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제를 잘못 운영하는 우리 모두가 잘못이다.
나름 IT기업으로 이직한 이후 지금까지도 이해가 안되는 포인트는 "수직적"의사결정에 대한 혐오와 조롱게 가까운 정서이다. 수직적 조직의 가장 상직적인 모습은 아마도 관료제일 것이다. 누군가의 비유처럼 "관료제에서 구성원들은 머리를 집에 두고 출근한다." 의사결정을 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게 왜 문제일까? 일반적으로 현대 기업들에게는 창의성이 중요한 요소인데 관료제는 한 사람의 판단에 따라 수직적으로 의사결정되기 때문에 반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집단지성을 발휘할 수 없어서 문제라고들 한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회사에서 하는 이 많은 일들이 항상 그 정도로 수준 높은 창의성을 요구받고 있는게 맞을까?
단연코 아니라고 하고 싶다. 특히 대기업에서는 더더군다나 아니다. 대기업이 되었다는 것은 단수이든 복수이든 시장과 고객에게 검증 받은 비즈니스 모델이 원활히 작동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많은 구성원에게 급여를 줄 수 없다. 대기업 구성원들을 대부분 검증된 비즈니스니 모델을 안정적으로 돌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냉정하게 말하면 부품이나 나사가 맞다. 자조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커다란 시스템 속의 한 구성요소 그 자체로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 나는 기업을 현금을 만드는 기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구성 요소인 직원 개개인(나를 포함)은 창의적인 생각을 발휘하기에 앞서 자신이 할 일을 명확히 알고 정확히 수행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창의적인 생각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다르다는 것이다.
관료제는 효과보다는 효율을 높이기 위한 의사결정 구조다. 정보는 수직으로 흐르고 자리에 부여된 권한에 따라 결정의 범위가 달라진다. 일의 결과는 결정한 사람이 책임진다. 관료제의 장점은 이 일을 결정한 사람이 누구인지가 명확하다는 점, 그리고 일하는 입장에서는 한 사람의 말만 들으면 된다는 점이다. 수직으로 정보가 흐르기 때문에 내 팀장의 의견과 담당 임원의 의견이 일치하고 나아가 CEO의 의견까지 일치한다.
내 경험에서 관료제가 잘 작동하지 않을 때는 많은 경우 팀장과 임원, 임원과 CEO의 생각이 달라서였다. 그러다 보면 실무자는 하향된 의사결정 사안에 의문의 가지게 된다. "팀장이 시키는대로 했다가 임원에게 깨지는 거 아냐? 그러면 팀장은 내 탓으로 돌릴텐데.." 의문이 생기면 머리가 복잡해지고 일에 몰입할 수 없게 된다. 했던 일을 다시 하고 결정한 사람이 책임지지 않고 실무자를 탓하는 상황이 반복되면 실무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의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이다. 일은 하고 있으나 결과물은 나오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팀장과 임원과 CEO가 한 목소리가 되기를 기다린다. (아니면 의사결정 단계가 줄어들길 기다린다)
관료제를 제대로 운영하려면 하나의 사안에 대해서 리더들의 의사결정 수준이 유사해져야 한다. 큰 방향은 CEO나 임원이 정하되, 세부적인 증감에 대해서는 팀장에게 위임하고 팀장은 임원과, 임원은 CEO와 긴밀히 소통하면서 기대를 벗어나지 않도록 해줘야 한다. 이러면 실무자는 팀장 말만 듣고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할 수 있다.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하고 나면 그때서야 이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방법, 우리 팀이 더 나은 팀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고민할 여유가 생긴다. 집에 두고 온 머리 속 창의성은 이때 꺼내야 한다.
직원들이 수직적 의사결정을 혐오한다면.. 리더들이 가장 먼저해야 하는 고민은 '내 생각과 다른 리더,임원,CEO의 생각은 얼마나 유사할까?'이다. 리더들이 원 팀이 아니라면 관료제가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