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끝에서 마주한, 나의 아버지라는 산

호국원 계단에 새겨진 그리움의 무게

by 온새미로

​운동하다 다친 무릎이 영 말썽이다.


의사는 계단을 피하라고

신신당부 부탁했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는 날이다.


아버지의 기일.

괴산 호국원의 납골당은 야속하게도

높은 계단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 계단씩 발을 뗄 때마다

무릎이 욱신거렸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술과 가까이 지내셨던 분이다.


하지만 그 고집스럽던 술병을

단번에 내려놓게 한 건 다름 아닌 며느리였다.


내가 결혼하고 몇 년 뒤 아버지는

"며느리가 너무 예뻐서 술을 끊어야겠다"며

그토록 좋아하시던 술잔을 비우셨다.


자식의 만류에도 꿈쩍 않던

당신의 세계가 며느리라는 존재 하나로

송두리째 바뀐 것이다.


​통증을 견디며 한 걸음씩 오르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술을 끊고 맑은 정신으로

우리 가족을 바라보려 애쓰셨던

아버지의 시간은 지금 내 무릎의 통증보다

얼마나 더 치열했을까.


알코올성 치매라는 그림자가 덮치기 전까지

아버지는 당신만의 방식대로

사랑의 무게를 견디며

그 계단을 오르고 계셨던 건지도 모른다.


​마침내 도착한 납골당 앞.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사진 속 아버지를 마주했다.


며느리 예쁘다며 허허 웃으시던

그 평온한 얼굴이

이제는 호국원의 조용한 공기 속에

녹아든 것만 같다.


나는 아픈 다리를 대신해

마음을 다해 인사를 건넸다.


"아버지, 우리 왔어. 이서방도, 동생도 다들 잘 지내고 있어"


​내려오는 길,


여전히 무릎은 욱신거리고

발걸음은 무거웠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맺혀 있던

응어리 하나가 그 계단 어딘가에

툭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가 보여주신

사랑의 변화를 되새기며

나는 오늘 그리움의 계단을 다시 올랐다.


그거면 됐다.


오늘 하루

나는 아버님께 자식으로서 드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인사를 드리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