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라고 쓰기엔 내가 너무 백수 같잖아.
왜 그럴까? W.H.Y. 나는 절대로 놀고 있지 않다. 그런데
"집에서 살림해요"
라고 말하는 게 마치
"저는 집에서 놀고 있어요."
라고 말하는 것 같은 자격지심을 왜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릴 적, 우연히 읽었던 책에 나온 말이 있었다. [살림이스트] 살림+IST를 붙여서 만든 작가님의 말인데 그 말의 울림이 너무도 어여쁘고 뜻도 어여뻐서 참 좋았던 단어였다.
단순히 살림이라는 단어를 보면 집안의 형편이란 말도 있지만 사람을 살린다의 살림도 있다는 그 의미가 너무도 좋았다. 한 집안의 생명들을 보살피고 살리는 일이 살림! 그런 살림을 하는 나는 살림이스트다. 예술을 하는 사람은 아티스트, 과학을 하는 사람은 사이언티스트, 경제하는 사람은 이코노미스트 등등 다 전문지식과 특정한 기술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ist가 붙으니까 나는 살림이스트하려한다.
주부를 살림이스트라는 단어로 바꾸었을 뿐인데 너무 거창해졌나 싶기도 하다. 나는 거창한 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글을 쓰는 이 시간에도 세탁기는 돌아가고 있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글을 쓰다가 다 돌아가면 빨래를 널고 시간을 봐서 밥을 하고 바닥 청소도 해야 한다. 그 뿐이랴. 분리수거도 해야 하고 휴지통도 비워야 한다. 가족들이 입기 좋게 옷도 개어 옷장에 넣어두어야 한다. 간혹 내가 이러려고 공부하고 시집왔나 하다가도 가족들이 환한 웃음에 이러려고 공부하고 시집왔나 하기도 한다.
아직 어린아이를 돌보는 일도 한 생명이 오롯 스스로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살림이겠지. 낳아 멕이고 씻기고 입혀 둔다고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까. 시기가 되면 가르치고 훈육도 하고 아픈지 살뜰히 살피는 일도 하고 있다.
어릴 적엔 내 몸 하나 스스로 간수하기도 버거웠다. 내가 아직 인간이 되지 않아서 인간으로 자라는 나를 보살피기도 바빴을거다. 혼자 일어나 밥 먹고 학교 가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잔다는 것. 삶을 나 혼자 하는 사는 줄 알았던 그런 시기가 있었다. 남들은 다 엄마가 밥을 해준다는데 나는 내가 밥해 먹고 학교 다녔다. 그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각자의 상황에 맞추어 삶을 살아간다는데 나의 삶은 왜 이리 하드코어인지 매일이 서러움과 불만이 가득한 10대였었다. 누군가 날 좀 살뜰히 보살펴 준다면 나는 더 큰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갈 줄 알았던 그런 철부지 시절도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따뜻한 집에서 잠을 잘 수 있는것. 남들 학교 다닐 때 그래도 학교라도 다닐 수 있었던 것마저도 복이었다. 나의 엄마가 나를 살뜰히 살리고 있었음이었다. 주어진 환경을 한탄만 한 게 아니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나를 살리고 있던 엄마가 문득 그립니다.
나중에 나의 아이들이
"엄마, 그때 왜 그것밖에 못해줬어!"
라고 대들 날이 온다면, 나는 슬퍼하지도 노여워하지도 않은 채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아, 나 그래도 생각하고 분노할 줄 아는 인간을 키웠구나. 세상의 풍파에 체념하며 포기하는 루저가 아닌 그래도 화를 낼 줄 아는 이성을 가진 한 생명을 키웠구나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아이에게는 대답을 해 주어야겠지.
"미안, 미안해. 미안, 미안해."
그래도 너는 내가 해온 이 수고로움을 알아줄까?
너희를 위해 엄마는 직장을 포기하고 육아를 선택했단다.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말이지. 그렇다고 너희에게 미안함을 가지라는 소리는 아니야. 너희를 키우는 동안 나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성장을 하고 있으니까. 다만, 너희를 만나기 전의 나는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다면 지금은 나는 너희를 최우선에 두고 모든걸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해.
맛있는 음식을 보면 너희들 입속에 채워 너희의 생명이 자라나길 기도한다는걸.
멋진 옷을 보면 너희가 입고 세상 속으로 당당하게 뛰어들기를 기도한다는걸.
좋은 곳으로 너희 손을 잡고 가면서 너희의 생각이 깊어지길 기도한다는 걸 말이야.
나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주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지만
그렇게 하나의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삶을 살아가는 살림이스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