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개의 방

도마

by Seriel J

"얘들아, 나 요즘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어서 그런데 얘기 좀 들어주겠니?"
영호의 메시지 옆 숫자가 점점 줄어든다. 무리에서 성격도 언어도 제일 유연한 순자가 걱정되는 투로 말을 꺼낸다.
"무슨 일 있어요?"
"내가 이 늦은 나이에 소개팅을 했어. 그런데 그 여자가 나랑 코드가 정말 안 맞는 것 같아."
"어떤 부분이 안 맞길래 그래요?"
"말투가 그렇게 듣기 좋지는 않아. 대화가 이어지지 않고 뚝뚝 끊어져."
"유난히 대화가 끊어지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음식은 잘 맞아요?"
"아니, 좋아하는 음식도 그리 잘 맞지는 않는 것 같아!"

그날 이후, 단체 톡방은 영호의 소개팅 이야기가 주가 되었다.
소개를 받은 여성분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만남을 이어가는 영호다.
데이트를 다녀온 영호는 어김없이 사람들에게 불평을 쏟기 바빴다.
"외모도 내 스타일이 아니네."
라는 말과 함께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띄운다.
"몸매도 날씬하시고 괜찮으신데요?"
오늘도 리액션을 놓치지 않는 순자다.
"별로야. 나는 살집이 좀 있어야 예뻐 보이더라."
"......"
정적이 흐른다.

며칠이 흘렀을까.
"다들 잘 지내니? 소개팅했던 여자가 나보고 대뜸 연락 와서 한 달 동안 연락을 기다렸다고 이야기하네. 주선자에게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전달하라고 했는데 전달이 안 됐나 봐. 정초부터 뭐 이렇냐."
형식적 예의를 갖춘 대답들이 하나둘씩 올라온다.
묵묵히 침묵을 지키던 은지가 대답한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은 보통 당사자에게 이야기해야 오해가 없겠더라고요. 누군가를 거치면 말이 와전될 수도 있고요."
"......"
재잘거리던 영호가 침묵을 지킨다.

영호는 가끔 본인을 잊어버리는 사람 같았다.
가벼운 표현들은 가벼운 농담이 되어 흘러간다. 이모티콘은 말 그대로 이모티콘일 뿐, 진심만이 녹아든 표현이 아닐 것이다. 마치 그 채팅방은 하나의 재판정이 된다. 허락 없는 평가와 근본 없는 점수가 매겨진다.
어디까지 하나 두고 두었던 영호는 결국 선을 넘는다. 피땀 흘려 창작의 고통을 거쳐 탄생한 타인의 글귀까지 멋대로 캡처해 맥락을 비틀어 웃음거리로 만든다.
영호에게 타인은 하나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장난감 같았다. 타인의 감정, 그리고 신중히 고른 음절들이 모인 문장들이 그에게는 고작 소품으로 전락하는 듯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여러 가지 감정을 느꼈다.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 멋대로 소비하는 듯한 가벼움 그리고 그 모든 행동을 ‘친하니까’ 혹은 '세대차이'라는 말로 합리화하는 본인 위주의 편리함.
누군가가 그를 도마 위에 올린다면, 가장 먼저 지적할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을 사귀는 것은 서로를 알아가는 일.
구경거리를 만들어선 안된다.
어떤 일이든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고 마음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감정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떠드는 순간, 그의 품격 또한 도마 위에 올려진다.
이모티콘은 흘러가는 하나의 캐릭터일 뿐, 진심이 될 수 없다.
누군가를 도마 위에 올린 뒤 흘리는 비웃음은 잠깐이지만, 도마 위에 올려진 누군가의 상처는 잠깐으로 그치지 않는다.
결국 돌아오게 돼있다. 비록 지금이 아닐지언정 결국 돌아오는 때가 있다.
그때, 과연 무엇을 느낄까?
영호는 아직, 그 질문 앞에 서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 시간 이후, 도마 위에 누군가를 올리고 계신가?
멈추시라.
스스로에게 질문하시라.
그 도마 위에 내가 올려진다면 어떤 기분일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 앞에 서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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