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을 가벼이 말라. 여기에서 인생 판도가 결정된다

by 노을 강변에서

삶의 과정에는 수많은 경우의 수가 개입되고 그것들이 서로 조합을 이루어 다양한 결과를 만들어내지만, 가장 결정적 변수는 ‘만남’이다. 인생의 토양을 기름지게 하려면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게 중요하고, 그중에서도 좋은 윗사람을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좌전(左傳)』에 ‘양금택목(良禽擇木)’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 새는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튼다는 뜻으로 자기 재능을 잘 지원해 줄 사람을 가려서 섬겨야 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조선왕조 오백 년 역사에서 두 번의 ‘반정(反正)’이 있었음에도 왕이 살해되지는 않았으나, 해방 이후 길지 않은 현대 정치사에서 현직 대통령이 부하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40분 청와대 근처 궁정동 안가에서 만찬 중이던 대통령을 중앙정보부장이 권총으로 시해한 이른바 ‘10・26 사태’가 그것이다.


이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在奎)를 비롯한 가담자 여러 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교수형 또는 총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들 가담자는 모두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엄격한 상명하복의 질서가 지배하는 조직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참여한 터라 동정적인 부분이 있었는데, 특히 김재규의 수행 비서였던 박흥주(朴興株) 대령은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군인으로 많은 이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다운로드 (3).jfif 생도 시절의 박흥주


박흥주는 1939년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나 6세 때 서울로 이주하였으며, 당시 명문고로 알려진 서울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집안이 워낙 가난하여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학비 걱정이 없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62년 육사 18기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초기부터 기량이 출중하여 동기들보다 승진이 월등히 빨랐고, 타고난 성실성과 뛰어난 역량은 상급자들의 총애로 이어졌으며, 그런 이유로 제6사단장 전속부관이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의 인생을 완벽한 파국으로 몰고 갈 치명적 인연 김재규 사단장을 만나게 된다.


김재규는 박흥주를 보자마자 인간적으로 매료되었고, 박흥주는 김재규의 심복이 되었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의 끈은 보직 이동으로 두 사람이 헤어진 이후에도 끊어지지 않고 있다가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된 김재규가 그를 수행비서관으로 발탁하면서 운명공동체가 되었다.


10월 26일 저녁 어떤 사전 계획도 없이 사건 발생 40분 전에 김재규로부터 대통령 경호원을 사살하라는 명을 받은 박흥주는 군인으로서의 국가적 충성과 자신을 아껴주는 상사에 대한 인간적 충성 사이에서 고민하다 후자를 선택했다.


다운로드 (4).jfif 박흥주 대령의 가족들이 "박흥주 우리 아빠 살려주세요"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박흥주 대령의 구명을 호소하고 있는 모습


김재규는 최후변론에서 상사의 명령에 기계적으로 따랐을 뿐인 박흥주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요청했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도 “박흥주 우리 아빠 살려주세요”라고 쓴 플래카드를 나누어 들고, 언론에 등장하여 눈물로 호소했으나, 박흥주는 앞길이 창창한 41세의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박흥주는 장래의 육군 참모총장감이라고 평가될 정도로 역량이 출중했고, 국가 최고 권부인 중앙정보부의 요직에 있으면서도 성동구 행당동 산동네의 판잣집에 살고 있을 정도로 청렴했다. 그의 꼿꼿했던 성정에 대해서도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사형을 집행하는 병사들이 총살대에 묶인 그에게 눈가리개를 씌우려 하자 당당하게 하늘을 보며 죽겠다고 호통치면서 거부하였고, 발포 직전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육군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김재규의 부름을 받고 위세 높은 중앙정보부로 입성하면서 그는 본격적인 출세의 길이 열렸다고 여겼을 테지만, 그것은 지옥문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어쩌다 맺어진 인연이 원인이 되어 일생을 망친 인물들도 많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초한지(楚漢志)』에 등장하는 다음 인물들은 사람 하나 잘 만나서 자신은 물론 자손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한(漢)나라의 개국공신이자 유방(劉邦)의 참모였던 소하(蕭何)・번쾌(樊噲)・하후영(夏侯嬰)・주발(周勃)・노관(盧綰) 등은 모두 패현(沛縣)이라는 조그만 마을에 살던 미천한 출신의 인물들이었으나, 유방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만나 모두 영웅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후일 하나같이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되었다.


소하는 관청의 말단 관리였다. 그는 유방이 마을에서 행패를 부리거나 위법행위를 저지를 때에도 그의 편에 서서 도왔고, 돌아올 기약 없이 함양으로 부역을 떠나는 유방에게 후한 전별금을 주면서 인정을 베풀었으며, 초한전(楚漢戰) 때에는 후방에서 병참을 맡아 유방이 항우와 전투를 치르는 동안 군사들이 보급 걱정 없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개국 후 유방이 최고의 공신으로 인정하며 우대하였고, 관리 중 으뜸인 상국(相國)에 봉해졌다.


번쾌는 개고기를 파는 백정으로 유방의 친구이며 동서지간이었다. 유방이 거병하자 그를 따라 무장으로 용맹을 떨쳤고, 전투를 치를 때면 가장 먼저 성에 올라 용맹하게 싸웠으며, ‘홍문의 회(鴻門之會)’에서 목숨이 경각에 놓인 유방을 결사적으로 호위하였다. 개국 후 좌승상에 올랐으며, 무양후(舞陽侯)에 봉해졌다.


하후영은 어릴 때부터 유방과 친구였으며, 관청의 마부였다. 한번은 유방과 칼로 장난을 치다 상처를 입게 되어 유방이 상해죄로 처벌받게 되었는데, 유방이 저지른 짓이 아니라고 증언하여 유방을 보호했으며, 이후 거짓 증언의 죄로 옥에 갇히기도 했다. 기마술이 뛰어나 전차를 몰며 많은 활약을 하였고, 궁지에 몰린 유방을 여러 번 구출했다. 개국 후 여음후(汝陰侯)에 봉해졌다.


주발은 누에를 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이었다. 남의 집 초상이 나면 피리를 불어 위로하곤 했으며, 얼마나 재능이 없었던지 사마천은 그를 “비루하고 소박한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유방이 거병할 때부터 따라다니며 여러 전투에 참여한 공으로 개국 후 강후(絳侯)에 봉해졌으며, 후일 ‘여씨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승상(丞相)에 올랐다.


노관은 유방과 같은 동네에서 같은 날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낸 죽마고우였다. 유방이 황제에 이를 때까지 붙어 지내다시피 하였으며, 유방의 막사를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들락거리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공로로 따지자면 공신들의 말석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보잘것없었으나, 유방은 노관을 각별하게 아껴 다른 패현 출신들은 후(侯)에 봉하는 데 그쳤으나, 오직 노관만은 왕으로 삼았다.


『사기(史記)』에 ‘창승부기미이치천리(蒼蠅附驥尾而致千里)’라는 말이 있다. 쉬파리도 준마의 꼬리에 붙어 가면 천 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하찮은 인물이 영웅을 만나 몸이 귀하게 됨을 비유하는 말이다.


사마천은 패현 출신의 별스럽지 않은 인물들이 하나같이 작게는 제후가 되고 크게는 왕이 된 것은 단 하나의 이유, 유방이라는 준걸과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단지 누군가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인생의 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니, 만나고 헤어짐을 가벼이 여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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