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 / "아무도 안 봤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창작동화] 풍선 아이 - 헤겔, 아리스토텔레스, 호네트

by 오이랑

[대화의 발견]

"엄마! 나 봐봐! 나 진짜 높이 뛸 거야! 절대 눈 감으면 안 돼!"


해 질 녘 놀이터, 모래 먼지를 뒤집어쓴 여섯 살 둘째(현재는 초등학생)가 낮은 화단 담벼락 위에서 비장하게 소리쳤다.


벤치에 앉아 잠시 휴대폰 알림을 확인하던 찰나, '툭'하는 가벼운 착지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이는 이미 착지하여 뿌연 먼지 속에 서 있었다. 나는 건성으로 박수를 치며 영혼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우리 딸 진짜 높이 뛰었네. 대단하다."


그런데 아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입술이 삐죽 나오더니 이내 서러운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가 안 봤잖아! 거짓말쟁이! 내가 공중에서 발차기하는 거 못 봤잖아!"

"아니야, 엄마가 소리 들었어. 담벼락에서 진짜 멋지게 뛰었을 것 같은데?"

"안 봤으면 모르는 거지! 엄마가 눈으로 딱 봐야 진짜로 뛴 게 된단 말이야. 아무도 안 보면 내가 하늘까지 닿았어도 안 뛴 거나 마찬가지라고! 다시 볼 때까지 계속 뛸 거야!"


아이는 씩씩거리며 다시 화단 턱 위로 기어 올라간다. 그 작은 뒷모습을 보며 나는 순간 멍해졌다. 아이에게는 '내가 뛴 사실'보다 '엄마가 본 사실'이 더 중요한 걸까?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의 나는, 과연 온전히 존재하는 걸까?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To be is to be perceived)." 영국의 철학자 버클리의 그 난해한 명제가, 흙투성이 여섯 살 아이의 투정 속에서 완벽하게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창작동화] 풍선 아이

바람의 언덕에는 '풍이'라는 아이가 살았습니다. 풍이는 아주 특별한 몸을 가지고 있었어요. 누군가 "와, 대단하다!"라고 말해주면 몸이 둥실둥실 커지고, 아무도 쳐다보지 않으면 쭈글쭈글한 건포도처럼 작아지는 풍선이었거든요.


풍이는 늘 사람들 눈에 띄고 싶었습니다. 작아지는 기분은 너무나 비참했으니까요. 풍이는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물구나무를 서고, 공중제비를 돌았습니다. "우와, 저 아이 좀 봐!" 사람들의 환호성에 풍이의 몸은 거대해졌고, 기분도 구름 위를 걷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금세 익숙해졌습니다. 풍이가 웬만한 묘기를 부려도 더 이상 쳐다보지 않았죠. 풍이는 점점 작아져서 바람 빠진 고무장갑처럼 변해갔습니다. 조바심이 난 풍이는 결심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절벽에서 뛰어내려야지! 그럼 모두가 나를 봐줄 거야.'


절벽 끝에 선 풍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다시 몸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늙은 부엉이가 물었습니다. "풍이야, 네가 터져버리면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무슨 소용이니?" "하지만 아무도 안 봐주면 난 사라지는걸요." "남들이 보지 않아도, 너는 여전히 너란다. 네 안의 숨을 믿으렴."


풍이는 뛰어내리는 대신, 조용히 눈을 감고 자신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남들의 칭찬 바람이 아니라, 스스로 채운 숨으로 풍이는 천천히, 아주 단단하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이후 풍이는 더 이상 묘기를 부리지 않았지만, 바람의 언덕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을 띠는 풍선이 되었습니다.





타인의 시선과 존재의 부피 | 남이 보지 않으면 나는 쭈글쭈글한 건포도일까요?

아이는 "엄마가 안 보면 안 뛴 거야!"라고 소리쳤고, 풍이는 시선이 사라지자 건포도처럼 작아졌습니다. 두려움의 본질은 같습니다. 나의 존재감은 타인의 시선이라는 공기가 주입되어야만 유지되는 튜브 같은 것일까요? 남이 알아주지 않는 나의 노력과 성취는 정말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는 걸까요?


인정 투쟁과 위험한 묘기 | 왜 우리는 절벽 끝으로 내달릴까요?

아이는 엄마가 볼 때까지 지친 다리로 계속 담벼락을 반복해서 올랐고, 풍이는 박수를 받기 위해 위험한 절벽으로 향했습니다. 관심을 끌기 위해 자극적인 영상을 올리거나, 무리해서 명품을 사고, 때로는 나를 포장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우리 모습과 닮았습니다. 타인의 감탄사를 얻어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위험한 묘기'를 부리며 자신을 혹사시키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내면의 호흡과 자립 | '나의 숨'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부엉이는 풍이에게 "네 안의 숨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이는 놀이터의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조언이기도 합니다. 엄마가 보든 안 보든, 공중을 갈랐던 그 짜릿한 느낌은 네 다리와 심장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 타인이 불어넣어 주는 바람(칭찬)이 아니라, 내가 내 안에서 길어 올린 호흡(자존감)만으로 우리는 단단해질 수 있을까요?


디지털 자아의 딜레마 | 숫자가 사라진 자리에도 '나'는 남을까요?

풍이에게 박수 소리가 밥이었다면, 현대인에게는 조회 수와 팔로워가 밥입니다. 만약 전 세계의 서버가 다운되어 모든 '좋아요' 숫자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풍이처럼 공황에 빠질까요, 아니면 비로소 고요한 자신의 숨소리를 듣게 될까요?




인정욕구의 문제를 깊이 파고든 세 명의 철학자를 만나봅시다.


헤겔(G.W.F. Hegel)의 인정 투쟁(Struggle for recognition)

겔은 인간을 '목숨을 걸고서라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존재'라고 정의했습니다. 동물은 배부르면 만족하지만, 인간은 타인에게 자신의 가치를 확인받아야 비로소 '나(자의식)'를 갖게 됩니다. 놀이터의 아이가 악을 쓰며 운 것은 단순한 어리광이 아닙니다. "나를 그냥 어린애가 아니라, 이렇게 높이 뛸 수 있는 대단한 존재로 인정해 줘!"라는 처절한 투쟁인 셈이죠. 풍이가 절벽에 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헤겔은 말합니다. 타인의 시선에만 매달린다면 우리는 영원히 시선의 '노예'일 뿐이라고요. 풍이가 남의 박수 없이 스스로 숨을 쉬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아이가 엄마 없이도 "나 오늘 쩔었다!"라고 스스로 뿌듯해할 때, 비로소 시선의 노예에서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와 포부(Megalopsychia)와 허영

아리스토텔레스는 명예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사람의 그릇을 나누었습니다.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박수에 목매는 상태는 '허영(Vanity)'입니다. 칭찬이 없으면 쭈글쭈글해지던 풍이와, 엄마가 안 봤다고 울던 아이의 모습이 바로 이 단계죠. 반면, 남이 알아주든 말든 자신이 훌륭한 가치를 지닌 사람임을 알고 그에 걸맞게 행동하는 태도는 '포부(긍지)'입니다. 부엉이의 조언을 듣고 난 후, 남들의 시선과 상관없이 자신의 빛깔을 뽐내는 풍이는 이제 '위대한 영혼'을 가진 존재가 된 것입니다. 아이도 언젠가는 엄마가 딴청을 피워도 "엄마가 못 봐서 아쉽네, 진짜 멋졌는데."라며 쿨하게 땀을 닦는 긍지 높은 사람이 되어야겠지요.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의 무시와 사회적 인정

현대 철학자 호네트는 우리가 타인에게 무시당할 때 느끼는 감정을 '사회적 죽음'에 비유했습니다. 누군가 나를 투명 인간 취급할 때, 우리는 마치 신체가 훼손된 것 같은 고통을 느낍니다. 풍이가 작아진 현상은 바로 이 고통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놀이터의 아이가 그토록 서럽게 운 것도, 엄마가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것 같은 공포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호네트는 건강한 자아를 위해서는 사랑, 권리, 연대라는 사회적 인정이 필수적이라고 했습니다. 풍이와 아이가 다시 부풀어 오르기 위해선, 타인의 인정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의 긍정적 관계(자기 인정)'가 단단하게 받쳐줘야 함을 역설합니다.




[교실의 철학 수업]

겨울방학을 앞둔 12월의 마지막 윤리 시간. 창밖엔 진눈깨비가 날리고, 히터 열기로 훈훈해진 교실엔 묘한 나른함이 감돌았다. 진도가 다 끝난 홀가분한 시간, 나는 아이들에게 상장 테두리가 인쇄된 A4 용지를 한 장씩 나눠주었다. 진짜 상장은 아니었지만, 제법 그럴싸한 양식이었다.


"자, 오늘은 1년 동안 고생한 나에게 상을 주는 날이다. 이름하여 '셀프 어워드(Self-Award)'. 수여인은 교장 선생님도 나도 아닌, 바로 '너희 자신'이야."


아이들이 "에이, 귀찮게 뭘 이런 걸 해요", "상 줄 게 없는데요" 하며 무심하게 툴툴거렸다. 덩치 산만한 녀석들에게 자화자찬은 영 쑥스럽고 오글거리는 일인 모양이었다. 나는 칠판에 굵은 분필로 꾹꾹 눌러 썼다.


[수여인: 000 나 자신 (인)]


"거창한 결과물에 주는 게 아니야. 등급이나 점수는 잊어라. 남들은 몰라도 나는 아는 나만의 기특한 순간, 그 고단했던 과정에 상을 주는 거다. 다 썼으면 수여인 란에 자기 이름을 쓰고, 지장을 쾅 찍어. 혹은 멋지게 서명. 그게 결재다."


잠시 후, 교실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엎드려 있던 녀석들이 몸을 일으켜 펜을 잡았다. 사각거리는 소리만 가득한 교실. 아이들은 지난 1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자신의 시간을 되감기 하고 있었다. 제출된 상장들의 제목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코끝이 찡해졌다. 투박한 글씨 속에 아이들 나름의 치열한 성찰과 윤리적 고민이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불편한 용기 상> (양00): 다들 한 친구를 장난으로 몰아갈 때, '그만하자'고 말하면 분위기 싸해질까 봐 걱정됐지만 결국 입을 뗀 나에게 줌. 그 순간의 불편함을 견뎌낸 용기를 칭찬함.


<거울 앞에서 한 번 더 생각상> (강00): 자고 일어나서 머리가 까치집이었지만, 거울 보고 '이 정도면 내추럴한 멋이지' 하고 긍정적으로 등교한 나를 칭찬함.


<뇌 한번 거친 뒤 행동한 상> (윤00): 친구 말이 아니꼬웠지만 바로 주먹이나 욕설로 반응하지 않고, 대뇌피질을 거쳐 필터링한 뒤 '그건 좀 아니지 않냐'라고 점잖게 말한 나의 이성을 높이 평가함.


<물아일체 인성 실천상> (조00): 수학 시간에 책상과 내가 하나가 되어 잠들었지만, 꿈속에서도 펜은 놓지 않았던 학구열과 선생님에 대한 미안함을 담아 수여함.


<다른 의견도 일단 인정했상> (윤00): 친구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했지만, 톨레랑스의 정신으로 '그럴 수도 있겠다'라며 고개를 끄덕여 준 나의 넓은 아량을 칭찬함.


<카르마 상> (김00): 생윤 시험 대박을 위해 착한 일로 '양의 카르마'를 쌓고 타 과목 점수를 제물 삼아 결과를 얻어냄. 공부 부족을 운으로 합리화한 한계까지 인지한 통찰을 칭찬함.


<특이 현상> (김00): 1년 동안 지각을 한 번도 안 함. 내 인생 역사상 다시없을 기적 같은 일이라 스스로 기념함.


활동이 끝나갈 무렵, 시키지도 않았는데 교실 여기저기서 "찰칵, 찰칵" 셔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 내 상 이름 쩔지 않냐?" 아이들은 상장을 들어 보이며 서로 사진을 찍어주거나, 휴대폰 앨범에 저장하고 있었다. 평소 감정 표현에 인색하고 무심하던 남고생들이 자신의 상장을 보며 씩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예뻐서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사진 찍어서 카톡 프사도 바꾸고, 인스타 피드도 올리고, 부모님께도 전송해. '나 이런 사람이야' 하고 자랑 좀 해라. 오늘은 관종이 되어도 허락하노라."


잠시 뒤 한 녀석이 휴대폰을 흔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쌤! 엄마한테 보냈는데 답장 왔어요. '학교에서 받은 상보다 우리 아들이 스스로 준 상이라 더 멋지네'래요!"


그 웃음이 번져 교실 전체가 환해졌다. 교실을 나서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남들의 인정이라는 바람 없이도, 아이들의 표정은 이미 스스로의 숨으로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 모습이 참 근사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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