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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난 왜 '나'야? 다른 사람일 수는 없었어?"

[창작 동화] 딱 한 번의 조합 - 로크, 사르트르, 불교

by 오이랑

[대화의 발견]


이제 막 초1이 된 둘째를 재우느라 침실 불을 끄고, 아이의 작은 발을 조몰락거리며 소곤소곤 이야기하던 차였다. 요즘 우리는 희귀 성씨를 가지고 주인공 이름을 짓고 이야기를 만드는 놀이에 한창 빠져있었다. ‘어학’씨 성을 가진 용감한 장수의 이야기도 하고, 어떤 날은 ‘사슴’씨 성을 가진 아이가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 웃기기도, 무섭기도 한 이야기들은 종종 아이의 오늘 일상에 빗대어 "주인공은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상상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러다 그날은, 아이가 학교에서 새로 '왕(王)'씨 성을 알아왔다.

"엄마, 나도 '왕OO'이 되고 싶어! 그럼 나 진짜 왕이 될 수 있잖아!"

"우리 OO이는 '왕'씨가 아닌데? 그리고 '왕'씨가 된다고 다 왕이 되는 건 아니야."

내 대답에 아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졸린 와중의 나를 번쩍 깨우는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왜 나야?"

"응?"

"나는 왜 '나'로 태어났어? '나'는 내가 정할 순 없었어? 왜 '왕OO'이 아니고 지금의 '나'야? ...나 이 얼굴 말고 다른 얼굴일 수는 없었어? 그리고 그림을 더 잘 그리는 '나'라든가... 내가 다른 사람일 수는 없었던 거야?"


존재의 근원, 자신의 기질과 재능, 그 모든 것의 조합이 왜 하필 '나'여야 했는지를 묻는 아이의 질문 공세 앞에서, 나는 그저 한없이 아이의 발을 마저 주무를 뿐이었다. 그 밤, 나는 잠든 아이 곁에서 '나'라는 존재의 우연성에 대해 한참을 뒤척였다.




[창작 동화] 딱 한 번의 조합


아주 먼 옛날,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빛알'들이 모여있는 정원이 있었습니다. 빛알들은 저마다 자기가 될 '자신'의 조각들을 고르느라 분주했습니다.


'눈동자 색깔 가게'에서는 반짝이는 검은색, 깊은 바다 같은 파란색 눈동자가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재능 가게'에서는 멋진 노래 실력과 날쌘 달리기 실력이 인기였습니다. '성격 가게'의 '용감함'과 '유쾌함' 앞에도 긴 줄이 늘어섰습니다.


아주 작은 빛알 하나가 그 사이를 두리번거렸습니다. '나는 완벽한 '나'를 만들 거야!' 빛알은 가장 파란 눈동자를 사려다 '아냐, 검은색이 더 지혜로워 보여' 망설였고, 노래 실력을 집으려다 '달리기가 더 쓸모 있겠지?' 하고 망설였습니다. 이것도 좋아 보이고, 저것도 근사해 보였습니다. 완벽한 조합을 찾기 위해 망설이는 사이, 정원의 문이 닫힐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 이제 가야 할 시간입니다! 남은 조각들을 아무거나 담아 가세요!"


빛알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가게마다 남은 조각들은 인기가 없던 것들이었습니다. '조금 짝짝이인 눈', '빠르진 않지만 오래 걷는 다리', '시끄러운 목소리', '너무 쉽게 우는 마음'. 빛알은 남은 조각들을 되는대로 그러모아 품에 안고 정원을 나섰습니다. '나는 실패했어. 나는 내가 원하던 '나'가 아니야.'


하지만 빛알이 한 아이로 태어난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너무 쉽게 우는 마음'은 아픈 친구를 누구보다 먼저 위로해 주었습니다. '시끄러운 목소리'는 슬픈 사람을 크게 웃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조금 짝짝이인 눈'은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매력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아이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실패한 조합이 아니라, 이 세상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딱 한 번의 조합'이었다는 것을. 만약 그때 완벽해 보이는 파란 눈을 골랐다면, 지금의 엄마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는 비로소 '나'라는 조합을 기쁘게 껴안았습니다.





'나'는 선택의 결과일까, 우연의 결과일까?

[대화의 발견]에서 아이는 '나'를 선택할 수 없었음에 의문을 품습니다. [창작 동화] 속 빛알은 '나'를 선택하려 했지만, 결국 남겨진 조각들의 '우연한 조합'으로 태어납니다. 우리의 존재는 정해진 운명일까요, 아니면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가 우연히 실현된 것일까요?


'나'를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아이는 자신의 얼굴, 성격, 재능 등을 '나'라고 생각하며 이것이 바뀔 수 없었는지 묻습니다. 동화는 '나'를 여러 조각(눈, 다리, 목소리, 마음)의 합으로 묘사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먼저 있고 이 조각들이 붙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 조각들이 모여 비로소 '나'라고 불리게 되는 것일까요?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것도 '나'일까?

"내가 다른 사람일 수는 없어?"라는 아이의 질문은 정체성의 문제를 건드립니다. 동화 속 빛알이 파란 눈과 노래 실력을 골랐다면, 지금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나'를 '나'이게 하는 핵심적인 무언가가 있을까요? 아니면 '나'는 그저 이 육체와 기억을 가진 존재에 붙인 이름일 뿐일까요?


내가 '나'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이는 '왕OO'이 되고 싶어 하고, 빛알은 자신의 조합에 실망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나'라는 존재의 한계(우연성) 앞에서 좌절하지요. 하지만 동화는 그 '딱 한 번의 조합'이 가진 고유한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나'라는 우연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살아가는 첫 번째 태도가 아닐까요?






이 이야기는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탐구해 온 수많은 철학자들의 사유와 만납니다.


존 로크 (John Locke)와 기억으로서의 자아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는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육체나 영혼이 아니라, 바로 '의식'과 '기억'이라고 보았습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사람일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어제의 일을 기억하는 '심리적 연속성'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로크의 관점에서 보면, 동화 속 빛알이 어떤 조각을 선택했든, 태어난 이후의 기억과 의식이 이어진다면 그것은 여전히 '나'일 수 있는 것이죠.


장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와 실존주의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는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미리 정해진 본질(동화 속 '완벽한 조합')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그냥 '던져진'(실존) 존재라는 뜻입니다. "나는 왜 나야?"라는 아이의 질문에, 사르트르는 "네가 '너'로 정해져서 태어난 게 아니야.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제부터 너의 선택으로 너를 '너'로 만들어가야 해."라고 대답했을 겁니다.


불교(Buddhism)와 무아(無我, Anatman)

불교는 '나'라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가 고통의 근원이라고 봅니다. 불교의 '무아' 사상은, '나'라고 부르는 것은 동화 속 '조각'들처럼, 수많은 인연(因緣)이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현상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왜 나야?"라는 질문 자체가 '나'라는 것이 단단하게 존재한다는 착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지요.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비로소 우리는 존재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답니다.


찰스 테일러 (Charles Taylor)와 관계적 자아

캐나다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나'라는 존재가 결코 고립되어 홀로 정의될 수 없다고 봤습니다. 그는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가치)를 반드시 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왜 나야?"라는 아이의 질문에, 테일러는 "너는 '너' 혼자서 '너'인 것이 아니란다. 너는 엄마의 딸이고, 동생의 언니이며, '왕'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너'인 거야."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나'는 진공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와 내가 지향하는 가치 속에서만 비로소 '나'일 수 있다는 뜻이지요.


대니얼 데닛 (Daniel Dennett)과 서사적 중력의 중심으로서의 자아

미국의 인지철학자 대니얼 데닛은 '나'라는 것을 뇌 속에 존재하는 특별한 영혼이나 실체가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의 중력 중심'과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나는 왜 나야?"라는 질문에, 데닛은 '나'라는 것이 동화 속 '빛알'처럼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경험과 기억, 생각들이 모여들어 마치 '나'라는 중심이 있는 것처럼 만들어내는 일종의 '유용한 허구'일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는 '나'를 신비로운 존재가 아닌, 뇌가 만들어내는 복잡한 현상으로 바라보는 현대적인 시각이에요.





[교실의 철학 수업]


작년, <윤리와 사상> 시간, '나는 누구인가'라는 가장 낡고도 가장 절실한 질문을 칠판에 적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포스트잇 10장씩을 나누어 주며 말했다.


"지금부터 '나는 [ ]이다'라는 문장을 10개 완성해서 칠판에 붙여보자. 단, 반 번호 이름은 쓰지 말고."


교실은 잠시 술렁이다 이내 펜 소리로 채워졌다. 얼마 뒤, 칠판은 아이들의 정체성으로 가득 찼다.

'나는 고3 수험생이다.'

'나는 우리 집 장남이다.'

'나는 182cm이다.'

'나는 매운 떡볶이를 사랑한다.'

'나는 ENTP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입시 노예다.'

'나는 엄마의 자랑이다.' (혹은 '엄마의 짐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 자신의 역할, 좋아하는 것, 혹은 자신의 상태를 '나'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한 아이의 포스트잇 10장은 모두 비어 있고, 마지막 한 장에만 딱 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나."


나는 그 아이를 불렀다.

"다른 건 왜 안 적었어?" 아이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제가 '고3'인 건 맞는데, 그게 '나'는 아니잖아요. '베이스 배우는 걸 좋아하는 것'도 '나'의 일부일 뿐이고... '나'는 그냥 '나'인데, 그걸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교실은 순간 조용해졌다. 아이들은 그 아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내가 가진 것(What I am)'을 적어낼 때, 이 아이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That I am)' 그 자체 앞에서 멈춰 섰던 것이다. 둘째 아이가 잠자리에서 던졌던 "나는 왜 나야?"라는 질문에, 내 앞의 고3 아이는 온몸으로 부딪히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나'를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는지 답을 내리지 못했다. 어쩌면 교실이란, 정답을 찾는 곳이 아니라, '나는 나'라는 이 거대한 우연과 필연 앞에서 함께 길을 잃고, 함께 어깨를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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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