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동화] 구름을 쫓는 아이- 니체, 길로비치, 길버트, 로저스, 장자
새집으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아직 커튼을 달지 않은 아이방 통창으로, 맑고 파란 하늘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 한 마리를 보며, 아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엄마, 저 새... 혼자라서 외롭겠다."
나는 "그럴까? 그냥 어디 가는 길인가 보지."라며 무심코 대답했다. 아이는 한참 동안 새가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더니, 결심한 듯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 꿈 바꿨어. 헬리콥터 조종사 말고, 다른 거 할래."
"오, 뭔데?"
"나는, 저렇게 혼자 나는 새가 심심하지 않게, 옆에서 같이 날아주는 사람이 될래."
아이의 사랑스러운 표현이 참 귀여웠다.
나는 어른의 의무감이라는 이름으로, 그 환상에 '현실'이라는 선을 그었다.
"그건... 정말 멋지고 따뜻한 꿈이네. 그런데, 그건 직업이 될 순 없어. '같이 날아주는 사람'은 월급을 받을 수 없으니까..."
내 대답에 아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엄마."
"응?"
"엄마는 어른이 돼서 뭘 가장 후회해?"
갑작스러운 질문의 무게에 나는 "음... 글쎄... 어릴 때 피아노 연습 좀 더 할걸?" 하고 멋쩍게 대답했다.
아이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는 잊을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럼... 지금 내가 '새랑 같이 날아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엄마가 '안 된다'고 해서 포기하잖아. 그럼 나 나중에 어른 돼서 '아, 그때 엄마 말 안 듣고 그냥 새랑 같이 날아주는 사람 할걸!' 하고 후회하면 어떡해? 엄마가 내 후회 책임질 거야?"
나는 아이의 엉뚱한 꿈을 꺾은 어른이 되어, 그 '미래의 후회'에 대한 책임까지 추궁당하는 기상천외한 곤경에 빠져버렸다.
'길잡이 별'의 빛에 따라 자신의 길을 정하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튼튼한 길잡이 별', '반짝이는 길잡이 별', '높은 길잡이 별'을 따라갔습니다. 그 길 끝에는 언제나 안정과 풍요가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연이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별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별이 아니라, 밤하늘을 정처 없이 떠도는 '구름 조각'이었습니다. "저는 저 구름을 따라갈래요." 어른들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얘야, 그건 길이 아니란다. 아무것도 약속해주지 않아. 넌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
도연이는 망설였지만, 결국 구름을 따라 길을 떠났습니다. 길잡이 별을 따라간 친구들은 곧 멋진 집을 짓고 마을의 중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도연이의 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때로는 비를 맞고, 때로는 굶주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도연이를 보며 혀를 찼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끔찍한 가뭄이 찾아와 마을의 모든 샘이 말라붙었습니다. 길잡이 별들은 아무런 답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때, 도연이가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제가 구름을 따라다니며 비가 내리는 길과 마르지 않는 샘물을 모두 표시해 두었어요. 저를 따라오세요."
도연이는 '구름을 쫓는 사람'이 되어 마을을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그는 멋진 집도, 높은 지위도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도연이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구름의 길'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고, 단 하루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안전한 길'과 '가고 싶은 길'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창작 동화] 속 아이들은 대부분 '안전한 길잡이 별'을 따릅니다. 하지만 도연이는 누구도 가지 않는 '구름의 길'을 선택합니다. [대화의 발견]에서 '헬리콥터 조종사'는 안전한 길, '새와 함께 날아주는 사람'은 가고 싶은 길입니다. 현재의 안정과 미래의 불확실한 만족 중, 우리는 무엇을 더 중요한 가치로 삼아야 할까요?
'후회'란 무엇일까요?
"후회하면 어떡해?"라는 아이의 질문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하지 않은 일'을 후회할까요, 아니면 '실패한 일'을 후회할까요? 동화 속 도연이는 굶주리고 힘들었지만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후회는 결과의 실패가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선택을 하지 못했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요?
어른의 '현실적인 조언'은 항상 옳을까요?
저는 아이에게 "그건 직업이 될 수 없어"라고 현실을 조언했습니다. 동화 속 어른들도 도연이에게 "후회할 거야"라고 충고합니다. 아이의 꿈을 지켜주려는 선의가, 오히려 아이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족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른의 역할은 아이의 꿈을 현실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꿈을 지지하고 함께 방법을 찾아주는 것일까요?
'쓸모없는 꿈'은 정말 가치가 없을까요?
'새와 함께 날아주는 것'이나 '구름을 쫓는 것'은 당장의 돈이나 명예로 이어지지 않는 '쓸모없는' 꿈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쓸모없는 꿈이 아이에게는 가장 큰 의미가 되고, 도연이에게는 마을을 구하는 지혜가 되었습니다. '쓸모'란 무엇일까요?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일까요, 아니면 나 스스로 부여하는 의미일까요?
이 이야기는 '선택', '후회', 그리고 '자아실현'에 대한 다양한 사상가들의 깊은 사유와 연결됩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와 아모르 파티(Amor Fati)
니체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파티'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후회하면 어떡해?"라는 불안이야말로 삶을 약하게 만든다고 보았습니다. 니체는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의 결과를 포함한 내 삶 전체를 긍정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새와 함께 날겠다'는 선택이 실패로 돌아오더라도, "다시 한번!"이라고 외치며 그 선택마저 자신의 운명으로 껴안으라는 것입니다.
토머스 길로비치 (Thomas Gilovich)와 후회의 심리학
코넬 대학의 심리학자 길로비치는 '한 일'에 대한 후회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를 연구했습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단기적으로는 '내가 왜 그랬을까'(행동한 것)를 후회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그때 왜 해보지 않았을까'(행동하지 않은 것)를 훨씬 더 크고 깊게 후회합니다. "피아노 연습 좀 더 할걸"이라는 저의 후회처럼 말이죠. 아이의 "그때 엄마 말 안 들을 걸!"이라는 두려움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가 가장 고통스럽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대니얼 길버트 (Daniel Gilbert)와 정서적 예측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는 인간이 '미래에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낄지'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능력이 매우 떨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선택(예: 안정적인 직업)을 하면 행복할 것이라 예측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후회하면 어떡해?"라는 아이의 질문에, 길버트는 "괜찮아. 우리는 미래의 감정을 잘 예측하지 못해.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을 합리화하며 행복을 찾아내는 놀라운 능력이 있단다."라고 답했을지 모릅니다.
칼 로저스 (Carl Rogers)와 자아실현 경향성
인본주의 심리학의 대가 칼 로저스는 모든 인간에게는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자아실현 경향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새와 함께 날아주고 싶다'는 아이의 엉뚱한 꿈은, 어쩌면 아이 내면에 있는 '연결되고 싶은 욕구', '보살피고 싶은 욕구'의 순수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로저스의 관점에서 보면, 어른의 역할은 아이의 꿈을 현실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꿈의 이면에 있는 아이의 진정한 욕구와 가능성을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것입니다.
장자(莊子)와 무용지용(無用之用)
고대 중국의 철학자 장자는 '쓸모없음의 쓸모'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목수에게 '쓸모없다'고 버려진 거대한 나무가, 바로 그 쓸모없음 덕분에 잘리지 않고 살아남아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진짜 쓸모'를 다한다는 비유를 듭니다. [대화의 발견]에서 '새와 함께 날아주는 사람'이나 [창작 동화] 속 '구름을 쫓는 아이'는, "월급을 받을 수 없다"는 사회의 '쓸모'(유용지용) 기준에서는 완벽히 '쓸모없는'(무용) 꿈입니다. 하지만 장자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쓸모없어 보이는 꿈이 아이의 삶을 의미로 채우고(도연이처럼), 세상을 구하는 '가장 큰 쓸모'(무용지용)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몇 년 전 진로 수업 시간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A4용지 한 장씩을 나누어 주었다.
"자, 지금부터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후회 편지'를 쓸 거야. 상상해 봐. 너희가 50살이 됐어. 지금, 18살의 나에게 '아, 그때 제발 그것만은 하지 말 걸' 혹은 '그때 왜 그걸 안 했을까'하고 후회하는 편지를 쓰는 거야. 익명으로."
교실은 술렁였다. 아이들은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펜을 든 눈빛은 진지했다. 잠시 후, 내가 걷은 편지함에는 18살의 불안과 50살의 회한이 뒤섞여 있었다.
"50살의 나에게. 18살의 OOO아, 제발... 걔한테 고백 좀 하지 그랬냐. 쪽팔린 게 무서워서. 넌 평생 후회한다."
"To. 18살의 나. 쓸데없이 유튜브 본다고 밤새우지 마라. 네 50살의 간은 너덜너덜하다."
"18살의 나에게. 부모님 반대 무릅쓰고 '돈 안 되는' 음악 한다고 덤볐는데, 50살에 알바하고 있다. 그때 현실적인 조언 들을 걸 후회한다."
"18살의 나에게. 제발 그 빌어먹을 안정적인 직업(공무원) 말고, 너 하고 싶었던 게임 개발자 도전이라도 해보지 그랬냐. 넌 평생 이 회사에서 후회한다."
마지막 두 편지가 읽혔을 때, 교실은 조용해졌다. '안정적인 길'을 선택한 50살과 '꿈을 좇은 길'을 선택한 50살이, 똑같이 18살의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깨달은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는 반드시 그림자처럼 따라온다는 것을.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내 역할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후회 없는 선택'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후회가 찾아오든 그 후회의 무게를 스스로 감당하고, 그 후회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계속 걸어갈 힘을 길러주는 것. 그것이 18살의 아이들과 내가 함께해야 할 진짜 진로 수업일 것이다.
혹시나 기다리셨을 독자님들께.
유행을 지나치지 못하고 감기 대열에 끼여 있느라 글이 늦었습니다. 건강 유의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