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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 "걘 이제 나랑 안 놀아. 뭐가 문제일까?"

[창작 동화] 자석 돌과 조약돌 - 아리스토텔레스, 지라르, 보부아르

by 오이랑

[대화의 발견]


저녁 식탁에서였다. 초등 고학년인 첫째가 밥알만 깨작거릴 뿐,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무슨 일 있어? 밥을 깨작거리네."

아이는 한숨을 푹 쉬더니, 그제야 꾹꾹 눌러왔던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나 학교 가기가 싫어졌어."


그렇게 학교 가기를 좋아하던 아이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이유를 묻자, 아이는 그간의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다음은 첫째 아이가 설명한 내용이다.


학년 초, 마음에 꼭 맞는 친구 A를 만났단다. 둘은 '단짝'이라는 이름으로 매일 붙어 다녔다. 서로의 집에 놀러 가는 것은 물론이고, 큐브를 맞추는 사소한 취미까지 공유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갈등은 목소리가 크고 자기주장이 강한 B가 그 사이에 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B는 뭐든 자기 맘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을 냈고, 첫째와 A의 말을 쉽게 무시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A가 B 쪽으로 노선을 갈아탔다. 첫째 아이는 A가 "B 말이 다 맞아"라며 B의 추임새를 맞추기 시작했다고 했다. 어느새 첫째는 둘 사이에서 짜증의 대상, 핀잔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A와 함께 가기로 했던 보드게임 카페 약속은 하염없이 미뤄졌다.


이야기를 마친 아이는 눈에 눈물이 그렁했다.

"걘 이제 나한테 등만 보여주고, B 말만 맞다고 해. 나랑은 안 놀아. A도 B도 다 싫어.... 엄마, 대체 뭐가 문제일까?"


아이의 마지막 질문은 나를 향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나‘는 무엇이 문제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절박한 독백이었다. 관계의 배신이라는 첫 사회생활의 쓴맛을 본 아이 앞에서, 나는 '우정'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창작 동화] 자석 돌과 조약돌


작은 시냇가에 세 개의 돌이 살고 있었습니다. 매끄럽고 조용한 조약돌 '루나', 반짝이는 황철석 '스파크', 그리고 아주 크고 힘이 센 자석 돌 '마그'였습니다.


루나와 스파크는 '단짝'이었습니다. 둘은 시냇물에 함께 몸을 씻고, 햇볕에 나란히 누워 낮잠을 자는 것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마그'가 쿵! 소리를 내며 둘에게 굴러왔습니다. "시시하게들 노네! 나처럼 노는 거야!" 마그는 뭐든 자기 마음대로였습니다. 다른 돌들을 밀쳐내고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고, 자신이 정한 놀이만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반짝이는 쇠붙이 성분을 가진 '스파크'가 자꾸만 마그에게 착! 하고 달라붙는 것이었습니다. 스파크는 마그의 강력한 힘에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스파크도, 곧 마그의 힘에 기대어 다른 돌들을 밀어내는 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루나가 다가가 말했습니다.

"스파크, 우리 예전처럼 햇볕 쬐러 가자."

"싫어! 마그랑 노는 게 훨씬 재밌어!"

스파크는 마그 뒤에 숨어 대답했습니다.


루나가 마그에게 다가가려 하면, 마그는 루나를 거칠게 밀어냈습니다. 스파크는 마그에게 붙은 채, 밀쳐지는 루나를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습니다. 루나는 시냇가에서 완전히 혼자가 되었습니다.

'왜 스파크는 변했을까? 왜 나는 마그처럼 강한 힘이 없을까? 내가 문제일까?'


혼자 슬픔에 잠겨있던 루나는, 시냇가 가장자리에서 이끼가 낀 '모스'와 뾰족한 '샤드', 그리고 무지개 빛이 나는 '오팔'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서로 달라붙는 힘은 없었습니다. 대신, 서로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며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기도 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햇볕을 즐기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루나는 깨달았습니다. 꼭 누군가에게 '착' 달라붙어야만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요.




'단짝'은 꼭 한 명이어야 할까요?

[대화의 발견]에서 첫째는 A와의 '단짝' 관계가 깨지자 큰 배신감을 느낍니다. 이는 우정을 일종의 독점적인 소유관계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정은 정말 배타적이어야만 그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여러 명과 다양한 깊이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일까요?


친구의 마음이 변한 것은 '잘못'일까요?

A는 B의 힘에 이끌려 첫째를 외면했다고 볼 수 있지요. 동화 속 스파크는 마그의 힘에 끌려 루나를 떠났습니다. 이는 분명 첫째와 루나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B와 마그의 힘(매력)에 이끌린 A와 스파크의 '선택'을 우리는 무조건 '잘못'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관계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일까요, 아니면 지켜야 할 의리를 저버린 것일까요?


나는 왜 '끌어당기는 힘'이 없을까요?

"뭐가 문제일까?"라는 첫째의 질문은 "나는 왜 B처럼 매력적이지 못할까?"라는 자책으로 이어집니다. 동화 속 루나 역시 '나는 왜 힘이 없을까?' 고민합니다. 우리는 종종 관계의 문제를 자신의 매력 부족으로 돌립니다. 하지만 루나가 다른 돌들을 만났듯, 문제는 '힘의 유무'가 아니라 '어떤 방식의 관계'를 맺느냐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왜 '힘 있는' 친구에게 이끌릴까요?

A는 B에게, 스파크는 마그에게 이끌렸습니다.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힘'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목소리가 크고, 주장이 강하고, 인기가 많은 친구. 그 힘에 기대어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일까요, 아니면 나약함의 증거일까요?




이 이야기는 '우정'이라는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에 대한 사상가들의 깊은 사유와 연결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와 우정의 세 가지 유형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쾌락의 우정'(같이 놀면 즐거워서), '유용성의 우정'(A가 B의 힘에 기대는 것처럼 이익이 돼서), 그리고 '덕의 우정'(상대방의 좋은 성품 자체를 사랑해서)으로 나누었습니다. 첫째가 A와 맺었던 관계는 '덕의 우정'이라 믿었지만, A에게는 '쾌락의 우정'이었거나 B라는 더 큰 '유용성' 앞에서 쉽게 버려진 관계였을지 모릅니다.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와 모방 욕망(Mimetic Desire)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우리의 욕망이 순수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모방'한다고 보았습니다. A가 B에게 이끌린 것은, B 자체가 좋아서라기보다 B가 가진 '힘'이나 '인기'(다른 아이들이 B를 따르는 모습)를 모방하고 싶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첫째, A, B의 삼각관계는 B라는 '모델'을 두고 A가 첫째와의 관계를 포기하는 '모방 욕망'의 비극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 애쉬(Solomon Asch)와 동조(Conformity)

심리학자 솔로몬 애쉬는 유명한 '선 길이 비교' 실험을 통해, 다수의 명백히 틀린 의견에도 개인이 얼마나 쉽게 동조하는지 보여주었습니다. A가 B의 말에 "다 맞아"라고 추임새를 넣는 것은, B의 주장이 옳아서라기보다 집단의 압력에 굴복하여 자신의 판단을 포기하는 '동조 현상'일 수 있습니다. 관계에서 배제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 진실한 우정보다 더 강하게 작용한 것입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와 타자화(The Other)

보부아르는 우리가 타인을 나와 동등한 '주체'로 대하지 않고, 나의 목적을 위한 '대상'이나 '사물'(타자)로 만들 때 폭력이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B는 첫째를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방해물(타자)로 취급했고, A 역시 자신의 사회적 안위를 위해 첫째를 동등한 주체가 아닌 버려도 되는 '타자'로 전락시켰습니다. 첫째가 느낀 고통은 '관계'가 깨진 슬픔이자, '주체'로서의 존엄성을 부정당한 아픔입니다.





[교실의 철학 수업]


첫째 딸아이의 고민을 듣고, 문득 몇 년 전 중학교 담임 시절이 떠올랐다.


중학교 교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발단은 스마트폰이었다. 한 아이가 특정 단톡방에서 제외되고, 누군가 자신의 메시지를 '읽씹(읽고 무시함)'했다는 오해, SNS에 자신을 '저격'하는 듯한 글이 올라왔다는 신고가 얽혀 교실 내 파벌 싸움으로 번진 참이었다.


나는 교실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회복적 생활교육' 연수에서 배운 '관계의 서클'을 열었다. 말하는 사람만 가질 수 있는 '토킹 스틱'을 돌리며, 오직 자신의 감정과 경험만을 이야기하기로 약속했다. 처음에는 서로를 비난하기 바빴다.


"C가 저를 빼고 자기들끼리만 단톡방을 새로 팠어요! 저만 빼고 다 초대했어요."

"D가 제 카톡은 '읽씹'하면서, E 카톡에만 '좋아요' 눌렀다고요! 이건 저격이잖아요!"


하지만 '토킹 스틱'이 몇 바퀴 돌고,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묻자, 이야기는 달라졌다.

"그냥... 쟤가 C랑만 얘기하니까, 제가 버려진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저도 화나서 걔 욕했어요."

그리고, 내 딸아이의 친구 A와 비슷한 입장이었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사실... C가 D 욕하는 거 듣고 무서웠어요. 저도 저렇게 될까 봐... 그래서 그냥 C 편드는 척했어요."


그때 나는 그 서클을 열어 아이들의 감정을 쏟아내게 하는 것만으로도 큰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중재랍시고 "서로 오해했네. 이제 사과하고 풀자"라며 어설프게 봉합하려 애썼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저 문제를 빨리 '덮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 "뭐가 문제일까?"라는 아이들의 절박한 질문을, 정작 담임인 나는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의 경험은 지금 남고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확실히 중학교 여학생들의 관계 갈등은, 스마트폰을 타고 24시간 벌어지는 복잡 미묘한 감정의 정치 드라마 같다. 그에 비하면 지금 만나는 남고생들의 갈등은... 참 경쾌하다.


"쌤, 쟤가 어제 롤에서 트롤 했어요."

"축구할 때 저한테만 패스 안 줬어요."

아니면 그냥, "재수 없어요."


이유는 단순하지만, 그 단순함 속에도 동화 속 '마그'처럼 힘의 논리가 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유용성의 우정'이 숨어있다. 그때는 서클을 열어 감정을 쏟아내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아이들에게 묻는다.


동화 속 루나처럼, 꼭 '착' 달라붙어야만 친구인지, 아니면 모스나 오팔처럼 '서로 부딪히지 않는' 관계도 있는 것 아니냐고. 정답을 주기보다, 아이들이 스스로 우정의 거리를 재도록 돕는 것이 내가 할 일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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