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의 시작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제안이나 부탁이 아닌 '지시'를 했을 때, 내 생각은 당연히 그의 것과 똑같을 것이라고 전제를 깔고 말했을 때, 무언가 쎄한 느낌이 내 머릿속에 아주 잠깐 맴돌다 사라졌던 그 순간에, 나는 알아차렸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 찰나의 순간에 나의 무의식이, 혹은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나에게 멈춤 신호를 보냈다는 것을.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희미하게 반짝거리며 점멸하는 멈춤 신호를 무시한 채, 그와의 관계 속으로 나는 점점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내 자신을 길바닥에 내다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파멸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