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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물감각 Mar 26. 2024

와인은 시간과 공간이 기록되는 장부다

과거는 죽어버린 것이 아니다-샤토 라피트 1952

생 빈티지 와인을 마시며- CHATEAU LAFITE-ROTHSCHILD 1952 

   



와인 역사가 일천한 나라에서 그것도 나이가 많이 든 사람으로 탄생 빈티지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입니다. 보르도의 경우, 20세기에서 가장 추앙받는 빈티지는 1945년입니다. 그리고 1949년, 1953년, 1959년, 1961년, 1982년, 1985년, 1986년, 1989년, 1990년, 1995년, 1996년, 1998년, 2000년 등은 아주 우수한 빈티지입니다. 이렇게 뛰어난 와인은 유럽의 와인 샵이나 레스토랑에서 물량을 확보하여 장기적으로 보관할 가능성이 많아서 비용은 좀 들겠지만 구입이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태어난 1952년은 평균이하의 빈티지로서 특히 수확량이 적었던 해였습니다. 봄과 여름 날씨는 매우 좋았지만 수확하기 직전부터 수확이 끝날 때까지 폭풍이 불고 변덕스러운 날씨에 기온까지 낮았습니다. 그래서 풍성한 맛이 약하고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고 견고하고 숙성이 덜된 와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와인은 숙성력이 떨어져서 오랜 시간 보관하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입니다. 더구나 60년이 다 되어 이 빈티지의 와인을 찾으니 쉽게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뉴욕에 있는 어떤 와인 샵에 52 빈티지가 있다는 정보를 얻어서 간신히 한 병을 구했습니다. 샤토 라피트 로쉴드 1952년입니다.      

와인은 그 해의 산물이며 그해의 날씨가 맺어준 결실입니다. 와인은 땅을 통해 공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 빈티지를 통해 시간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와인을 시음한다는 행위는 공간과 시간이 만나 이룩한 결실을 통해 어떤 가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탄생빈티지 와인을 마신다는 의미는 특별합니다. 내가 태어났던 해의 시간과 공간을 포도를 통해 직접 만나고 음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과일을 통틀어 포도 이외에는 이런 임무를 수행해 줄 열매는 없습니다. 필름을 되돌려보듯 나의 탄생 빈티지를 통해 60년 세월의 시공간을 초월하여 내가 처음 이 땅에 태어나던 그 순간으로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오래된 과거라 해도,

과거는 죽어버린 것이 아니다.     


이 와인을 마시면서 나는 르네 르센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나와 같은 시간에 열매 맺고 익어간 포도의 와인을 맛보면서 내 인생의 삶 전체가 현재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시간을 찾아낸 것입니다. 프루스트가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통해 추억을 되살려내었듯이 와인을 통해 60년의 삶 전체가 감각적으로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옛 기억이 서서히 내 자신으로 돌아오는 느낌으로 와인을 음미했습니다. 들뢰즈의 말을 빌리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미래를 향하고 있는 소설이지 과거를 향하고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인공인 ‘나’는 마들렌의 맛이라는 기호에 의해 기쁨을 느낍니다. ‘나’는 기호의 해독방식을 배우고 습득함으로 과거를 경험합니다. 시간이란 인간에게 경험의 차원입니다. 그 경험이 프루스트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와인 또한 하나의 기호입니다. 주인공이 마들렌의 기호를 해독한 것처럼 와인의 기호를 해독하는 능력이 습득된다면 와인을 통해 사유가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와인을 시음하는 행위는 다름 아닌 정신의 변화를 추구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이는 곧 미학적 경험과 통하는 말입니다.       

 

-무엇인가 살아가고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어딘가로 열려 있는,

시간이 기록되는 장부가 있다. (앙리 베르그송)     


내게 그 장부는 1952년 빈티지 샤토 라피트 로쉴드 와인 한 병이었습니다. 샤토 라피트 로쉴드는 소위 보르도지방의 5대 샤토에 속하는 1등급 와인으로 누구나 알고 있으며 마시고 싶지만 그런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는 명품 와인입니다. 이런 와인은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와인이 지니고 있는 사치스럽고 화려한 코드를 정확히 이끌어내 해독할 수 있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고급문화나 고급예술의 소비와 애호에는 배움과 노력과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문화 소비를 통해 사람들이 얻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충만감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더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샤토 라피트 로쉴드와 같은 수준의 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땅과 사람과 포도나무와의 관계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핵심은 바로 테루아(Terroir)입니다. 결국 농부는 토양과 기후의 테루아를 어떻게 포도에 새겨 넣을 것인가 고심하고, 와인 양조 마스터는 그 포도를 발효 숙성시킬 때 테루아적 특성을 와인에 얼마나 녹여낼 수 있느냐를 고민하게 됩니다. 한 병의 와인은 와인 메이커의 가치와 철학이 담겨있는 최종 결과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향과 맛을 즐기며 매혹적인 와인의 빛깔에 심미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넘어서 와인을 만든 이의 가치와 철학을 음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 잔의 와인에 누군가의 영혼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면 이미 그대는 세련된 와인 애호가입니다.      

와인은 한 해의 날씨와 자신이 자란 환경을 포도열매가 어떻게 수용하고 반영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치우침이 없는 조화로운 환경에서 자란 포도는 완벽한 균형감을 갖게 됩니다. 그런 포도는 양조과정에서도 닌과 산미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게 되어 균형 잡힌 와인으로 시음자의 찬탄을 이끌어냅니다. 흔히 저지르기 쉬운 잘못은 너무 빨리 오픈하는 경우입니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와인이라 하더라도 어린 와인을 너무 일찍 열어놓으면 디캔팅을 하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봐도 소란스럽게 와인을 흔들어 깨워 봐도 다 소용이 없습니다. 서두르고 재촉한다고 와인이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찬란한 능력을 드러내주지 않습니다. 경험으로 비추어보면 명품 와인들은 적어도 10년의 숙성 기간을 거쳐야만 그 와인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런 와인을 마시기까지에는 상당한 인내심이 요구됩니다. 이런 이유로 또 다른 메독 1등급 샤토의 하나인 샤토 라투르는 2012년에 와인의 선물거래(엉 프리뫼르)에서 탈퇴를 선언했습니다. 이는 와인을 미리 출시하지 않고 마실 시기가 될 때까지 샤토에 저장하겠다는 놀라운 선포였습니다. 샤토 라투르는 시음시기가 10년에서 15년은 족히 걸립니다. 그 기간 동안 샤토에서 완벽한 상태로 잘 보관하였다가 적절하게 마실 시기가 되면 출시하겠다는 뜻입니다. 샤토 라투르는 사람들이 와인을 너무 어릴 때 마시는데 대한 우려를 반영한 혁신적이고 과감하고 많은 희생이 따르는 결정을 했습니다. 보르도 1등급 샤토 명품 와인들이 완벽을 위해서 얼마나 고심하고 희생을 감내하면서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입니다.


한해 수확한 포도로 보르도에서만 매년 7억여 병의 와인이 만들어집니다. 그중에서 피라미드의 가장 꼭대기에 위치하는 5대 샤토들의 포도밭은 다른 곳에 비해 더 엄선된 재배를 하고 수확방식도 정교합니다. 보르도 최고의 샤토에서는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수확합니다. 이런 지역은 세계적으로 얼마 되지 않습니다. 1등급 샤토의 명성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브리옹의 디렉터 장 베르나르 델마는 1등급의 의미를 분석하고 이렇게 정의를 내렸습니다.      


-위대한 보르도 와인은 몇 가지 필수적인 전제가 충족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를 지난 250년 동안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포도밭은 완만한 언덕 지대에 조성되어야 하고,

토양은 포도나무뿌리가 깊게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크고 작은 자갈돌이 섞여 있어야 하며 하층토는 배수가 완벽해야 합니다.

또한 좋은 소유주를 만나

수세기 동안 축적해 온 포도밭 관리와 양조법과 더불어 과학적 지식을 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고 등급은 우연히 최고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와 같이 이들은 수세기에 걸친 부단한 노력과 디테일에 대한 엄격한 집착으로 마침내 현격한 가격의 격차를 이루어 냈습니다. 그리고 이 와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충직한 애호가들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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