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 "웃으면서 찌르면 욕이 아니야?"

[창작동화]구렁이와 고슴도치 마을- 부르디외, 비트겐슈타인, 장자, 갈퉁

by 오이랑

[대화의 발견]

평일 저녁 6시, 우리 집 거실은 맛있는 소리로 가득 찬다. 초등학교 2학년 딸아이는 이 시간대의 단골손님인 맛집 소개 프로그램의 애청자다. 화면 속 주인공이 면발을 빨아올리는 '후루루 쩝쩝'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아이는 마치 자기가 먹는 양 입을 오물거리며 그 소리를 즐긴다. 저녁식사 전 식욕을 돋우는 애피타이저 같은 시간이랄까? 평화로운 저녁 풍경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리모컨을 쥔 채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면 속 리포터가 국밥 한 그릇을 비우며 감탄사를 내뱉은 직후였다.


"엄마! 저 아저씨 봐. '와, 이 국물 맛 미쳤다!' 그랬지? 방금 분명히 그랬지? 근데 왜 경찰이 안 잡아가? 왜 선생님한테 안 혼나냐고! 왜 저런 말이 티비에 나와!!"


당황한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오늘 학교에서 겪은 억울한 사연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오늘 미술 시간에 짝꿍이 그림을 진짜 잘 그렸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너무 멋져서 '와, 너 진짜 미쳤다! 대박이야!'라고 해줬어. 칭찬한 거란 말이야. 근데 옆에 있던 M이 선생님한테 쪼르르 가서 일렀어. 내가 욕했다고. 선생님은 나만 따로 불러서 친구한테 그런 나쁜 말 쓰면 안 된다고 혼냈어. 나는 진짜 좋아서 그런 건데… 너무 억울해!"


아이는 TV 화면을 가리키며 분통을 터뜨렸다.

"근데 봐봐. TV에서도 맛있는 거 먹으면 다 '미쳤다'고 하잖아. 저건 칭찬이고, 내가 쓴 건 욕이야? 어른들은 왜 자기들 맘대로야?"


그러더니 씩씩거리며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린다.

"그리고 할머니가 나 엉덩이 두드리면서 '아이고, 우리 똥강아지~' 그러잖아. 똥개는 나쁜 말인데, 왜 할머니가 하면 기분이 좋아? 말은 껍데기가 중요한 거야, 마음이가 중요한 거야??"


단어라는 '껍데기'와 그 안에 담긴 '의도' 사이. 2학년 아이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이중적인 언어 규범의 모순을 정확히 찌르고 있었다.




[창작동화] 비단 구렁이와 가시 고슴도치 마을

말의 모양이 눈에 보이는 신비한 숲이 있었다. 이 숲에는 강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두 마을이 있었다.


강 동쪽은 비단구렁이 마을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고 예쁜 단어만 썼다. 그들의 입에서는 반짝이는 비단 리본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리본 끝에는 아주 얇고 날카로운 면도날이 숨겨져 있었다.


"어머, 넌 정말 노력파구나. 머리가 나쁘면 몸이라도 고생해야지, 호호."


웃으며 건넨 비단 리본은 상대의 목을 조르거나 살갗을 베어냈다.


강 서쪽은 가시 고슴도치 마을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투박하고 거친 단어를 썼다. 그들의 입에서는 뾰족한 가시들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가시는 닿자마자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이야, 미친! 이거 완전 대박이네. 이걸 어떻게 혼자 다 했냐?"


툭 던진 가시는 상대에게 닿는 순간 달콤한 칭찬으로 변해 스며들었다. 겉은 거칠었지만 속엔 뜨거운 감탄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숲을 지나던 여행자는 고민에 빠졌다.


'아름답지만 상처를 주는 비단과, 투박하지만 달콤한 가시. 과연 어느 쪽이 진짜 '나쁜 말'일까?'




사전적 의미와 사회적 맥락 | 단어의 뜻은 누가 정하나요?

사전 속의 '미치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실제 우리 삶의 맥락 속에서는 '최고의 찬사'로 쓰이기도 합니다. 단어의 기계적 의미와 그 말이 쓰인 살아있는 상황 중 무엇이 더 본질적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 | 비단 리본으로 상처를 줄 수 있을까요?

M은 '바른말'이라는 형식을 빌려 고자질했지만, 그 의도는 친구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욕설이라는 껍데기를 금지하는 데 급급해, 그 안에 숨겨진 날카로운 알맹이(의도)는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언어의 권력과 규정 | 왜 어른의 '미쳤다'는 되고 아이의 '미쳤다'는 안 되나요?

TV 속 어른의 말은 유행어가 되고, 교실 속 아이의 말은 징계의 대상이 되는 현실은 언어를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는 기준 뒤에 숨은 사회적 권력을 짐작하게 합니다.


언어의 수행적 힘 | 말은 설명인가요, 행동인가요?

아이가 "미쳤다!"라고 외쳤을 때, 그것은 사실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감탄하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말이 단순히 소리가 아니라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실질적인 '행동'이라면, 우리는 말의 껍데기보다 그 행동의 목적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언어가 가진 힘과 의도, 그리고 폭력의 구조에 대해 깊이 고민한 동서양의 사상가들을 만나보겠습니다.


J.L. 오스틴(J.L. Austin)의 화행론(Speech Act Theory)

오스틴은 말이 단순히 사실을 진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 어떤 행위를 수행한다고 보았습니다. 아이가 "와, 미쳤다!"라고 했을 때, 이것은 사전적 정보를 전달한 것이 아니라 최고의 찬사를 보내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오스틴의 눈으로 보면, 아이는 욕을 한 게 아니라 칭찬이라는 '행동'을 한 셈입니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상징적 폭력(Symbolic Violence)

부르디외는 올바른 언어 규범이나 권위를 내세워 상대를 제압하는 것을 '상징적 폭력'이라 했습니다. M이 선생님께 쪼르르 달려가 이르던 장면을 떠올려보세요. M은 학교의 규칙(표준어 사용)이라는 정당성을 무기로 친구를 혼나게 만들었습니다. 비단구렁이 마을처럼, 가장 예의 바른 태도로 행해지는 폭력이 때로는 욕설보다 더 아프고 잔인합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의 언어 게임(Language Game)

비트겐슈타인은 단어의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게임의 규칙) 속에서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TV 예능이라는 게임과 아이들의 또래 집단이라는 게임에서 '미쳤다'는 '훌륭하다'와 동의어입니다. 이 맥락을 무시하고 국어사전을 들이미는 것은, 축구 경기장에서 야구 규칙을 따지며 반칙이라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장자(莊子)의 득어망언(得魚忘筌)

동양의 철학자 장자는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은 잊어라(득어망언)"고 했습니다. 말(언어)은 뜻(마음)을 전달하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죠. 할머니가 "똥강아지~"라고 했을 때, 사랑이라는 물고기를 잡았다면 똥강아지라는 거친 통발은 잊어도 좋습니다. 껍데기에 집착해 알맹이를 버리는 어리석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요한 갈퉁(Johan Galtung)의 문화적 폭력(Cultural Violence)

평화학자 갈퉁은 폭력을 직접적, 구조적, 문화적 폭력으로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특정 단어를 욕으로 규정하고, 아이들의 언어문화를 저급한 것으로 치부하며 교정하려 드는 태도 또한 넓은 의미에서 '문화적 폭력'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언어 세계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어른의 잣대로만 재단하는 것 역시 평화롭지 못한 태도일 테니까요.




[교실의 철학 수업]

'생활과 윤리' 시간, 갈퉁의 폭력과 평화에 대해 수업하던 중이었다.

"갈퉁은 때리는 것만 폭력이 아니라고 했지? 빈곤 같은 구조적 폭력, 그리고 언어와 예술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문화적 폭력도 있다고 했어."


설명을 듣던 맨 앞줄 녀석이 손을 들었다.

"쌤, 그럼 욕은 안 썼는데 기분 나쁘게 말하는 '팩트 폭력(팩폭)'도 갈퉁이 말한 폭력에 들어가요?"


아이의 질문에 교실이 웅성거렸다. 나는 교과서를 잠시 덮고 칠판에 크게 <언어의 타격감 측정>이라고 적었다.

"좋은 질문이다. 자, 지금부터 갈퉁의 입장이 되어 너희가 듣는 말들의 실제 타격감을 측정해 보자. 욕설 사전에 있냐 없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 영혼을 얼마나 때리는지가 기준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두 가지 상황을 제시하고, 각각의 데미지를 1부터 10까지 숫자로 매겨보라고 했다.


- 상황 A: 절친이 급식으로 나온 돈가스를 한 입 먹으며, "와, 미친놈. 이거 맛 도라방스(돌아버리겠다)네. 진짜 미쳤다."라고 했을 때.

- 상황 B: 시험 망친 날, 부모님(혹은 선생님)이 세상에서 가장 차분한 목소리로 "너는 생각이란 게 있니? 미래가 참 훤히 보인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라고 했을 때.


간단히 구글 설문을 만들어 교실 티비에 큐알로 띄웠다. 우리 남고생들의 반응은 역시나 즉각적이었다.

- 상황 A의 평균 데미지: 0 (오히려 공감 효과 상승, 식욕 증진 +10)

- 상황 B의 평균 데미지: 9.9 (치명타, 멘탈 붕괴, 반박 불가라 더 화남)


"쌤, A는 쌍욕이 들어갔어도 타격감이 제로예요. '미친놈' 소리 들으면서 먹으면 더 맛있을 거 같아요."

"A는 왜 기분이 하나도 안나쁘죠? 오히려 돈가스와 환상궁합! 식욕이 막 생깁니다."

"B는... 진짜 욕 하나도 없는데 듣자마자 명치 맞은 거 같아요. 갈퉁 행님이 살아계셨으면 이것도 직접적 폭력으로 쳤을걸요? 진짜 아프거든요."

"B는 뭐.... 영혼이 가루가 되거든요. 에휴. 남일이 아니네요."


아이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으며 내가 정리했다.

"그렇지?. 장자(莊子)는 말의 껍데기보다 알맹이가 중요하다고 했고, 부르디외는 점잖은 말로 상처 주는 걸 '상징적 폭력'이라고 했어. 상황 B처럼 '너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포장된 비난이야말로 영혼을 베는 가장 날카로운 비단 칼일지 모른다."


수업 종료 종이 울렸다. 나는 문을 나서며 아이들에게 툭 던지듯 과제를 냈다.

"오늘 야자 끝나고 친구한테 비속어는 없지만 뼈 때리는 말 대신, 투박해도 솜사탕 같은 말 딱 한 번만 해봐라. 예를 들면, '꺼져' 대신 '고생했다, 좀비들아' 정도?"

"으악, 쌤! 그게 더 오글거려요!"


녀석들은 질색하며 손사래를 쳤지만, 왁자지껄하게 복도로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의 등 뒤로 거칠지만 정겨운 외침들이 들려왔다.

"야 이 미친 자식아, 축구하러 가자! 내가 캐리한다."


그 거친 껍데기 속에 숨겨진 뜨거운 우정이라는 알맹이를, 녀석들은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