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펑펑 쏟아지던 며칠 전, 첫째 아이의 휴대전화가 그 하얀 세상 속으로 사라졌다. 학원을 마치고 나와 눈 뭉치 놀이를 하다 주머니에서 빠졌다나. 친구 전화로 걸려온 아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수화기를 든 내 안에서는 정반대의 화학작용이 일어나고 있었다. 걱정? 안타까움? 아니다. 내 속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시뻘건 마그마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일단 집으로 들어와.”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가. 평소 나는 감정의 엑셀을 꾹 밟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급발진을 경계하며 이성의 브레이크를 자주 점검하는 편인데, 이날은 유독 나조차 당황스러울 만큼 정체 모를 화가 명치끝까지 차올랐다.
대체 왜일까. 아이의 부주의함에 대한 실망? 약정 기간이 남은 기계값에 대한 자본주의적 분노? 아니면 완벽하게 통제되지 않는 육아에 대한 히스테리? 그것도 아니라면 며칠째 이어진 업무 스트레스가 임계점을 넘은 걸까, 혹은 지난밤 설친 잠 때문에 곤두선 신경 탓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확실한 건 하나였다. 이 끈적하고 뜨거운 화살이 죄 없는 아이에게 날아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 내 화의 진짜 원인은 내 안에 쌓인 찌꺼기들일 텐데, 겉으로 드러나는 명분은 아이의 실수가 되기 딱 좋았다. 그게 무서웠다. 이 상태로 아이를 마주하면 나는 엄마가 아니라, 불을 뿜는 용이 될 게 뻔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나는 내 지성이 아닌 인공지능을 호출했다. 불을 끄기 위해 내가 선택한 비상벨이 119도, 남편도, 친정엄마도, 친구도 아닌 챗GPT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찼지만, 나는 텍스트 입력창에 내 분노를 쏟아내고 물었다.
"나 너무 화가 나. 어떻게 해야 해?"
인류의 데이터를 학습했다는 이 기계는, 내 뜨거운 분노가 무색하게 단 몇 초 만에 답을 출력해 냈다.
"널 잃은 게 아니니까 괜찮아."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나의 편도체가 분노로 날뛰는 동안, 감정이 거세된 알고리즘은 가장 이상적인 엄마의 언어를 내놓았다. 나는 그 문장을 입안에서 몇 번 굴려보았다. 내 것이 아니지만, 내 것이어야만 하는 문장이었다.
GPT의 답을 확인한 직후, 둘째 아이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눈 구경 겸 집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첫째를 기다리는 동안, 펄펄 끓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다.
저 멀리서 아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죄인처럼 잔뜩 움츠린 그 모습을 보자, 나는 홀린 듯 AI가 건네준 대사를 읊었다.
"널 잃은 게 아니니까 괜찮아~"
아이는 금세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안도했다. 그 눈빛은 엄마의 넓은 아량에 대한 존경과 감동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안아주는 내 마음속에서는 기묘한 사이렌이 울렸다.
'아, 이 이상한 기분은 뭐지? 엄마로서의 내 자격이 순간 제거된 듯한, 혹은 누군가에게 뺏긴 듯한 이 느낌. 내가 아이 앞에서 별거 아닌 존재가 된 듯한 이 박탈감.'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시뮬라크르(Simulacre)를 이야기했다. 원본 없는 이미지가 원본을 대체하는 세상. 방금 아이가 감동받은 자애로운 엄마는 실재하는 나인가, 아니면 GPT가 만들어낸 시뮬라크르인가?
나는 순간 엄마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한 기분이 들었다. 내 인격의 그릇이 작아 담지 못한 말을 기계가 대신 채워줬다는 사실은, 편리함보다는 일종의 패배감에 가까웠다. 나의 감정적 바닥을 기계에게 들킨 것 같은 부끄러움, 그리고 가장 인간적인 위로의 영역조차 기술이 더 잘 수행할 수 있다는 섬뜩함.
하지만 아이를 재우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패배감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AI는 화를 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AI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고, 애정이 없으니 분노도 없다. 녀석이 내놓은 그 완벽한 정답은 역설적으로 '사랑 없음'에서 나온 차가운 연산의 결과값이다.
반면, 나의 그 펄펄 끓던 화는 아이를 향한 뜨거운 애착과 걱정, 그리고 내 삶의 고단함이 뒤엉킨 지극히 인간적인 오류였다. 나는 그 오작동하는 마음을 붙잡고, 어떻게든 아이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비록 그 해답을 내 안에서 찾지 못해 외부에서 빌려왔을지라도, 그 문장을 아이에게 건네기로 '결단'한 것은 기계가 아닌 나였다.
기계가 준 것은 텍스트 뿐이었지만, 그 텍스트에 ‘온기’를 입히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더한 것은 결국 나의 몫이었으니까.
어차피 나는 애초부터 완벽한 엄마는 아니다. 이번에 난 완벽함을 잃은 상실감이 아닌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순간에는 기꺼이 타자의 손을 잡는 법을 배웠다. 비록 그 손이 체온 없는 기계의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내 안의 들끓는 화를 잠재우기 위해 외부의 논리를 빌려온 그 순간, 나는 비로소 고립된 감정의 독방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여전히 기분이 묘하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나의 모성이, 0과 1로 이루어진 차가운 데이터보다 위태롭다는 사실을 확인한 기분이라서. 나의 본성이란 결국 이토록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것인가 싶어 씁쓸하기도 하다.
하지만 뭐 어떤가. 내 모성의 일부가 클라우드 어딘가로 흩어졌다 한들, 그 빈 껍데기 같은 문장 속에서 아이가 진짜 안도감을 느꼈다면 말이다.
나는 결심했다. 내 비좁은 그릇으로 너를 다 담을 수 없을 땐, 기꺼이 이 차가운 기계의 이성을 빌려 쓰기로. 비록 그것이 원본 없는 가면일지라도, 그 가면이 너를 다치지 않게 하는 방패가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것을 뒤집어쓰겠다.
그렇게 해서라도 너를 지킬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언제든, '사랑스러운 시뮬라크르'를 자처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