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종말은 언제나 잔해를 남긴다. 특히 오랜 시간 교차했던 두 세계가 한쪽의 단호한 선언으로 끝을 맺을 때, 그 파편은 주변으로 튀어 엉뚱한 곳에 상처를 내기도 한다. 친구 A가 오랜 시간 자신을 옭아매던 B와의 관계를 '싹둑!' 잘라냈다는 고백을 했을 때, 나는 그 파편이 튀어올 다음 장소가 바로 나 자신임을 예감했다. A와 B의 오랜 역사, 그 교집합의 한구석에 자리했던 나에게 닥쳐올 곤란한 질문과 어색한 침묵의 무게를 가늠하며 나는 조심스럽게 A에게 물었다. 머지않아 B가 내게 와 "A가 왜 그러는지 혹시 알아?"라고 물을 그 막막한 순간에 나는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해야 할까.
A의 대답은 명료했고, 그 어떤 철학적 잠언보다 깊은 울림을 주었다.
"넌 내가 아니잖아. 내 감정을 네가 어떻게 전하겠어. 모른다고 얘기하는 게 가장 정확해."
그 순간, 내 어깨를 짓누르던 예견된 부담감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것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가장 정직하고 윤리적인 태도에 대한 통찰이었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분리-개별화'의 과정이 비단 유아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매 관계 속에서 타인과 나를 분리하고 각자의 고유한 서사를 인정하는 연습을 평생에 걸쳐해나가야 함을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다. A는 나에게 B의 감정을 살피는 대리인도, 자신의 고통을 전하는 확성기도 아닌, 그저 한 명의 독립된 '나'로서 존재할 자유를 허락했다.
이는 심리학에서 강조하는 '경계 설정'의 중요성과도 맞닿아 있다. 건강한 관계는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A는 자신의 고통과 결정이라는 내밀한 영토에 나를 섣불리 끌어들이지 않음으로써, 나 역시 그들의 관계라는 안갯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나는 A의 과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B의 상실감을 대신 헤아릴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한 친구의 아픈 결정을 지지하고, 그가 내린 마침표를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여 주는 것, 즉 그의 주체성을 온전히 존중하는 일이었다.
나의 어설픈 개입이나 위로는 오히려 그들의 관계의 역사를 왜곡하고, A의 힘겨운 결단을 평가하는 오만한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해결사가 아니라 목격자로서, 판단자가 아니라 지지자로서 그의 곁에 머무는 것. 그것이 내가 지켜야 할 예의이자, 이 복잡한 관계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 자신을 지키는 길이기도 했다. A가 나에게 기대한 것은 딱 그만큼이었고, 그 명확한 기대치가 나를 불필요한 역할극의 무대에서 내려오게 해 주었다. 나는 이제 B의 의문 가득한 눈빛 앞에서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모른다고, 그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진실이라고 담담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결단이 만들어낸 관계의 공백. 그 서늘한 공백 앞에서 내가 느낀 것은 안도감과 존중감이었다. 친구의 후련함에 섞인 씁쓸함을 그저 함께 느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될 수 있음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