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지면 어때 누워있고 좋지
무당이 휘파람 불듯 휙 불어온 바람이 책상 위 현정의 다이어리를 넘긴다.
'나는 실패했다.'라는 몇 음절이 공간을 메운다.
물을 한 컵 따르고 마시려는 찰나, 이 모든 상황이 우연을 가장한 깨달음의 찰나인 것일까. 현정의 눈에 펼쳐진 다이어리와 함께 그 속에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아니, 왜 때문에 저렇게 적은 거지?"
집요한 강박증을 앓고 있는 현정은 종이에 꾹꾹 눌러쓴 반듯한 글자들을 보며 과거 여행을 시작한다.
'무슨 일이었지?'를 되뇌며.
한참을 생각하다가 기억 저장소에 있던 하나의 기억이 스멀스멀 고개를 든다.
현정은 스스로를 유난히 인간관계가 피로하고 버거운 사람이라고 여긴다.
현정이란 사람은 마음에 품어져 친해질수록 더욱 당연한 관계가 되지 않고 늘 감사하고 아끼는 마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세상 모든 일이 내 마음처럼 흘러가면 얼마나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녹록지 않다.
허물어지는 담벼락처럼 선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당연함이 도를 넘어 실망을 안겨주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진심을 다해 품었기에 기대도 실망도 큰 법이다.
아마도 다이어리 속 '실패했다.'라는 표현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고단함 중 하나였을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현정의 뒤에서 없는 말을 지어내고 다니는 여자가 하나 있었다.
그녀의 일상은 Blue다.
그녀의 말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현정의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은 채, 그녀의 편에 선 사람들이 있었다.
그 이야기들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고 그렇게까지 거짓을 일삼은 이유가 궁금했다.
그녀의 우울로 모든 것을 합리화하고 꾸역꾸역 이해하고 넘어가기에는 큰 생채기를 남겼다.
가슴에 품었던 친구들이었기에 더욱 아팠고 그 아픔이 버거워 결국 관계의 멈춤을 선택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란 길을 걷는 여행자다.
오늘도 상처에 시간이 덧대어진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 중 한 점에 불과하다.
'넘어지면 어때?'
이 말은 생각보다 무겁다. 이미 한 번 무너져 본 사람만이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넘어지는 순간보다 그 이후의 시간이 더디다. 상처를 바라보며
'왜 넘어졌을까?'
'내가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같은 길을 걸어도 될까?'
스스로를 설득해야 한다.
‘괜찮아’라는 말도 조심스럽다. 책임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괜찮다고 말했으니 결국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해지는 점도 있다.
자신의 속도를 과소평가 혹은 과대평가하기도 하고 상황을 쉽게 혹은 더욱 어렵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한 번의 실패는 숨을 고르며 돌이켜 보게 되며 앞으로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선택으로 이어지게끔 하기도 한다.
'방향 수정 신호'라고 일컫고 싶다.
오히려 넘어진 이후에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
흙이든 똥이든 묻은 손으로 다시 짚고 마음의 균형을 잡는다. 비록 비틀거릴지언정 내딛는 한 발.
느릿한 달팽이의 조심스러움이 결국 더 멀리 가는 지름길이 되기도 하니까.
상처에 오래 머무르지 마시라.
오래 머무를 거면 꼼꼼히 치유하시라.
재생의 순간, 당신은 이미 이전의 당신이 아닐 것이다.
넘어지면 어때.
누워있고 좋지.
온 우주의 중심은 당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