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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로면 용서될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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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sy 포지

나의 첫 직장은 삼성역 부근에 있었다. 그 당시 수서 부근에서 자취를 했기 때문에, 강남에서 직장과 집을 모두 두고 생활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테헤란로에서 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멋져 보였다. 지하철을 세 번 보내고 나서 겨우 분당선을 타도, 힘들지만 한 편으로는 내가 강남 직장인의 한 축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점심시간이면 코엑스를 가든, 도심공항을 가든 직장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때 동료들과 농담처럼 하던 말이 있다.



"우리는 점심 한 시간 중 10분은 이동하고, 40분은 기다리고, 밥 먹는 데 10 분을 쓰네."



어딜 가든 북적이는 생활 속에서도 각기 다른 사원증을 목에 매고 강남에서 일하는 엘리트 직장인들에 휩싸인 느낌이 꽤 근사했다.



무조건 칼퇴근을 하는 회사였기 때문에, 친한 동료들과 퇴근해서 종종 저녁을 같이 먹었다. 커피나 맥주까지 한잔하고 나면 퇴근길 러시아워도 피할 수 있었다.



혹은 삼성역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식품관에서 3팩에 만 원하는 저녁거리를 사서 집에 갔다. 그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던 건 백화점 1층에 있던 매그놀리아 베이커리의 바나나 푸딩이다. 5천 원짜리 푸딩 하나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괜스레 뉴욕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다음 날 아침으로 먹는 게 작은 즐거움이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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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그놀리아 베이커리가 있던 자리에 지금은 카멜커피가 있다.



회사는 전반적인 사내 분위기가 좋았고, 사람들도 젠틀했다. 지금도 여전히 잘나가는 회사이지만, 정작 나는 그런 첫 직장에서 너무 힘들었다.



스트레스가 신체 반응으로까지 나타날 정도였다. 매일 몸살이 걸린 것처럼 아팠고, 집 주변과 회사 주변의 내과란 내과는 전부 다 가본 것 같다. 점심시간에는 밥을 거르고 링거 수액을 맞고 오기 일쑤였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한결같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약을 아무리 먹어도 나아지지 않자, 나중에는 혹시 내성 때문에 안 듣나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일부러 다른 병원을 찾아가 이전에 먹은 약 목록을 보여주며 "다른 항생제로 처방해달라"라고까지 말했다.



그럼에도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무리 약을 먹고 쉬어도 병원에서는 감기 몸살이라거나 그저 피곤하면 그럴 수 있다는 답변뿐이어서, 혹시 큰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결국 서울삼성병원까지 찾아갔다.



놀랍게도 거기서도 결과는 같았다. 서울삼성병원에서 피검사를 비롯한 정밀 검사까지 했지만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너무 아팠다. 온몸에 열이 펄펄 나는 데 오한이 들어 이불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식은땀으로 매일 이불 빨래를 해야만 했다. 이제 더 이상 끌어 쓸 휴가도 없었다.






회사에 가는 것조차 버거운 날들이 계속되자, 나는 이대로 가다가는 암이라도 걸리겠구나 싶어 이직 자리도 구하지 않은 채 무작정 퇴사하게 되었다.



상사는 한 달만이라도 더 일해주면 안 되겠냐며 여러 차례 회유했지만, 나는 단 하루라도 더 나가고 싶지 않아서 단칼에 거절했다. 그 상사가 내가 아픈 데 적지 않은 몫을 차지했으리라. 그날도 어김없이 집에 와서 앓아누었다.



그런데 웬걸, 마지막 출근으로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온 바로 그다음 날부터 거짓말같이 몸이 가벼운 게 아니겠는가. 아, 이게 말로만 듣던 마음의 병이었구나 싶었다.



이런 경험을 해보니 더 이상 나에게 직장의 이름값이나, 번듯한 근무지 위치 같은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정신적으로 건강할 수 있는 편한 일상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학교를 졸업한 지 1년 만에 다시 취업 준비생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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