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어를 새로 보다: 랑그의 진화

Mamihlapinatapai를 아시나요?

by N의 시선

작년 즈음인가,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재미있는 게시글 하나를 발견했다. 세상에서 가장 뜻이 길고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Mamihlapinatapai’에 관한 이야기였다. 칠레 남부의 한 원주민 언어에서 쓰이는 이 단어는 ‘서로에게 필요하지만 내가 먼저 하고 싶지 않은 어떠한 것에 대하여 상대방이 먼저 해주기를 바라는, 두 사람 사이에서 조용하고도 긴급하게 오가는 눈빛’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 눈에 보아도 아주 복잡미묘한 의미를 가진 이 단어를 과연 우리나라 말로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찰나, 가장 많은 공감을 받은 댓글을 보고 피식 웃음이 터졌다. 댓글은 딱 한마디였다. ‘조장 하실 분?’

Mamihlapinatapai 수싸움에서 지면 조장을 해야 한다. (사진출처: MBC 무한도전)

위 댓글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길고 난해한 사전적 정의와 대비되는 간결한 표현, 그리고 무엇보다 학창시절 조별과제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장하실 분?’ 직후에 펼쳐지는 광경이 바로 ‘Mamihlapinatapai’의 그것임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는 문화적 공감대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전혀 쓸 일 없어보이던 먼 나라의 낯선 단어가 일순간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지고, 우리나라 언어에는 이런 뜻을 가진 단어가 없다는 사실이 아쉽기까지 하다.

이 시점에서 문득, 조금은 당돌한 생각이 하나 떠오른다. ‘내가 직접 단어를 만들면 되지 않을까?’ 사실 이 발상은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이미 이러한 착상에서 출발한 신조어가 즐비하다. 정신적으로 강한 충격을 받은 상태임을 의미하는 ‘멘붕’, 굉장히 재미있다는 의미의 ‘꿀잼’, 개인 혹은 단체의 전성기를 의미하는 ‘리즈’ 등이 그 예시이다. 신조어들의 어원 또한 천차만별이다. 복합어나 문장을 줄임말로 바꾼 경우, 특정 사건이나 인물로부터 발생하는 경우, 심지어 귀엽다의 동의어인 ‘커엽다’와 같이 한글의 형태를 미묘하게 바꾸어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로를 통해 만들어지든 요즈음 우리 사회는 수많은 신조어를 생산하고, 또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인싸'가 무슨 신조어인지 모르는 사람은 인싸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중고등학생 시절 국어 수업을 돌이켜 보면, 현재 국어는 아주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주로 젊은 세대에서 나타나는 신조어 남용 현상이 우리나라 고유의 문법과 어휘 체계를 교란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치 암호를 쓰듯 자신들만 이해할 수 있는 어휘를 사용하는 경우, 그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소외감과 혼란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두 번째 지적은 일견 타당하다. 언어는 타인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도구이기에, 언어의 사회성보다 오히려 배타성이 강조되는 은어를 사용하는 것은 언어의 본질을 해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첫 번째 지적은 한가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말 고유의 체계를 보호해야 한다는 말은, 언어체계란 가능한 한 변함없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왜?

정작 국어교과서가 한글파괴의 희생양이 되곤 한다. (사진출처: 구글)

‘변하지 않는 언어체계’라는 표현은 저명한 언어학자 소쉬르를 연상케 한다. 소쉬르는 언어를 랑그와 파롤이라는 두가지 개념으로 분류하였다. 이 중 랑그는 구조와 체계로서의 언어를 가리킨다. 따라서 랑그는 언어의 규범이자 불변하는 공리이다. 반면 파롤은 개개인이 직접 쓰고 말하는 현실로서의 언어를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상황인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같은 언어라도 다른 형태를 가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랑그와 파롤의 관계이다. 둘의 관계는 마치 뿌리와 나무의 관계와 같다. 파롤은 랑그가 먼저 존재해야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언어구조에 속하지 않는 발화라면, 그것은 단순 소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파롤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랑그라는 규범에 순응해야 한다. 이 때 ‘순응’이라 함은, 우리가 랑그를 주체적으로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살아있는 개를 관찰하는 것만으로 이 생물이 ‘개’라는 명칭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없다. 개가 '개'인 이유는, 그냥 그렇게 사회적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랑그를 이루는 언어적 문양('기표')과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기의')은 서로 임의로 결합되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제공된다. 대신 개개인에게 허용되는 것은 파롤의 변화이다. 그래서 [개]를 나긋나긋하게 발음하든, 3옥타브 도로 내지르든 한국어 랑그를 공유하는 사람은 그것을 '개'로 알아들을 수 있다.

언어를 랑그(langue)와 파롤(parole)로 구조화한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 (사진출처: 위키백과)


언어 내부에 불변하는 알맹이가 있다는 소쉬르의 사상은, 얼핏 보면 우리나라 고유의 언어체계를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듯하다. 그런데 뭔가 꺼림칙하다. 만약 랑그가 언제까지나 변화하지 않는 체계라면, 지금 우리에게 내장된 랑그는 도대체 누가 만들었다는 말인가? 또 시대가 변화하면 기존에 없었던 개념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 개념은 랑그에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의미인가? 이 의문을 해결하려면 소쉬르의 사상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엄밀하게 말하여 소쉬르는 랑그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불변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그는 언어를 분석할 때에 시간의 흐름을 잠시 정지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래야만 체계로서의 언어를 훨씬 엄밀하게 분석하고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는 언어학자의 입장에서 더 합리적인 관점을 제시하였을 뿐, '랑그'라는 명목으로 언어의 변화를 최대한 지양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이쯤 되니 아무래도 기존 우리말이 갖는 고유한 가치를 근거로 신조어의 발생을 비판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오히려 도태되는 것이 두려워 기성 언어가 부리는 텃세로 비치기도 한다. 그렇다면 신조어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는 한 가지, 은어로의 전락 가능성밖에 없다. 몇몇 소수의 사람들만 공유하는 랑그에서나 의미가 받아들여지고, 그 밖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한 파롤로 들린다면 그것은 진정한 언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신조어가 사회 전반에 녹아들어 대중의 랑그 안에 자리를 잡을 때, 그단어는 어엿한 우리말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탄생한 새로운 언어는 기존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던 대상을 세상 밖에 드러내기도 한다. 랑그를 거대한 언어의 그물에 비유하자면, 신조어라는 새 그물코를 뜨는 일은 이 그물망을 더 촘촘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촘촘한 언어의 그물은 우리가 놓쳤던 개념과 감정을 상념의 바다로부터 현실의 뭍으로 끌어올려준다. (사진 출처: 에듀넷)

'Mamihlapinatapai‘는 우리 한국인의 랑그가 미처 뜨지 못한 그물코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아직 조별 활동 첫모임에서 벌어지는 긴급한 눈빛 교환을 콕 집어 표현할 방법이 없다. 물론 이러한 단어를 만들어 우리말의 랑그 안에 편입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했거나, 몇몇 아는 사이에서만 쓰이는 은어에 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새 단어를 만드는 일을 막아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비록 처음 언어를 배울 때의 우리는 일방적으로 국어체계를 수용해야 했지만, 오직 우리 한국인만이 그것을 확장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 있으니까. 언젠가 'Mamihlapinatapai‘가 산뜻하게 번역되어, 조장을 뽑는 어느 모임의 긴장감 속에서 재치있게 분위기를 풀어주는 단어가 되어 있기를 기대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불안을 새로 보다: 불안이 우리에게 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