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돈이라는 문신

by 오이랑

"돈 없으면 무시하고, 돈 많아도 무시하고."


친구와의 대화에서 이 말이 튀어나왔을 때,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싶어 안도했다. "너도?" 하는 눈빛에 친구는 "나도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돈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기묘한 공포와 경계심은 생각보다 보편적인 감정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퍼즐 조각을 맞추듯 어릴 적 기억들을 꺼내놓았다. 꽤 크게 사업을 하던 친구의 집과, 하루 벌어 하루를 버티던 일급 노동자의 집이었던 나의 집. 시작점은 완전히 다른 극단이었지만, 돈에 대한 기억은 이상하게도 닮아 있었다. 친구는 크게 믿었다가 더 크게 넘어진 어른들의 이야기를, 나는 땀 흘려 일하고도 제값을 받지 못했던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결국 그 끝은 '사람 조심, 돈 조심'이라는 똑같은 결론으로 이어졌다.


그 결론은 어른이 된 우리의 삶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마음 한쪽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 버릇이 생겼다. '저 사람이 나를 뭘 보고 만나나', '섣불리 속 얘기를 꺼냈다가 약점이 되는 건 아닐까' 먼저 경계심부터 키우는 것이다. 그 경계심은 자연스레 '센 척'이라는 갑옷이 되어 우리를 둘러쌌다. 돈 앞에서는 더 기이한 널뛰기를 반복했다. "돈, 그거 별거 아니야" 짐짓 태연한 척하다가도, 텅 빈 통장 잔고 앞에서는 누구보다 작아지는 우리였다. 빚은 인생을 좀먹는 벌레라며 벌벌 떨다가도, 스마트폰 앱에서 간단히 확인한 대출 한도에 '이만하면 나도 꽤 단단한 어른이구나' 하는 얄팍한 안도감을 느끼는 식이다.


나는 오랫동안 한 사람의 가치관을 만드는 가장 큰 뿌리는 가정에서 물려받은 정치적 성향이나 종교라고 생각해 왔다. 그것은 쉽게 변하지 않는, 정체성의 근간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깨달았다. 그것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일상적이고, 그래서 더 강력하게 우리를 지배하는 또 하나의 문신이 있다는 것을. 바로 유년 시절 가정에서 겪은 '돈에 대한 기억'이었다.


엄마가 되고 보니, 이 희미한 듯 선명한 문신이 자꾸만 신경 쓰인다. 돈 걱정 없이 해맑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 "돈, 돈" 하는 소리를 입에 올리지 않으려 애쓰다가도,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현실을 가르쳐줘야 할 때를 가늠하며 혼자 고민에 빠진다.


이 지긋지긋하면서도 떼려야 뗄 수 없는 돈과의 애증 관계를, 나는 어떤 모양으로 아이에게 물려주게 될까. '엄마'라는 역할은 잊고 있던 내 안의 오래된 문신을 자꾸만 들여다보게 하고, 끊임없이 되새김질하게 만든다. 오늘도 나는 내 아이의 등 뒤에 어떤 무늬를 새겨주고 있는지, 가만히 생각해 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