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새로 보다: 불안이 우리에게 주는 것

구병모 장편소설 <위저드 베이커리>에 담긴 불안의 미학

by N의 시선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삶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이 문장만큼 적절한 게 있을까. 탄생과 죽음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 그래서 별안간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은 출생의 순간부터 “죽기에 충분할 만큼 늙어 있”다. 그러나 선택한 적 없는 탄생과 죽음 사이에는 오직 선택지만 그득하다. 손짓 한 번, 발걸음 한 발짝조차 수많은 행동양식 중에서 스스로 선택한 한가지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하루에 수천 번도 더 갈림길을 맞닥뜨리고 있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갈림길이라고 해서 다 같은 갈림길이 아니다. 예를 들어 눈앞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빵을 두고 살까 말까 서성일 때, 우리 앞에 펼쳐진 두 길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냥 돌아섰다가 아쉬워지면 언제든 다시 빵집을 찾아오면 되고, 먹고 나서 살찌는 게 걱정될 때는 저녁을 간단히 떼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밤을 지새우는 상황에는 선택의 무게감이 사뭇 다르다. 고백하고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 이후의 서먹한 마주침, 고백하지 않았을 때 찾아올 아쉬움의 나날들…. 수많은 시나리오가 머리에 차곡차곡 쌓여감에 따라 우리는 현기증이 나도록 그 무게에 짓눌린다.

빨간약을 먹을지, 파란약을 먹을지 선택할 때의 중압감은 약효가 무엇이느냐에 달려 있다. (사진 출처: 영화 '매트릭스')

‘빵 구매하기’와 ‘고백하기’가 우리 마음에 지우는 무게감이 이토록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첫째, 정보량의 차이이다. 우리는 빵의 가격이 얼마이고 어떤 맛인지, 무슨 재료를 썼는지에 관해 쉽게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운이 좋아서 몇 가지 긍정적인 징후를 발견하더라도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고백해서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알 수 없다. 요컨대 선택의 무게는 대상에 관한 나의 무지함과 비례한다.

둘째, 회복가능성의 차이이다. 빵은 몇 시간이면 소화되고, 언제든 다시 구입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한 고백의 역사는 영구박제 된다. 몇 시간, 며칠 만에 잊을 수 있는 기억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공할 확신이 없어서든,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는 두려움 때문이든, 고백이라는 갈림길에서 어느 때보다도 불안감을 느낀다. 고백하기가 마치 빵 고르기와 같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섣부른 고백은 유통기한 지난 빵보다 고통스러운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사진출처 Facebook)

소설 『위저드 베이커리』의 마법사 점장은 바로 이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제품들을 판매한다. 그가 손수 ‘마력’을 첨가하여 만드는 제과들은 손님들로 하여금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에서 문자 그대로 ‘빵 고르듯’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고 싶은데 확신이 없는 사람이라면 ‘위저드베이커리닷컴’에서 ‘체인 월넛 프레첼’을 구입하면 된다. 이 프레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먹이기만 하면 최소 48시간동안 그(녀)는 구매자에게 지극히 호감을 느낀다. 미처 이 제품을 사용하지 못하고 거절당한 사람을 위한 제품도 있다. ‘브로큰 하트 파인애플 마들렌’을 먹으면, 실연의 아픔을 깨끗이 씻어낼 수 있다. 심지어 시간을 되돌려 후회되는 선택을 물릴 수 있는 ‘타임 리와인더 쿠키’도 판매한다. 비록 가격은 천문학적이지만, 이 제품을 사용하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시간의 편도성을 무력화할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선택의 불안감을 없애주는 위저드 베이커리 상품들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아마도 이 소설은 판타지 요소를 이용해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해주는 힐링물이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솟는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 내려갈수록 처음의 기대는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그 서막이 바로 ‘위저드베이커리닷컴’ 가입 주의사항이다.

“모든 마법은 자기에게 그 대가가 돌아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자신의 행위로 인한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는 분만 가입하시기 바랍니다.”

마법의 영험한 능력을 기대하며 찾아왔을 방문자들(혹은 독자들)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주의사항이다. 구매자가 희망하는 결과를 보장해주는 대신 아무도 보장해주지 않는 제3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니? 여기서 빵을 사는 이유가 무색해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손님들은 이 주의사항을 무시한 채 제품을 구입한다. 그리고 끔찍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짝사랑하던 남자에게 체인 월넛 프레첼을 선물한 여자는 그 남자의 집착과 스토커질로부터 도망치다가 전신화상을 입는다. 또, 무적의 마법쿠키인 줄로만 알았던 타임 리와인더는 사실 구매자의 기억까지 과거로 되돌리기 때문에 선택의 순간이 그대로 반복될 확률이 높다는 게 점장의 설명이다. 예상치 못한 비극에 충격을 받은 구매자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점장을 찾아오지만, 그럴 때마다 점장은 주의사항을 무시한 그들의 안일함에 분노하며 매몰차게 도움 요청을 거절한다.

'위저드 베이커리'의 마법제품이 불러오는 결과는 제비뽑기만큼이나 무작위적으로 나타난다.

이쯤 되면 마법의 빵을 굽는 점장의 의도가 의심스러워진다. 혹시 점장은 평범한 인간을 가지고 노는 흑마법사가 아닐까? 하지만 그가 그럴 위인은 아니라는 게 주인공을 대하는 태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인공은 이복동생 딸만 챙기는 계모로부터 몇 년 째 정신적으로 학대받던 고등학생이다. 급기야 새엄마는 주인공이 이복 여동생을 성추행했다며 경찰에 신고하려 했고, 무고함을 호소할 겨를도 없이 혼란에 빠진 주인공은 집을 도망쳐 나왔다. 그렇게 무작정 베이커리로 쳐들어온 그를 점장은 아무 조건 없이 맞아주었다. 심지어 본인의 침대를 내어주고, 편하게 잠들 수 있는 마법약을 제공해 주었다. 이토록 인정 넘치는 그라면, 매일 새벽 마법의 빵을 구워 인간에게 제공하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눈치 챌 수 있다. 그는 마법사로서 인간에게 조금 더 많은 기회와 선택지를 제공해주어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비록 말투나 행동이 까칠한 면모가 있지만, 그는 놀라우리만치 순수한 '츤데레' 인본주의자인 것이다.

마법의 빵으로 인해 소비자가 겪는 사고는, 안타깝게도 점장이 컨트롤할 수 없는 세계의 법칙이다. 심지어 점장 본인도 마법으로부터 말미암은 나비효과로 큰 대가를 치른 경험이 있다. 과거에 그는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알아보려는 유혹에 못 이겨 갓 죽은 걸인을 되살리는 마법을 썼다. 그의 선택은 걸인이 세 사람을 살해하고 다시 자살해버리는 비극을 초래했다. 결국 마법사 점장도, 위저드베이커리의 손님들도 모두 ‘결과 불확실성의 법칙’에서 자유롭지 않다. 점장이 내건 주의사항은 그 법칙을 손님들에게 당부할 뿐이다. 화려한 판타지 설정 속에서도 현실과 다를 바 없이 나약하게 덜덜 떠는 등장인물들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이 소설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왜 불안에 시달려야 하는가?

불안감은 대표적인 부정적 감정으로 꼽히며, 심한 경우 질병으로 분류되는 감정이다. (출처: 아산병원 홈페이지)

이 질문은 많은 철학자들의 사유 주제였으며, 그만큼 다양한 견해가 알려져 있다. 그 중 대표주자로 꼽히는 하이데거는 ‘죽음을 인식할 때 인간은 불안해진다’고 설명한다. 죽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운명이지만 그 누구도 죽음을 대리할 수 없다. 나의 죽음은 오직 나로부터만 가능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타인을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가늠한다. 따라서 항상 시선이 타인을 향해 있던 우리가 처음으로 온전한 ‘나’의 죽음을 마주하는 일은 낯설고 어색하여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커는 불안의 기원을 인간의 죽음에서 찾는다.

또 한 명의 대표주자 라깡은 ‘어머니와의 분리’에서 불안의 기원을 찾는다.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혹은 24시간 자신만 바라보며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어머니의 품에서 완전한 충만감을 느끼던 신생아는 어느덧 세상의 풍파에 내던져지게 된다. 어머니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나의 욕구를 알아서 해결해주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구체적으로 그들에게 요구해야만 하며, 심지어 다 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다른 사람이 무엇을 욕구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들이 요구를 통해 무엇을 원하는지 드러낸다 한들, 실제 욕구의 일부분일 뿐이다. 즉, 어머니와 분리된 이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완전히 이해받지 못하고, 타인은 우리에게 완전히 이해받지 못한다. 이러한 타인과의 불완전한 연결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라캉은 프로이트의 사상을 계승하여 불안의 기원을 인간의 탄생에서 찾는다.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소개되는 불안의 사연들은 대부분 타인에 관한 무지함에서 비롯되므로, 하이데거의 사상보다 라깡의 사상과 더 유사하다. 하지만 두 사상을 모두 수용함으로써 이 소설이 불러일으킨 의문이 좀 더 명확하게 해결된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죽음(D, death)에서, 라깡은 인간의 출생(B, birth)에서 불안의 원인을 찾고 있다. 즉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이 탄생(B)과 죽음(D) 사이에 존재하는 한 불안은 숙명과 같이 찾아온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불안하다. 이것은 저주일까?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든다. 불안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끔찍한 저주가 아닌가? 불안감은 지성과 사고력의 대가로 우리 인간이 짊어져야 할 숙명적인 부작용은 아닐까? 다시 한 번 철학자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보자. 하이데거는 타인의 지배를 받는 대다수의 삶을 ‘퇴락한 삶’이라고 표현하며, 죽음을 직시할 때 찾아오는 불안이 우리가 그러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꾸려가는 열쇠라고 주장했다. 그는 삶의 유한함을 인식하는 데에서 찾아오는 불안감이 우리를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진지한 성찰과 계획으로 인도한다고 말했다. 라깡 또한 불안의 기능을 긍정하는 철학자였다. 그는 불안의 기원이 대상을 불완전하게 이해하는 데에서 출발한다면, 거꾸로 불안을 통해 대상의 어느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탐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불안은 나 자신에 대한 이해와 남에 대한 이해의 첫 단추가 될 수 있다.

비록 두 철학자가 불안을 정의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둘 다 불안의 긍정적인 기능이 삶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주장은 '위저드 베이커리'에서도 유효하다. 소설에서와 같은 ‘결과 불확실성의 법칙’에서 비롯된 불안은 우리가 신중하고 계획적인 자세를 갖추도록 이끌어준다. 그래야만 어떤 결과가 나오든 충격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불안은 우리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계획하도록 끊임없이 독려해준다. 뿐만 아니라 불안에서 말미암은 신중한 태도는 소설에서 점장이 그토록 강조했던 ‘결과에 대한 책임의식’으로 이어진다.

소설 속 인물들을 다시 떠올려보자. 마법제품을 사용할 때 주의사항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쳐온 시련이 본인 책임이라는 생각을 못하여 무작정 점장을 찾아왔다. 그들은 마법의 힘에 의존한 나머지 충분히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법을 사용하더라도 불안의 숙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마법의 빵은 그들의 일상보다 조금 더 톡톡 튀는 요술일 뿐, 어디까지나 현실 안에서 스스로 결정한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스스로 내린 선택으로부터 비롯된 결과가 무엇이든 스스로 책임져 마땅하다.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인식은 불안감을 선사할 것이고, 불안감은 철저한 심사숙고와 대비를 선사할 것이다. 이것이 점장이 ‘홈페이지 가입 주의사항’에서 손님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불안을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선택이 감당할 수 있는 결과로 이어지는지 끊임없이 계측한다.

그럼 마지막으로 남는 의문의 사슬고리 하나. 불안은 누구에게나 있는데, 왜 모든 사람이 불안으로부터 위와 같은 효과를 이끌어내지 못할까? 이것은 불안을 대하는 태도가 좌우한다. 모든 인간은 본원적으로 불안을 품고 살아가지만, 많은 사람들은 차마 그 불안을 끄집어내어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는다. 죽음을 인식할 때 감정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불안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은 애써 그 감정을 떨쳐내려 타인에게 더욱 잠식해 들어간다. 혹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대상 앞에서 느껴지는 불안을 견디지 못하여 그 대상과의 조우를 포기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면 불안이 가져오는 깊은 사유의 장으로 진입할 수 없다. 불안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마주할 때에야 실체로서 현현한다.


다시 고백을 망설이는 누군가의 새벽을 떠올려 보자. 그는 불안에 휩싸인다. 그의 마음은 의심의 여지없이 좋아하는 사람을 향해 있지만, 상대의 마음도 자신을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불안은 어느새 그를 공포로 몰아넣어, 차라리 마음을 접고 돌아서는 게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하지만 포기는 그를 무한한 후회에서 맴돌게 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불안을 손에 꼭 쥐고, 다시 한 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내가 정말 그 사람을 좋아하는가? 그렇다면 이 마음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 나의 고백에 그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거절이라면, 묵묵부답이라면, 승낙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두터운 시나리오 다발을 써내려가며 밤을 지새운다. 마침내 새벽 어스름이 방안을 채울 즈음, 그의 마음에는 어떤 결과든 그것은 자신이 지고 가야 할 몫이라는 오롯한 책임감이 자리한다. 불안의 힘은 이 정도다. 자그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