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아 노래, '도망가자'
내 술버릇은 우는 것이다. 취하면 점점 말수가 없어지고 조용해지다가 나중에는 입술을 삐죽이며 운다.
수능을 치고 처음으로 술을 마셨을 때 맥주 350ml 한 캔에 만취해서 제대로 헤어지지 못해 상처로 남아 있던 첫사랑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 말도 못한 채 울기만 했다.
주량도 알지 못한 채 주는 대로 다 받아마시고 인사불성이 됐던 스무살 대면식 때는 내가 계속 우니까 선배들이 도대체 왜 우냐고 물어봤단다. 그때 내가 내 가슴을 주먹으로 탕탕 치며 "한이 많아서 그래요."라고 했다고 한다(사실 나는 기억이 안 난다).
그 외에도 수많은 통곡의 역사가 있지만 단연코 압권은 대리 기사 아저씨를 불러 집에 가는 차 안에서 했던 대성통곡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밤길의 불빛을 보며 한껏 감성적이 되어가고 있을 때 선우정아의 노래, '도망가자'가 흘러나왔다. 그 노래를 듣자 눈물을 멈출 수가 없어서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다.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할 것만 같아
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괜찮아
우리 가자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대신 가볍게 짐을 챙기자
실컷 웃고 다시 돌아오자
거기서는 우리 아무 생각말자
가보는 거야 달려도 볼까
어디로든 어떻게든
내가 옆에 있을게 마음껏 울어도 돼
그 다음에
돌아오자 씩씩하게
지쳐도 돼 내가 안아줄게
괜찮아 좀 느려도 천천히 걸어도
나만은 너랑 갈 거야 어디든
내가 너무 우니까 대리 기사 아저씨가 놀라서 나를 막 위로했다. 그랬더니 나는 다시 "결혼생활이 너무 힘들어요."라며 더 꺼이꺼이 울었다. 정신 없는 와중에도 뜨아했던 건 대리를 부르는 과정에서 본인 전화번호를 알고 있을 테니 힘들면 언제든 자기에게 전화하라던 대리 기사 아저씨의 말(띠용).
진짜 도망가고 싶던 시절이었다. 집에 가는 발걸음이 무거운 추 같던 시절.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고속도로 출구로 나가지 않고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그냥 계속 달려가고 싶던 날들.
근데 이 노래의 가사를 잘 살펴보면 결국 다시 돌아오기 위해 도망가는 거다. 거기 가서 많이 울고 실컷 웃고 다시 돌아오자는 위로. 다시 돌아오기 위한 도망. 견디기 위한 도망.
어쨌든 꺼이꺼이 울면서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잘 단도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던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 잘 견뎠다, 그 시절의 나. 그때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다면 지금과 같이 평화로운 삶은 없었을 것 같다. 그땐 아이들이 너무 어렸고, 아빠 손길도 필요했고 나혼자 아이들을 키운다는 게 엄두가 안 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 시간을 잘 견뎌서 지금의 시간이 선물로 주어진 것 같다.
나는 사실 이 노래는 선우정아가 부른 것보다 '비긴어게인'에서 정승환이 부른 걸 더 좋아한다. 처음 정승환이 부르는 '도망가자'를 듣고도 눈물이 났었는데.
얼마 전에 늘 오은영 박사님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 '술 취하면 우는 술버릇을 가진 사람들이 우는 이유와 관련된 연구결과'를 제미나이에게 물어봤다. 그랬더니 제미나이가 이렇게 대답해줬다.
술을 마시고 우는 술버릇은 흔히 볼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심리학적, 생물학적 설명이 있습니다. 연구 결과들을 종합해 볼 때, 핵심적인 이유는 알코올이 뇌에 미치는 영향과 평소 억눌린 감정이 표출되는 현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술 취하면 우는 주요 이유>
1. 뇌의 억제 기능 약화(탈억제 현상)
2. 감정 증폭 및 조절 능력 저하
3. 스트레스 해소 및 정서적 대처 방식
결론적으로, 술 취했을 때 우는 행동은 알코올로 인해 뇌의 감정 통제 기능이 약화되면서 평소 억눌려 있던 부정적인 감정(슬픔, 불안, 우울 등)이 증폭되어 표출되는 현상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부정적인 감정(나에게는 슬픔이 해당되는 것 같다)을 가슴 안에 꾹꾹 눌러 놓고 사는 사람이란 말인가. 예전엔 그렇다치더라도 지금도 역시?
이제는 내 안에 슬픔을 채워놓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를 채워서 만취하면 더 방긋방긋 웃고 말도 더 많아지는 내가 되고 싶다.
도망가지 않고 현실에서 행복한 나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