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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리듬으로 엄마 하기

by 오이랑

가을 옷 정리는 매년 어김없이 찾아오는 숙제다. 여름내 잘 입었던 얇은 리넨 셔츠와 티셔츠, 반바지들을 옷장 깊숙이 밀어 넣고, 그 자리엔 두툼한 니트와 스웨터를 꺼내 채워야 하는 계절의 청구서.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내일 하자’, ‘주말에 하자’ 미루다 더는 버틸 수 없는 어느 날, 나는 마지못해 옷장 문을 연다.


결심이 무색하게 서랍 한두 칸을 정리하다 보면 금세 귀찮아진다. “이걸 언제 다 해?” 투덜거림이 새어 나오고, 결국 가지런한 정리보다는 ‘어딘가에 구겨 넣기’로 대충 타협을 보고 만다. 유독 집안일 앞에서 나는 무력한 게으름뱅이가 된다.


문제는 이런 내가 아이들을 향해 잔소리를 발사할 때 시작된다. “숙제 미루지 말고 지금 해!”, “장난감 가지고 놀았으면 바로 치워야지!” 내 입에서 나오는 ‘제때’, ‘미리’, ‘바로’ 같은 단어들은 날카로운 부메랑이 되어 정확히 나에게로 날아와 꽂힌다. 방금 전 옷더미 앞에서 한숨 쉬던 나와, 지금 아이에게 바른생활을 설파하는 나. 이 명백한 아이러니의 현장에서 나는 얼굴이 화끈거린다.


정답은 사실 나도 안다. ‘네가 먼저 미루지 말고, 네가 먼저 제때 해라.’ 다들 그렇게 말하겠지. 나를 향해 화살을 돌려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건 말이 쉽다. 어렵기도 하거니와, 나의 ‘추구미’도 아니다. 나는 해야 할 일을 눈앞에 두고도 잠시 뭉그적거리는 여유를, 완벽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굴러가는 삶의 방식을 사랑한다. 재즈나 힙합에서 정박보다 살짝 뒤로 끄는 느낌의 연주기법인 레이드백(laid back)이 사람을 얼마나 편안하고 느긋하게 만드는가. 세상의 모든 일이 칼같이 제시간에 맞아떨어지는 리듬을, 나는 아마 평생 소유하지 못할 것 같다.


그럼 어쩌지? 나는 아이들을 기만하는 엄마인가? 나의 모순을 아이들은 이미 꿰뚫어 보고 있지 않을까?


한참을 고민하다 문득 이런 생각에 다다른다. 좋은 길잡이란, 한 번도 길을 잃어본 적 없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길을 잃어봤기에 어디에 웅덩이가 있고 어디쯤 길이 험한지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어쩌면 내가 아이들에게 물려줘야 할 것은 ‘미루지 않는 완벽한 습관’이 아니라, ‘미루고 싶은 마음과 싸우고, 때론 지기도 하지만 결국엔 해내는 과정’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엄마도 옷 정리하기 진짜 싫다. 그래도 오늘 저녁엔 꼭 끝내보려고. 같이 힘내볼까?” 하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다.


나의 리듬을 버리고 완벽한 엄마의 틀에 나를 맞추는 대신, 나의 리듬을 유지하며 아이들과 함께 걷는 법을 배우려 한다. 완벽한 지름길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이 아니라, 함께 툴툴거리면서도 결국 목적지를 향해 같이 걸어가는 여행 동반자. 그것이 내가 아이들에게 되어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안내자의 모습일 것이다. 가을 옷 정리는 여전히 하기 싫지만, 올해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옷장 문을 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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