 아버지와 연결되었던 순간을 떠올려 본다.
먼저 1995년 여름. 나는 독일 하노버 대학 기숙사에 있었다. 운 좋게 독일 DAAD(독일 학술교류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어학연수를 받고 있었다. 그 당시 국제 전화 요금이 비싸기도 하고 적응하느라 바빠서 1주일간 집에 전화를 못 했다. 기숙사에서 그날 배운 내용을 복습하고 있던 시간, 방송이 나왔다. “한국에서 온 000 전화 왔어요.”라는 내용이었다. 나였다. 가족만 기숙사 전화번호를 알고 있지만, 집에서는 이 시간에 독일어도 영어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누가 나에게 전화를 했을 지 의아해하며 뛰어가서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수화기 너머 “꼬레아 꼬레아 꼬레아…….” 라는 힘찬 외침이 계속 들려왔다. 아빠였다. 나는 반가움과 놀라움에 "아빠?" 라고 소리쳤고 아빠는 "00아 잘있냐?" 라고 반갑게 안도하며 물으셨다. 독일에 있는 딸과 1주일 넘게 통화가 되지 않자, 아빠가 이곳에 전화를 직접 한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던 아빠는 ABC를 모르셨다. 그러나 이런 건 아빠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딸과 연결되고 싶은 아빠의 소망은 “꼬레아”를 수 분 동안 외치게 했다. 한국에서 온 학생은 나 혼자였기에 사무실에서 나를 찾는다고 생각하고 방송을 했다고 한다. 너무 반가워서 울면서 안부를 전했다. 말도 하나 안 통하는데 어떻게 전화할 생각을 했는지 물으니, 꼬레아라고 말하면 바꿔줄 것 같아서 무조건 하셨다고 한다. 아빠의 기지에 존경심이 가득 차올랐고, 용기에 경외감이 느껴졌고, 나의 무심함이 한없이 죄송스러웠고, 아빠와 무한한 연결감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두 번째 1985년쯤. 아빠를 떠올리면 아직도 소주잔이 생각난다. 시장에서 새벽부터 일하시던 아빠에게 아침을 가져다 드리던 어느 날, 아빠는 시장의 허름한 대폿집에 계셨다. 아빠 앞에는 소주 한잔과 김치가 담긴 접시가 있었고, 아빠는 소주잔을 들어 반쯤 나눠 마시고 계셨다. 다른 손님들 앞에는 소주가 병 째로 있었다. 여섯 식구 가난한 가장으로 살며 자신을 위해 돈을 쓰지 않았던 아빠는 새벽 노동의 노곤함을 달래는 순간에도 돈을 아끼기 위해 좋아하는 소주를 병으로 주문하지 못하고 한 잔만 주문하신 거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모르는 척 아빠에게 하얀 밥 가운데 김치만 들어간 따뜻한 김치 김밥을 전해 드린다. “아빠 이거 먹어”라고 나는 말한다. 아빠는 웃으며 내가 건네 준 김밥을 맛있게 드신다. 아빠와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 순간 아빠의 책임감, 헌신, 사랑을 느끼고 무한한 연결감을 경험할 수 있었다.
세 번째, 2002년 가을날이다. 아빠는 2004년 62세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나시기 전 8년간 침대에 누워 침상 생활을 하셨다. 아빠에게 용돈을 드리면 엄마에게 주시며 복권을 사게 하시곤 했다. 그날도 용돈을 드리면서 맛있는 것 드시라고 드리는데 왜 복권을 사게 하느냐고 물으니 “당첨되면 너희들 주려고”라고 밝게 미소 지으며 답하셨다. 나는 그날 복권 사실 용돈을 별도로 드렸다. 그날은 파란 하늘이 너무나 따사로운 가을날이었다. 나는 아직도 날씨 좋은 날 하늘을 올려다보면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주고 싶어하시며 미소 짓고 있는 아빠 얼굴이 그려진다. 그 순간 아빠와 무한한 연결감을 느낀다.
아이를 출산할 때 22시간 진통하고 있던 시간, 아빠도 환자 침대에서 잠을 한숨도 못 주무셨다고 한다. 남편과 통화가 되지 않자, 아빠는 산부인과에 전화해서 “우리 딸이 거기 있는데 아기 나았어요?” “아직도 못 낳고 있나요?” “언제 아이를 낳을까요?”라며 여러 번 전화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건강하게 출산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주무실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아빠 산소를 오랫동안 찾아가지 못했다. 평생을 나와 연결하며 살아오신 아빠를 기억하며 이제는 내가 아빠를 더 자주 만나러 가고 연결되며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