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힘은 강하고 끈질기다

by 노을 강변에서

지금은 법조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지인의 이야기다.

과거 고시 준비생 시절 낙방을 거듭하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느 날 점집을 찾았는데, 점쟁이가 사주를 묻고 점을 치더니, 앞으로 2년 동안은 무엇을 해도 되는 일이 없고, 3년이 지나야 운세가 트인다고 하면서 그때 출사표를 던지라고 일러주었다.


반신반의하며 점집을 나선 그 친구는 그 일을 까맣게 잊은 채 공부에만 진력했는데, 점쟁이의 말대로 2년 동안 낙방을 거듭하다 3년이 되던 해 합격했다.

그 친구의 말에 따르면 점집을 다녀온 후 2년 동안은 시험장에만 가면 머리가 혼란스럽고 집중이 되지 않았는데, 3년이 되던 해에는 시험을 치르는 내내 신기할 정도로 머리가 맑았고, 더욱 신기한 것은 2차 논문시험을 치를 때 시험 직전 휴식시간에 잠시 보았던 내용이 거의 출제되었다고 했다. 이후 그 친구는 철저한 운명론자가 되었다.




몇 해 전 어느 종편 방송에서 신년 특집으로 ‘사주(四柱)’에 관한 프로그램을 방송했는데, 방송사 PD가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자살한 20대 여성과 노숙자 등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의 사주를 가지고 소문난 점집을 찾아다니며 운세를 묻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신기하게도 점술가 7명 중 6명이 두 사람 사주가 모두 좋지 않다고 했고, 사망한 여성의 경우 죽은 사람의 사주라고 정확히 말한 점술가가 두 명이나 되었으며, 놀랍게도 한 점술가는 이미 죽은 사람이 젊은 여성이라는 것과 순간적 충격으로 죽은 것이라고 정확히 맞추었다. 그리고 노숙자의 사주를 보고는 대부분 점술가가 ‘거지 사주’라고 하여 TV를 보는 사람들에게 운명의 존재를 실감하게 하였다.




흔히 의지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들 하지만,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등통(鄧通)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정해진 운명을 바꾸는 게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촉군(蜀郡) 출신으로 딸만 셋 있는 부유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등통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는 관심이 없고, 강에서 배를 타고 낚시하는 일에만 흥미가 있었다. 자식이 관리가 되기를 바랐던 그의 부친은 말과 수레를 딸려 등통을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보냈는데, 배를 잘 타는 재주가 인정되어 용케도 황실의 선박을 관리하는 황두랑(黃頭郞)이라는 벼슬을 하게 되었다.


당시는 한(漢)나라 5대 황제인 문제(文帝)의 치세로 그는 한나라 전성시대의 토대를 구축한 뛰어난 군주였지만, 불로장생(不老長生)과 승천(昇天)을 꿈꾸는 등 미신(迷信) 신봉자였고, 이런 점은 등통이 벼락출세하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어느 날 문제는 승천하는 꿈을 꾸었는데, 하늘 끝을 앞에 두고 더는 오를 수가 없어 애를 태우던 중 누군가가 뒤에서 밀어주어 겨우 올라갈 수 있었다. 문제는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뒤돌아보니, 뱃사공의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허리 부분의 옷 솔기가 터져 있었다.


꿈에서 깬 문제는 자신의 승천을 도운 사람을 현실에서 찾고 싶었다. 그즈음 왕궁을 산책하다가 미앙궁 서쪽 연못에서 노를 젓는 뱃사공을 보았는데, 놀랍게도 그의 허리 쪽 옷 솔기가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이 터져 있었다. 문제가 그를 불러 이름을 물으니, ‘등통(鄧通)’이라 하였다. 문제는 그의 성(姓)인 ‘등(鄧)’이 ‘등(登:오를 등)’과 동음이고, ‘등통(鄧通)’을 ‘등통(登通)’으로 본다면 ‘위로 올라가는 길과 통한다’는 의미가 되니, 꿈에서 본 인물이 등통이라고 확신했다.


승천하는 꿈을 신선이 되는 것으로 여긴 문제는 등통이 자신을 신선으로 만들 인물이라 믿어 등통에게 상대부(上大夫)의 높은 벼슬을 내리고, 여러 차례 많은 재물을 하사했으며, 등통의 집을 수시로 방문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는 등 재위 기간 내내 등통을 총애하였다. 그러나 문제의 후계자인 태자는 등통을 능력 없이 아부로 자리를 보전하는 형편없는 인물로 여겼는데, 실제 등통은 학식은 말할 것도 없고 사교성조차 없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휴가를 주어도 밖에 나가지 않는 등 부실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등통은 관료의 자질은 없었으나, 자신을 출세시킨 문제에 대한 충성심만은 대단하여 입으로 종기의 고름을 빨아내는 등 문제의 곁에서 정성껏 시중드는 것을 보람으로 여겼다.


하루는 문제가 등통에게 “천하에 누가 나를 가장 사랑하겠느냐”라고 묻자 등통은 “당연히 태자를 따를 수 없지요”라고 대답했다. 문제는 태자의 마음을 시험할 겸 문안 인사를 온 태자에게 종기를 빨라고 시켰고, 태자는 마지못해 종기를 빨았다. 후일 태자는 등통이 종종 황제의 종기를 빤다는 사실을 알고 등통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등통을 지극히 아꼈던 문제는 어느 날 허부(許負)라는 유명한 관상가를 불러 등통의 관상을 보게 했는데, 관상가는 그에게 ‘궁상(窮相)’이 있다면서 반드시 굶어 죽을 것이라 했다. 문제는 “천하가 내 것이고, 내가 등통을 부유하게 할 수 있는데, 등통이 어찌 굶어 죽는단 말인가”라며 등통에게 구리광산을 하사하고, 금속화폐를 주조할 권한을 주었다. ‘등씨전(鄧氏錢)’이라는 한나라 화폐가 이렇게 만들어졌고, 등통은 이를 통해 거부가 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기원전 156년 등통을 알뜰하게 보살펴주던 문제가 세상을 떠나고, 태자였던 경제(景帝)가 즉위했다. 아무런 능력도 없이 문제의 총애를 받으며 자신에게 종기를 빨게 했던 등통을 경제가 그냥 둘리 없었다. 경제는 등통을 즉시 파면하고, 그의 전 재산을 몰수했으며, 불법으로 화폐를 주조했다는 혐의까지 덧붙여 거액의 벌금을 물게 했다. 무일푼이 된 등통은 살던 집에서도 쫓겨나 이리저리 떠돌다 사천성(四川省) 아안(雅安)에서 관상가의 예언대로 굶어 죽었다.




2013년 개봉된 ‘관상(觀相)’이라는 영화에서도 등장한 바 있는 조선 초 관상가 김내경(金乃敬)의 이야기는 운명의 화살을 피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하게 한다.


DVjwH0pvjim.jfif 영화 <관상>에서 점술가 김내경을 연기한 송강호


야사에 따르면 당시 권세가 하늘을 찌르던 한명회(韓明澮)가 하루는 김내경을 불러 자신의 관상을 보게 했는데, 김내경은 “대감은 천하의 복락을 모두 누릴 귀한 상이긴 하나, 종국에 머리와 몸이 분리될 팔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목이 잘린다는 말에 두려움을 느낀 한명회는 그날 이후로 주변에 두루 은혜를 베풀고, 원한 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였는데, 그런 노력 때문인지 딸 둘을 왕비로 만들었고, 본인은 부원군(府院君)이 되어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온갖 영화를 누렸다. 한명회는 죽음을 앞두고 자손들에게 “과거 김내경이 내 관상을 보고 목이 잘릴 팔자라 하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사주니 관상이니 하는 것들은 다 허무맹랑한 것이다. 모든 것은 스스로 어떻게 행하느냐에 달린 것이다”라며 운명을 비웃었다.


그로부터 17년 후 연산군(燕山君)은 생모 윤씨(尹氏)의 죽음에 관여한 사람들을 색출하여 모조리 참살하는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켰는데, 여기에 한명회도 관련자로 지목되었다. 신료들은 한명회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처단이 불가하다며 반대하였으나, “죄를 물음에 생사를 따지느냐”며 불호령이 내리는 연산군의 명에 따라 결국 한명회의 무덤이 파헤쳐졌고, 썩어가는 그의 머리는 으깨어진 채 몸에서 분리되어 저잣거리에 매달리고 말았다.




김내경이 실존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실제 조선 말 관상으로 정치에 관여했던 인물이 있었다. 한동안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책사로 활동했던 관상가 박유붕(朴有鵬)이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박유붕은 경북 청도 사람으로 두씨(杜氏) 가문의 여자와 결혼했는데, 박유붕의 처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참모로 따라왔다가 조선에 눌러앉은 두사충(杜思忠)의 후손이었다. 박유붕은 처가에 대대로 전해오던 두사충의 관상서를 우연히 접하면서 관상을 공부하게 되었고, 노력한 보람이 있어 관상에 일가견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날 서울에 온 박유붕은 흥선군(興宣君)의 거처인 운현궁을 지나던 길에 흥선군의 둘째 아들이 마당에서 놀고 있는 것을 보고는 큰절을 올리며 “상감마마! 문안 인사 올립니다!”라고 외쳤다. 이 광경을 지켜본 흥선군이 박유붕을 가만히 불러 연유를 물으니, “이 댁에 제왕이 기운이 맴돌기에 들어와 살펴보았더니, 아드님이 제왕의 골상을 타고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흥선군이 “그때가 언제인가?”라고 묻자 박유붕이 “4년 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5Jw4EMZ1EB1.jfif 서울 종로구 소재 운현궁


그로부터 정확히 4년이 지난 1863년 철종(哲宗)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고, 박유붕의 말대로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高宗)이다.

박유붕의 예지력에 감복한 흥선대원군은 그에게 45칸의 저택을 지어주고, 수선교에서 돈암동에 이르는 넓은 땅을 하사하며 자신의 책사로 삼았다.


얼마 후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처가인 여흥 민씨 민치록(閔致祿)의 딸 민자영(閔玆暎)을 고종의 중전 후보로 점찍어 두고 박유붕에게 관상을 보게 했는데, 민자영의 관상을 본 박유붕은 그녀가 흥선대원군의 앞길을 막을 것이라며 세 번이나 반대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안동 김씨의 집안에서 중전이 나오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민자영을 선택했고, 왕비가 된 민자영은 박유붕의 예언처럼 흥선대원군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고, 청나라로 압송시키는 일에도 앞장서는 등 정적(政敵)이 되어 죽는 날까지 흥선대원군을 압박했다.


그 외에도 박유붕은 흥선대원군이 고종과 귀인 이씨(李氏) 사이에서 출생한 서장자(庶長子) 완화군(完和君)을 원자(元子)로 삼으려는 것을 완화군의 명이 길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했는데, 실제 완화군은 1880년 13세의 어린 나이에 병을 얻어 요절했다.




운명에 관한 소재에는 풍수지리에 관한 이야기도 빠질 수 없는데,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는 조선 초 상지관(相地官)을 지냈던 풍수가 최양선(崔揚善)의 예언은 신기할 정도이다.


세종(世宗)은 아버지 태종(太宗)의 곁에 묻히고 싶어 했는데, 최양선은 그곳에 왕릉을 쓰면 맏아들을 잃게 된다며 반대했다. 수양대군이 최양선을 비판하면서 반박하는 바람에 결국 그곳에 세종의 왕릉을 썼는데, 과연 최양선의 말대로 세종의 장남 문종(文宗)이 즉위한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장남 단종(端宗) 또한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며, 세조의 장남도 태어난 지 3년 만에 병으로 죽고, 세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예종(睿宗)의 장남도 일찍 죽었다.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仁祖)도 풍수와 관련된 인물 중 하나이다. 능양군(綾陽君)은 1595년(선조 28년) 선조(宣祖)의 5남인 정원군(定遠君)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실록에 따르면 능양군이 태어날 때 붉은 광채가 일고, 알 수 없는 향내가 났으며, 특히 오른쪽 넓적다리에 사마귀가 많이 있었는데, 선조가 이를 보고는 “이것은 한고조(漢高祖)와 같은 상(相)이니 절대 누설치 마라”며 정원군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KUD5qZliLCA.jfif 영화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연기한 박해일


의심이 많았던 광해군(光海君)은 이복동생인 정원군을 경계했는데, 그것은 정원군의 어머니인 인빈 김씨(仁嬪 金氏)의 무덤과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는 풍문 때문이었다. 특히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은 인물이 출중하고 총명한 데다 말타기와 활쏘기에도 능해 광해군의 집중 감시를 받았다.


능창군을 제거할 명분을 찾고 있던 광해군에게 때마침 좋은 구실이 저절로 찾아들었다. 황해도 수안군수 신경희(申景禧) 등이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내용의 역모 고변이었다.


1615년(광해군 7년) 8월 광해군은 친히 국문을 열어 능창군의 죄를 따진 후 강화도로 유배 보내 죽게 하였으며, 왕기를 제압하기 위해 정원군의 집을 빼앗아 경덕궁(현재의 경희궁)을 지었다.


아들을 잃은 정원군은 화병을 얻어 술로 살다시피 하다 39세에 죽었는데,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그는 평소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히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죽어 지하의 선왕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원군이 죽은 후에도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광해군은 후손들이 정원군의 무덤 터를 제대로 고르지 못하도록 장례 기간을 단축할 것을 재촉하였고, 심지어 조문객을 감시하기도 했다.


동생의 억울한 죽음과 아버지의 집이 이유 없이 몰수당하는 것을 보면서 능양군은 광해군에게 적개심을 품었고, 아버지마저 이른 나이에 화병으로 죽자 아버지 빈소에서 곡을 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기회를 엿보던 능양군은 1623년 4월 12일 새벽 김류(金瑬)・이귀(李貴)・이괄(李适)・최명길(崔鳴吉) 등과 함께 반정군을 이끌고 어떤 제지도 없이 창의문(彰義門)을 통과하여 궁궐을 장악했고, 급히 궁궐을 빠져나와 의관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피신해있던 광해군은 밀고를 받아 이내 체포되었다.


이어 능양군이 서궁(西宮)에 유폐 중인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 반정의 명분을 밝히고 옥쇄를 바치니, 인목대비는 즉시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을 즉위시켰다.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이다.


광해군은 능창군을 제거하고 정원군의 집터를 빼앗는 것으로 왕기를 제압했다 여겼지만, 진정 왕기를 내뿜고 있었던 인물은 능창군이 아니라, 능양군이었음을 옥좌에서 밀려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용장(勇將)은 지장(智將)을 이기지 못하고, 지장(智將)은 덕장(德將)을 이기지 못하며, 덕장(德將)은 복장(福將)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용맹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운이 따르는 사람을 당할 수 없다는 말이니, 도무지 운명의 힘을 이길 수 있는 게 있기나 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삼국지(三國志)』에는 수많은 영웅이 등장하지만, 후반부를 장식하는 주요 인물은 단연 제갈량(諸葛亮)과 사마의(司馬懿)이다. 제갈량은 촉(蜀)나라의 승상으로, 사마의는 위(魏)나라의 대장군으로 중원의 패권을 두고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는데, 그중 압권은 ‘호로곡(葫蘆谷) 전투’였다.


LQJ5GDwvtxR.jfif 중국 드라마 <신 삼국지>에서 제갈량을 연기한 루이


제갈량은 호로곡이라는 계곡에 군량을 쌓아두고 사마의를 그곳으로 유인하여 위나라 군대를 일거에 섬멸하고자 했다. 제갈량의 지시에 따라 촉의 장수 위연(魏延)은 의도적인 후퇴를 거듭하며 위나라 군사를 계곡으로 끌어들였고, 대기하고 있던 궁수들이 불화살을 소나기처럼 퍼부어 호로곡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사마의는 궁여지책으로 구덩이를 파고 불덩이를 피하고자 했으나, 화염으로 인한 지열로 잠시도 견딜 수 없었다. 제갈량은 사마의의 최후를 예견하며 승리를 확신했으나, 갑자기 큰 비가 쏟아지면서 불길이 꺼져 화공은 실패로 돌아가고, 사마의는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무사히 호로곡을 빠져나왔다.


이를 지켜보던 제갈량은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며 탄식을 한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나, 일을 성사시키는 것은 하늘이란 뜻이다. 이렇게 살아난 사마의는 후일 조조(曹操)가 세운 위(魏)나라를 무너뜨리고, 그 자손들은 진(晉)을 건국하여 삼국을 통일한다.


하늘이 큰 인물을 내면 그 쓰임이 다할 때까지 보살핌을 멈추지 않는다고 한다. 천하 기재(奇才)라는 제갈량조차도 후일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룰 사마의 가문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다.




세상에는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지만, 종교가 지배했던 봉건시대를 한참이나 벗어난 20세기 중반에 주술적 논리로서만 설명될 수 있는 불가사의한 일이 있었다.


1941년 소련의 절대 독재자 스탈린은 소련 사회주의 이념을 선전하기 위해 500년이 넘은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그 무덤의 주인은 14세기 초반부터 16세기 초까지 중앙아시아를 포함하여 유럽·아프리카·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티무르 제국의 왕 아미르 티무르였다.


8g2xIPn7ELC.jfif 스탈린


수많은 정복 전쟁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전설의 왕 티무르의 정기를 받고 싶었던 스탈린은 자신을 티무르의 화신으로 여기고 싶어 했는데, 그것은 티무르가 자신과 비슷한 신체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스탈린은 한쪽 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다리를 절었는데, 티무르 역시 한쪽 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절름발이였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1941년 6월 19일 러시아 인류학자 미하일 그라시모프를 책임자로 하는 발굴팀이 티무르의 무덤 앞에 섰을 때 한 노인이 그들에게 다가와 왕의 무덤을 열면 커다란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하면서 발굴을 만류했다. 발굴팀은 잠시 당황했지만, 노인의 경고를 무시한 채 무덤을 파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관을 발견했는데, 관뚜껑에 다음과 같은 문장에 새겨있었다. “누구든지 감히 내 무덤을 건드리면 전쟁의 악마가 그 나라에 닥칠 것이다”


발굴팀은 섬뜩한 느낌이 들긴 했으나, 관을 열었고, 유골의 다리에 변형 흔적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가 티무르왕이라고 확신했다. 유골은 모스크바로 향했고, 스탈린은 흡족해하면서 티무르 왕의 흉상을 제작하여 전시하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무덤을 파헤친 지 3일 후 불과 2년 전에 상호 불가침조약을 맺었던 독일이 약속을 깨고 압도적 병력으로 전격 소련을 침공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체 인명 피해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3,000만 명에 이르는 인명 피해가 발생한 이른바 ‘독소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독일군은 300만 명에 이르는 대병력을 3개 군단으로 나누어 우크라이나·레닌그라드·스탈린그라드를 향해 진격했고, 불과 4개월 만에 소련의 남부지방 대부분이 점령되었으며, 70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급기야 스탈린의 참모들이 티무르왕의 저주를 말하기 시작했고, 스탈린도 이를 의식했던지 발굴팀에게 유골의 원상복구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티무르의 유골은 1년 만에 다시 관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때 스탈린은 공산주의에서 금기시되는 이슬람식 의식을 허용했으며, 1개 사단이 한 달간 입고 먹는 비용인 100만 루블을 무덤 복원에 사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 누구도 티무르의 관을 열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때를 기점으로 전황이 소련에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을 패퇴시키면서 전쟁 판도를 완전히 바꾸었으며, 이후 독일이 항복할 때까지 승리를 이어갔다.




운명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한 일은 운동경기에서도 있었다. 2002년 동계올림픽에서 호주 동계올림픽 역사상 최초 금메달을 딴 쇼트트랙 선수 브레드버리 이야기이다.


브레드버리는 과거 동계올림픽 단체경기에서 동메달을 딴 적은 있었으나, 개인종목에서는 단 한 번도 메달을 딴 적이 없었고, 메달이 기대되는 선수도 아니었다. 그랬던 브레드버리에게 2002년 솔트레이크 시티 동계올림픽은 그의 인생에 다시는 올 수 없는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이 대회에 호주 쇼트트랙 대표선수로 출전한 브레드버리는 2위 안에 들어야 본선 경기 출전권이 주어지는 조별 예선에서 3위로 골인하여 탈락하였으나, 앞서 골인한 선수 중 한 명이 부정행위로 실격되면서 자동으로 2위가 되어 준결승에 진출했다.


운 좋게 준결승에 진출하긴 했으나, 그와 경기를 치르는 선수들은 월등한 실력자들이어서 브레드버리의 탈락이 예상되었고, 예상대로 그는 최하위로 골인하였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출전한 5명 중 앞선 세 명 의 선수들이 모두 넘어지면서 꼴찌가 되고서도 조2위로 결승전에 진출한 것이다.


겹친 행운으로 브레드버리가 결승전에 진출하긴 했으나, 누구도 그런 행운이 세 번이나 연속적으로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열린 결승전에서 놀랍게도 앞선 경기와 똑같은 상황이 재연되었다. 5명이 출전한 결승전에서 상당한 거리로 앞서가던 4명의 선수가 모두 넘어지면서 브레드버리가 금메달의 행운을 얻게 된 것이다.


다운로드 (5).jfif 앞서가던 선수들이 모두 넘어지면서 운좋게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브레드 버리


브레드버리는 올림픽 역사상 가장 운 좋게 금메달을 딴 선수로 기억되고 있지만, 어쩌면 그 금메달은 오래전부터 그의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브레드버리의 사례가 희귀한 것은 사실이지만, 스포츠에 운이 상당히 작용한다는 엄연한 통계자료가 있다. 월가의 투자전략가이자 컬럼비아대 겸임교수인 마이클 모부신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농구(미국 프로농구)는 88%가 실력에 의해 결정되는 반면, 축구(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31%, 야구(미국 메이저리그)는 34%, 아이스하키(북미 아이스하키리그)는 53%가 운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운명의 힘이 이토록 질기고 강한데, 어찌 의지와 노력으로 운명을 이길 수 있다고 쉽게 단언할 수 있겠는가. 의지와 노력으로 미래를 만들어 가겠다는 각오는 분명히 필요하지만, 인생의 많은 부분이 정해진 운명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만큼은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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