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를 찔러 空을 품고 無로 돌아가는 시간

허(虛)를 찔러 공(空)을 품고, 무(無)로 돌아가는 코바늘 뜨개 시간!

by 오이랑

나의 코바늘은 고립에서 시작되었다.


코로나가 세상을 휩쓸던 어느 날, 우리 가족에게 밀접접촉자라는 이름표가 붙었다. 확진자와 가까운 거리에서 접촉했다는 이유만으로 분류된, 피할 수 없는 낙인이었다. 보건소의 통보와 함께 우리는 집이라는 섬에 갇혔다.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는 단호했다. 2주간의 철저한 격리. 현관문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형벌 같은 시간이었다.


어른인 나조차 견디기 힘든 이 유폐의 시간을, 한창 뛰어놀아야 할 어린아이들과 함께 견뎌야 한다는 사실이 더 큰 공포였다. 혹시나 아이들에게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 24시간 내내 좁은 집 안에서 아이들의 짜증과 투정을 오롯이 받아내야 하는 육아의 밀도. 도망칠 곳 없는 공간에서 나는 점점 질식할 것 같았다.


그 숨 막힘을 시각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은 뒷 베란다에 쌓여가는 쓰레기였다. 방역 수칙상 자가격리자는 격리가 해제되어 음성 판정을 받을 때까지 쓰레기를 밖으로 배출할 수 없었다. 집 안에서 나온 모든 것은 잠재적 오염원이었다. 차마 내다 버리지 못한 쓰레기봉투가 날이 갈수록 산처럼 쌓여갔고, 내 머릿속에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라는 잡념의 쓰레기들이 출구 없이 썩어가고 있었다.


숨 쉴 구멍이 필요했다.


그때 유튜브 선생님을 모셔두고 처음 코바늘을 잡았다. 고등학교 가정 시간에 배웠던 기억은 희미했지만, 손은 용케 그 감각을 기억해 냈다. 단순한 반복. 실을 감고, 바늘을 찌르고, 빼내고. 그 단순한 행위가 신기하게도 머릿속의 소음을 하나둘 지워냈다.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해 냄새를 풍기던 뒷 베란다 구석 쓰레기와 달리, 내 안의 불안은 바늘 끝을 타고 밖으로 배출되고 있었다. 그렇게 완성한 담요 한 장. 그것은 단순한 털실 뭉치가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해 낸 뿌듯함의 실체였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다시 코바늘을 잡았다. 이번엔 타의로 고립된 방 안이 아니라, 우리집 아이들이 다니는 동네 뜨개방 한구석이다. 주 1회, 딸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실을 엮는 동안 나도 그 곁에서 조용히 바늘을 놀린다.


함께여서 좋고,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층(layer)을 쌓고 있는 우리가 좋다. 단순한 반복 같지만, 뜨개질은 묘하게도 철학을 닮았다. 바늘 끝에서 코가 만들어지고, 그 코들이 얽혀 면을 이루는 과정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생각한다. 내가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그토록 설명하려 애썼던 허(虛), 공(空), 무(無)가 바로 이 손끝에 다 있구나, 하고 말이다.


첫 코를 잡으며 허(虛)를 배운다.

이것은 바늘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틈이다. 바늘을 찔러 넣으려다 멈칫한다. 아차, 전 단에서 실을 너무 꽉 조여 짰다. 바늘이 들어갈 틈이 없다. 뜨개질에서는 이 헐거운 구멍, 즉 루프(loop)가 있어야만 다음 코를 만들 수 있다. 성리학에서는 이를 허령불매(虛靈不昧)라 했던가. 텅 비어 신령스럽고 어둡지 않은 마음. 거울이 텅 비어 있어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듯, 내 마음에도 허(虛)가 있어야 세상을 담을 수 있다. 20년 차 윤리 교사로서 나는 과연 얼마나 헐거운 사람이었을까. 아이들에게 정답을 욱여넣으려, 내 기준에 맞춰 아이들을 꽉 조였던 건 아닐까 반성한다. 수업 시간, 질문을 던지고 찾아오는 정적을 견디지 못해 황급히 답을 말해버리던 조급함은 ‘허’가 없는 상태였다. 바늘이 쑥 들어가는 이 쾌적한 틈처럼, 이제는 아이들의 엉뚱한 대답이나 철없는 소리도 “그래?” 하고 쑥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본다. 그 비어있음은 무능이 아니라,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의도된 초대다.


한 단, 두 단 쌓여가는 편물을 만지며 공(空)을 느낀다.

너와 나 사이의 따뜻한 공기층이다. 보드랍고 따뜻하다. 사실 이 따뜻함은 털실 자체가 아니라, 실과 실이 얽히며 만들어낸 수많은 구멍, 그 사이에 머문 공기 덕분이다. 불교의 반야심경이 말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은 허무가 아닌 연기(緣起)의 미학이다. 실 한 가닥은 옷이 될 수 없지만, 서로 얽히고설키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스웨터’라는 실체가 드러난다. 고정된 실체는 없다. 오직 얽힘만이 있을 뿐이다. 엄마로서의 나도 그렇다. 사춘기에 접어드는 딸아이와 나 사이, 너무 촘촘하게 옥죄면 서로 숨이 막혀 열이 오른다. 반대로 너무 성기면 한기가 든다. 뜨개질 조직(texture)이 품은 적당한 공기층처럼, 아이와 나 사이에도 공(空)이 필요하다. 나의 간섭이 멈추는 곳, 아이의 자립이 시작되는 그 사이의 공간. 그 거리감이 우리 관계를 식지 않게 만드는 온기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서로 꽉 묶인 매듭이 아니라, 적당한 틈을 두고 얽혀 서로를 지탱하는 연기적 존재들이니까.


그러다 실수를 발견하면 무(無)로 돌아간다.

그것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자유다. 뜨개질을 하다 보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 땐 주저 없이 바늘을 빼고 실을 잡아당긴다. 주르륵. 순식간에 몇 시간의 노력이 사라지고, 꼬불꼬불한 실 한 뭉치만 남는다. 형체는 사라졌다. 하지만 이것은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무(無)다. 단순히 없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낳는 어미이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교사라는 직함, 엄마라는 책임, 아내라는 역할... 어깨를 짓누르는 그 무거운 형상(有)들을 다 풀어내고 나면, 쭈글쭈글하지만 본질만 남은 실뭉치로서의 나와 마주하게 된다. 대학 시절, 철학이 좋아 술잔과 함께 밤새 토론하던 그 순수한 열정 덩어리 말이다. 이 ‘무’의 시간은 절망이 아니다. 나는 다시 조끼를 짤 수도, 목도리를 짤 수도, 아니면 그냥 실뭉치인 채로 뒹굴 수도 있다. 모든 규정이 사라진 자리에서 느껴지는 해방감. 가끔은 삶에서도 이렇게 과감하게 ‘풀어내기(unraveling)’가 필요하다.



다시 바늘을 잡는다.


오른쪽 바늘을 왼쪽 코의 허(虛)공에 찔러 넣고, 실을 감아 공(空)기층을 만들며, 언제든 다시 풀 수 있는 무(無)의 자유를 손끝으로 느낀다.


결국 이 뜨개질은,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함도, 누군가를 돌보기 위함도 아닌, 오롯이 나를 위한 수행이었다. 교단에 서는 윤리 교사이기 전에,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기 전에, 나는 내 삶을 한 코 한 코 원하는 대로 짤 수도 있고 과감히 풀어버릴 수도 있는 자유로운 뜨개질쟁이다.


내일 또다시 엉킨 실타래 같은 일상이 닥쳐올지라도 괜찮다. 나에게는 언제든 바늘을 찔러 넣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虛)가 있고,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관계의 틈(空)이 있으며,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본연의 나(無)가 있으니까.


나는 오늘도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층을 묵묵히 쌓아 올린다.





[감사의 말] 이 글은 지난 < 노자, 내 거 하자? > 글에 morgen 작가님께서 남겨주신 소중한 댓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내 삶과 관계있는 답을 찾아보자"는 작가님의 제안이 없었다면, 관념 속에 머물던 철학을 제 손끝으로 가져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덕분에 익숙한 코바늘 끝에서 새로운 우주를 만났습니다. 제 삶에 영감의 실마리를 쥐여주신 morgen 작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morgen작가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요즘 자주 들고 다니는 제가 뜬 가방입니다 :) 어설퍼서 더 좋은 내 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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