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옛말이 있다. 시작이 좋아야 나중도 좋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시작이 지나치게 아름다우면 오히려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마라톤에서 처음부터 속도를 내어 선두로 나서는 선수치고 마지막까지 그 순위를 지키는 경우가 드물고, 신동(神童)으로 알려진 사람치고 크게 이름을 떨치는 경우가 드문 것을 보면 시작과 나중은 별개라는 생각마저 든다.
항간에 회자 되는 세대별 고달픈 인생의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소년출세(小年出世)・중년상처(中年喪妻)・노년무전(老年無錢)이 그것인데, ‘소년출세’를 고달픈 인생으로 분류한 것을 보면 일찍 출세한 사람치고 잘된 경우가 드물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른 나이에 성공하면 세상이 만만히 보여 교만에 빠지기 쉽고, 그런 교만이 자신을 망치기 때문일 것이다.
소년 출세한 것이 원인이 되어 불운하게 생을 마친 인물들이 우리 역사에서도 적지 않은데, 20대의 새파란 나이에 무관 최고 관직인 병조판서에 오른 남이(南怡)도 그런 인물 중 하나였다.
남이는 1441년(세종 23년) 군수를 지낸 남빈(南份)의 아들로 태어났다. 남이의 고조부는 개국공신이자 영의정을 지낸 남재(南在)였고, 조모는 태종(太宗)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貞善公主)였다.
어릴 때부터 왕족의 예우를 받으며 부족함 없이 자란 남이는 장성하여서는 당대의 권세가인 좌의정 권람(權擥)의 딸을 아내로 맞아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했다.
당시 세조(世祖)는 공신들의 권력이 비대해지는 것을 견제할 목적으로 젊은 종친들을 등용하여 우대했는데, 종친의 신분으로 18세의 어린 나이에 무과에 급제한 남이는 세조의 두터운 신임까지 더해지면서 출세속도가 지나칠 정도로 빨랐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선봉장으로 참전한 남이는 적진에 돌진하여 절륜한 무예로 반란군 수백 명의 목을 베어 반란 평정에 공을 세우고, 북방의 여진족 토벌 때에도 선봉으로 적진 깊숙이 들어가 여진족의 수괴 이만주(李滿住) 부자를 참살하는 등 비교 불가의 공을 세우면서 명실상부 조선 무관의 영웅이 되었으며,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공조판서를 거쳐 27세의 나이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명문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에 더하여 무관의 최고 자리에 오른 남이는 세상에 두려울 게 없었고,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가 지은 ‘북정가(北征歌)’ 중 ‘남아이십미평국 후세수칭대장부(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리오)’라는 구절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신만만하고 호기로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세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으며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는 동안 그를 시기하는 무리 또한 많아졌는데, 병조참지 유자광(柳子光)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1468년(예종 1년) 10월 24일 예종(睿宗)을 알현한 유자광은 남이의 역모를 고변하면서 남이가 궁궐에서 숙직하던 중 혜성이 나타나자 “묵은 것이 없어지고 새것이 나타나려는 징조”라고 말하였다며, 남이의 ‘북정가’를 증거로 바쳤는데, 거기에는 ‘미평국(未平國)’이 ‘미득국(未得國)’으로 고쳐져 있었다.
남이를 즉시 잡아 들이라는 예종의 엄명이 내려지고, 이어 열린 국문(鞫問)에서 모진 고문이 가해졌다. 결백을 호소하며 고문을 참아내던 남이는 정강이뼈가 부러지자 무인으로 말을 탈 수 없게 되었음을 한탄하며 자포자기하여 역모를 꾀했노라 자백하였고, 공모자를 토설하라는 예종의 재촉에 영의정 강순(康純)을 지목했다.
팔십 고령의 강순은 억울했으나, 그 역시 고문을 견디지 못해 자백하고 말았는데, 형장으로 끌려가는 길에 강순이 남이에게 죄 없는 자신을 끌어들인 이유를 묻자 남이는 “나의 죄 없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니, 내가 그리 말한 것이오”라고 했다.
남이는 한강의 새남터에서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받아 죽고, 그의 부인과 첩들도 처형당하거나 노비가 되었으며, 그의 모친조차 아들인 남이와 간통했다는 이상한 죄명으로 처형당했다.
권력자가 눈에 보이게 누군가를 총애하면 그 이유만으로 시기하는 자들에 의해 몸이 위태로운 법인데,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어린 나이에 병조판서에 오른 남이는 위세를 부릴 줄만 알았고, 겸양으로 자신을 지킬 줄은 몰랐다.
조선왕조 역대 군주 중에서도 시작이 지극히 아름다웠던 인물이 있었다. 폭군(暴君) 또는 혼군(昏君)의 대표적 인물로 악명이 높은 조선의 제10대 왕 연산군(燕山君)이다.
연산군은 출생부터가 남달랐다. 조선의 왕 27명 중 적통 장자승계의 원칙에 따라 왕위를 계승한 군주는 문종(文宗)・단종(端宗)・연산군(燕山君)・인종(仁宗)・현종(顯宗)・숙종(肅宗)・경종(景宗) 등 7명이었고, 이들 중에서도 사가(私家)가 아닌 궐내(闕內)에서 출생한 경우는 단종과 연산군 둘뿐이었다.
탄생 때에는 부왕인 성종(成宗)이 종친과 대신들을 입궐시켜 축하연을 성대히 베풀었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려 죄수들을 방면하는 등 나라의 큰 경사로 삼을 정도로 만인의 축복을 받았으며, 세자 시절에도 부왕의 세심한 배려 속에 당대 최고 석학들로부터 격조 높은 제왕 수업을 받았다.
즉위 무렵에는 나라의 기틀이 다져지고, 국제정세 또한 가장 평화로운 시기라서 어려움 없이 국가를 잘 다스릴 수 있는 최적의 정치적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정작 왕이 된 후로는 학문은 물론 개인적 수양을 등한시하였고, 권력을 사사로운 정욕과 개인적 복수심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시켰으며, 일관성 없는 국정 운영은 사림파와 훈구파 어느 쪽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초년기 성장환경과 즉위 당시 통치여건이 지나칠 정도로 좋았던 연산군은 성년 이후 자기 파탄을 가속화 했고, 결국 자신이 가장 총애했던 신하에게 폐위당하여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는 우리 역사상 최악의 군주가 되었다.
중국에서도 재위 초기에는 뛰어난 자질을 보였으나, 이후 40년 동안 국정을 내팽개치고 죽는 날까지 향락에 빠져 지낸 한심한 군주가 있었다. 명(明)나라 제13대 황제 만력제(萬曆帝)이다.
만력제는 비록 10세의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지만, 대학사 장거정(張居正)과 환관 풍보(馮保)의 조력을 받으며 정치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고, 조선의 사신으로 중국에 갔던 조헌(趙憲)도 『조천일기(朝天日記)』에서 만력제를 성군의 조짐이 뚜렷한 훌륭한 군주라고 극찬하였다.
만력제는 장거정과 풍보의 연립내각 구성을 독려하여 관료들과 환관들 간의 고질적 분란을 해소하고, 속도감 있는 개혁을 추진하면서 나라의 융성을 이끌었다.
안으로는 흐트러진 관료의 기강을 바로잡고, 비만 오면 범람하던 황하강의 치수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으며, 잡다한 조세 항목과 부정으로 얼룩진 세제의 개혁에도 박차를 가하여 ‘일조편법(一條鞭法)’을 확립하는 등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하였다.
밖으로는 요동과 몽골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북로(北虜)’를 막고, 절강(浙江)・복건(福建)・광동(廣東)의 해안 방어에 힘을 기울여 ‘남왜(南倭)’를 막는 등 뚜렷한 성과를 거두니, 백성들은 만력제가 기울어가는 명나라를 다시 일으킬 것으로 굳게 믿었고, 명나라는 ‘만력중흥(萬曆中興)’이라 불릴 정도로 개국 이래 전례 없는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582년 장거정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만력제의 총명함과 정치력도 함께 죽어버렸다. 친정체제를 구축한 만력제는 국정을 농단했다는 이유를 들어 장거정의 시신을 파헤쳐 부관참시(剖棺斬屍)하는 것도 모자라, 그의 가산을 몰수하고, 장남에게 자결을 명했으며, 유족들을 굶겨 죽이기조차 했다.
여기에 더하여 국정을 잘 이끌어온 풍보마저 조정에서 쫓아내고, 신하들의 고언이 듣기 싫다며 이후 38년 동안 조정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만력제는 이 기간을 술과 여자로 채웠는데, 10만 명에 이르는 궁녀와 환관들의 시중을 받으며 매일 질펀한 연회를 즐겼고, 연못에 배를 띄우고 나비를 풀어 함께 탄 궁녀의 부채 위에 나비가 앉으면 그 궁녀와 그날 밤 잠자리를 했다.
유례를 찾기 어려운 만력제의 장기간에 걸친 국정 태업과 끝없는 향락은 당연하게도 기강의 문란과 재정의 파탄을 불렀다. 관리들은 황제를 볼 수 없었고, 재상조차도 황제의 얼굴을 잊어버릴 정도였으며, 조정의 업무를 최종 결재할 사람이 없어 나라의 중대사는 표류하고 개혁은 실종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만력제의 재위 기간이 무려 47년 동안이나 이어지면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그나마 살길은 도적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만력제 사후 후대 황제들이 무너지는 나라를 일으키고자 애썼으나, 만력제가 완전히 망쳐 놓은 나라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고, 숭정제(崇禎帝) 때에 이르러 이자성(李子晟)의 농민반란군에게 북경이 함락되면서 15세기 아시아 최강국이던 명나라는 마지막 황제의 자살과 함께 멸망하고 말았다.
하늘이 사람이나 나라를 망칠 때는 먼저 조그만 기쁨을 주고, 그런 후에 큰 근심을 내린다고 한다. 무슨 일이든 시작이 순탄하면 매사가 쉬워 보이고 경계감을 풀게 되는데, 그즈음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의 씨앗이 느슨해진 마음의 틈새를 파고들어 싹을 틔운다. 시작이 좋을수록 조심하고 신중해야 하는 이유이다.
시작이 좋고 나쁨을 떠나 역사에 큰 이름을 남긴 인물들의 시작은 대개 보잘것없고 초라하기 일쑤였는데, 특히 특히 명(明)나라를 건국한 주원장(朱元璋)의 초년 인생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주원장은 1328년 원(元)나라 말기 가난뱅이 소작농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5세가 되던 해 극심한 기근과 전염병이 돌면서 부모와 여러 형제가 연이어 죽고, 그나마 남은 형제는 뿔뿔이 흩어졌다. 하루 한 끼조차 먹기 어려운 생활을 견디다 못해 호구지책으로 황각사라는 사찰의 승려가 되었으나, 굶기를 밥 먹듯 하는 그곳 생활도 견딜 수 없어 목탁을 두드리며 걸식을 하는 탁발승이 되어 4년 동안 거지로 살았다.
25세 때 몸담고 있던 황각사가 홍건적(紅巾賊)에게 불타 없어지면서 갈 곳이 없어진 주원장은 부득이 홍건적의 일파인 곽자흥(郭子興)의 진영에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일개 병졸에 지나지 않았지만, 거듭 공훈을 세우면서 두각을 나타냈고, 틈틈이 학문을 닦아 소양을 넓혀갔다.
주원장의 비범함을 눈여겨보고 있던 곽자흥은 그가 후일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여겨 아끼는 양녀 마씨(후일 마황후)를 그와 혼인시켰고, 이때부터 주원장은 곽자흥의 사실상 후계자가 되었다.
곽자흥이 사망한 후 그의 자산을 이어받아 더욱 세를 불린 주원장은 남경(南京)을 점령하면서 당시 커다란 세력을 이루고 있던 장사성(張士誠)・진우량(陳友諒)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홍건적 3대 군벌의 하나로 우뚝 서게 되었다.
다른 유력 군벌들이 원나라 군대와 10년 가까이 소모전을 벌이는 동안 주원장은 원나라와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초야의 유능한 선비들을 초빙하여 그들의 조언대로 ‘중화의 회복’이라는 대의명분을 세우고 묵묵히 힘을 기르니, 주변의 군소 군벌들이 절로 복속하고, 세력은 날로 커졌다.
때를 기다리던 주원장은 마침내 군대를 움직여 군벌들을 차례로 격파한 후 1368년 20만 대군으로 북벌을 단행하여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한(漢)족의 명(明)을 건국하여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동서고금을 통해 수많은 왕조의 흥망이 있었지만, 거지의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삼백 년의 통일왕조를 창업한 군주는 주원장이 유일하다. 초년기의 비참함이 있었기에 주원장은 고비 때마다 초인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고, 기적에 가까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하루아침에 피어나는 꽃일수록 쉬 시들어 떨어지고, 개화가 늦은 꽃일수록 향기가 드높고 오래도록 그 모습이 유지되는 법이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이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