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학년도 수능, 국어 - 노자(도덕경)를 해석한 한비자와 유학자들
(가)
『한비자』는 중국 전국 시대의 한비자가 제시한 사상이 담긴 저작이다. 여러 나라가 패권을 다투던 혼란기를 맞아 엄격한 법치를 통해 부국강병을 꾀한 한비자는 『노자』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자신의 법치 사상을 뒷받침했고, 이러한 면모는 『한비자』의 「해로」, 「유로」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노자』에서 ‘도(道)’는 만물 생성의 근원으로 묘사된다. 도를 천지 만물의 존재와 본질의 근거라고 본 한비자의 이해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는 자연과 인간 사회의 모든 현상은 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보고, 인간 사회의 일은 도에 따라 제대로 행했는가의 여부에 따라 그 성패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한비자는 『노자』에 제시된 영구불변하는 도의 항상성에 대해 도가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도가 모습과 이치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도는 형체가 없을 뿐 아니라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때와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하는 것이라고 파악 했다. 도가 가변성을 가지고 있어야 도가 일정한 곳에만 있지 않게 되고, 그래야만 도가 모든 사물의 존재와 본질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파악한 것이다. 그는 도가 가변적이기 때문에 통치술도 고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한편, 한비자는 도를 구체적인 사물과 사건에 내재한 개별 법칙의 통합으로 보고, 『노자』의 도에 시비 판단의 근거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항상 존재하는 도는 개별 법칙을 포괄하기 때문에 다양한 개별 사건의 시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고, 이러한 도에 근거해서 입법해야 다양한 사건을 판단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는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을 사회 혼란의 원인으로 지목한 『노자』의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노자』에서처럼 욕망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고 인간은 욕망을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며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 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나)
유학자들은 도를 인간 삶의 올바른 길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중국 송나라 이후, 유학자들은 이러한 유학의 도를 기반으로 현상 세계 너머의 근원으로서 도가의 도에 주목하여 『노자』주석을 전개했다.
혼란기를 거친 송나라 초기에 중앙집권화가 추진된 이후 정치적 갈등이 드러나면서 개혁의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러한 분위기하에서 유학자이자 개혁 사상가인 왕안석은 『노자주』를 저술했다. 그는 『노자』의 도를 만물의 물질적 근원인 ‘기(氣)’라고 파악하고, 현상 세계에 앞서 존재하는 기의 작용에 의해 사물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그는 기가 시시각각 변화하듯 현상 세계도 변화한다고 이해했다. 인위적인 것을 제거해야만 도가 드러나고 인간 사회가 안정된다는 『노자』를 비판한 그는 자연과 달리 인간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는 제도와 규범의 제정과 같은 인간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지혜와 덕이 뛰어난 사람이 제정한 사회 제도와 규범도 현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노자』의 이상 정치가 실현 되려면 유학 이념이 실질적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 하는 등 왕안석은 『노자』를 유학의 실천적 측면과 결부하여 이해했다.
송 이후 원나라에 이르러 성행하던 도교는 유학과 불교 등을 받아들여 체계화되었지만, 오징에게는 주술적인 종교에 불과했다. 유학자의 입장에서 그는 잘못된 가르침을 펴는 도교에 사람 들이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도교의 시조로 간주된 노자의 가르침이 공자의 학문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밝히고자 『도덕진경주』를 저술했다. 그는 도와 유학 이념을 관련짓는 구절을 추가하는 등 『노자』의 일부 내용을 바꾸고 기존 구성 체제를 재편했다. 『노자』의 도를 근원적인 불변하는 도로 본 그는 모든 이치를 내재한 도가 현실화하여 천지 만물이 생성된다고 이해 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유학의 인의예지가 도의 쇠퇴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는 『노자』와 달리 도가 현실화하여 드러난 것으로 해석하고,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사회 규범과 사회 질서 체계도 도가 현실화한 결과로 파악했다.
원이 쇠퇴하고 명나라가 들어선 이후 유학과 도가 등 여러 사상이 합류하는 사조가 무르익는 가운데, 유학자인 설혜는 자신의 학문적 소신에 따라 『노자』를 주석한 『노자집해』를 저술했다. 그는 공자도 존중했던 스승이 노자이므로 노자 사상에 대한 오해를 불식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기존의 주석서가 『노자』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밝히지 못했기 때문에 유학자 들이 노자 사상을 이단으로 치부했다고 파악한 것이다. 다양한 경전을 인용하여 『노자』를 해석하면서 그는 『노자』의 도를 인간의 도덕 본성과 그것의 근거인 천명으로 이해하고, 본성과 천명의 이치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노자 사상과 유학이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노자』에서 인의 등을 비판한 것은 도덕을 근본으로 삼게 하기 위한 충고라고 파악했다
심리학에는 ‘로르샤흐 테스트’라는 것이 있다. 데칼코마니처럼 찍힌 잉크 얼룩을 보여주고 “뭐가 보입니까?”라고 묻는다. 누군가는 ‘나비’를 보고, 누군가는 ‘악마’를 본다. 그림은 똑같은데 보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해석이 천지 차이로 갈린다.
동양 철학사에도 이런 거대한 잉크 얼룩 같은 책이 하나 있다. 바로 춘추전국시대의 전설, 노자(老子)가 쓴 『도덕경』이다. 5,000자 남짓한 이 짧고 모호한 시집을 두고, 지난 2,500년 동안 수많은 천재가 서로 “내가 본 게 진짜다!”라며 멱살잡이를 했다.
2024학년도 수능 국어 지문은 바로 이 해석 전쟁을 다룬다. 텍스트는 하나인데, 왜 누군가(법가)는 ‘권력의 칼’을 보고, 누군가(유가)는 ‘도덕의 방패’를 보았을까? 이 흥미진진한 지적 투쟁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이 싸움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들이 서 있던 거대한 ‘판’을 읽어야 한다. 기원전 5세기에서 3세기에 이르는 중국은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 이름 그대로 전쟁의 시대였다. 기존의 질서였던 주나라가 무너져 내리자 수백 명의 제후가 저마다 “내가 왕이다”라며 칼을 휘둘렀고, 그 칼끝에서 백성들은 매일같이 죽어 나갔다. 이 지옥 같은 난세를 끝내기 위해 수많은 사상가가 혜성처럼 등장했으니, 우리는 이들을 일컬어 제자백가(諸子百家)라 부른다.
가장 먼저 깃발을 든 것은 공자와 맹자로 대표되는 유가(儒家)였다. 그들은 세상이 망가진 원인을 인간이 ‘예의와 도덕’을 잃어버린 데서 찾았다. 진단이 이러하니 처방 또한 명확했다. 그들은 국가를 하나의 거대한 가족으로 보았다.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듯 군주가 인(仁)과 의(義)로 다스리는 ‘덕치’를 행한다면, 백성은 감화되어 저절로 따를 것이라는 이상주의적 해법을 제시했다.
반면 노자와 장자의 도가(道家)는 유가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등장했다. 그들은 “유가 너희들이 설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일갈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도덕과 시비분별이야말로 사람을 병들게 하는 원흉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처방은 ‘다 내려놓으라’는 것이었다. 인위적인 껍데기를 버리고 자연의 순리인 ‘무위자연’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도가가 추구한 반문화적이면서도 자유주의적인 길이었다.
마지막으로 전국시대의 혼란이 극에 달했을 때, 한비자의 법가(法家)가 냉혹한 현실주의를 들고나왔다. 그는 “착한 척하지 마라. 전쟁터에서 도덕을 찾다가는 다 죽는다”라며 유가의 이상론을 비웃었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인 존재이기에 믿을 수 없으며, 오직 강력한 법과 권력으로 철저히 통제해야만 나라가 살 수 있다는 국가주의적 해법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왜 유가와 법가는 서로 앙숙이면서도 똑같이 노자를 탐냈을까? 여기에는 세 가지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째, 노자의 책은 정밀한 설계도가 아니라 거대한 추상화같았기 때문이다.
보통의 사상서나 법전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용어를 엄밀하게 정의하고 논리를 전개한다. 하지만 노자는 정반대다. 그는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늘 그러한-영원한-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은 늘 그러한-영원한 이름이 아니다.)”라며 시작부터 언어의 한계를 선언해 버린다.
가령 노자가 핵심으로 내세운 무위(無爲)라는 단어를 보자. 이것이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말고 누워있으라’는 뜻인지, ‘억지로 꾸미지 말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라’는 윤리적 조언인지, 아니면 ‘군주는 나서지 말고 시스템에 맡겨라’는 고도의 정치적 침묵인지 텍스트만 봐서는 단정할 길이 없다. 마치 주어가 빠진 시 구절처럼 텅 비어있는 것이다. 바로 이 의도된 공백 덕분에 후대 사람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논리를 마음껏 채워 넣을 수 있었다.
유가는 그 빈 그릇에 도덕을 담았고, 법가는 권력을 담았다. 즉, 구체적인 정의가 없었기에 역설적으로 그 어떤 사상도 담아낼 수 있는, ‘耳懸鈴 鼻懸鈴(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 가능한 가장 완벽한 텍스트였던 셈이다.
둘째, 정치적으로 중요한 캐스팅 보트였다.
사실 유가와 법가는 철저히 지배층의 언어였다. 유가는 신분을 나누고 예법을 따지는 분별(分別)에 집착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백성 입장에서는 “너는 아랫사람이니 예를 갖춰라”라는 말이 그저 깐깐한 잔소리이자 억압처럼 들렸을 것이다. 법가는 한술 더 떠서 시스템과 처벌을 통한 강력한 통제를 주장했다. 이는 백성들에게 숨 막히는 감시와 채찍질이나 다름없었다.
끝없는 전쟁과 노역에 지친 당시 민초들에게 이 두 지배 이념은 너무나 가혹하고 피곤한 것이었다. 반면, 노자의 도가 사상은 “다 부질없다. 억지로 하지 말고(무위), 자연스럽게 살아라”라며 지친 영혼을 달래주는 유일한 숨 쉴 구멍이었다. 당연히 거대한 민심은 노자를 향해 있었다.
이때 지배층은 깨닫는다. “백성의 마음(민심)을 얻지 못하면 천하를 얻을 수 없다.” 유가나 법가가 자신들의 딱딱한 통치 철학만 고집했다가는 민란이 일어나거나 외면받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민중들이 열광하는 ‘노자’를 자신들의 사상으로 끌어안아야만 했다. 법가는 자신들의 엄격한 통제가 사실은 노자의 뜻이라고 포장했고, 유가는 자신들의 예법이 노자의 자연스러움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득했다. 즉, 노자 해석은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이 아니라, 지배층의 언어(통제와 분별)를 민중의 언어(자연과 치유)로 포장하여 민심을 장악하려 했던 치열한 ‘정치적 영입 전쟁’이었다.
유가의 시비분별에 지친 백성들은 자유로운 노자 사상을 좋아했다. 법가든 유가든 “노자 형님도 사실 우리 편이야!”라고 우겨야만 거대한 민심을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즉, 노자 해석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치열한 정치적 영입 전쟁이었다.
셋째, 자신의 사상을 뒷받침할 형이상학적 권위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장 철학적이고 근본적인 이유다. 당시 법가나 유가나 자신들이 주장하는 통치술이 단순히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얄팍한 잔머리가 아니라, 거스를 수 없는 ‘우주의 섭리(道)’에서 비롯된 것임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법가 입장에서는 “내가 만든 이 엄격한 법은 군주 마음대로 정한 게 아니라, 차가운 우주의 법칙을 그대로 본뜬 것이다”라고 주장해야 백성들의 절대적인 복종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유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말하는 도덕은 사람들끼리의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하늘이 내린 지엄한 명령이다”라고 선언해야만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가질 수 있었다. 결국 동양 사상에서 모든 만물의 뿌리인 ‘도(道)’를 선점하는 자가 세상의 질서를 정의할 수 있는 ‘최고의 보증수표’를 손에 쥐는 구조였던 셈이다.
[Tip] 노자는 사람일까요, 책일까요?
수능 지문을 읽다 보면 ‘노자’라는 단어가 인물을 뜻하는지, 책을 뜻하는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문맥에 따라 둘 다 가능합니다.
동양 고전, 특히 제자백가 시대의 책들은 저자의 존칭이 곧 책의 제목이 되는 관습이 있습니다. 맹자가 쓴 책도 『맹자』, 장자가 쓴 책도 『장자』, 한비자가 쓴 책도 『한비자』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노자가 쓴 책의 정식 명칭은 『도덕경(道德經)』이지만, 학계나 지문에서는 편의상 저자의 이름을 따서 『노자』라고 부르는 경우가 매우 흔합니다. 따라서 지문이나 문제에서 “노자에 따르면~” 또는 “노자에서는~”이라는 표현이 나온다면, 당황하지 말고 “책 『도덕경』의 텍스트에 따르면~”이라고 해석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저자인 ‘노자(사람)’의 사상을 묻는 것과 책인 ‘도덕경(텍스트)’의 내용을 묻는 것은 결국 같은 맥락이니까요.
전국시대 말기, 법가의 집대성자인 한비자는 유가를 이기기 위해 노자의 권위를 빌려온다. 그는 노자의 물렁물렁한 도(道)를 가져와 단단한 법(法)이라는 칼로 둔갑시킨다.
첫째, “변하지 않는 건 ‘변한다는 사실’ 뿐이다!”
노자는 “도는 영원하다”라고 했다. 한비자는 무릎을 탁 친다. “맞아, 도는 영원해. 하지만 그 모습은 상황에 따라 계속 변해(가변성)!” 이것은 유가를 공격하는 치명적인 무기가 된다. 유가들은 “옛날 성왕들의 법을 지키자”며 꼰대 짓을 하는데, 한비자는 “도가 변하듯, 시대가 변하면 법과 통치술도 싹 뜯어고쳐야 한다”라며 개혁의 정당성을 확보한 것이다.
둘째, 도(道) = 통치 기술
노자는 “무위(아무것도 하지 않음)하라”고 했다. 한비자는 이를 기막히게 비튼다. “군주는 신하 앞에서 자신의 호불호를 드러내지 마라(무위). 그래야 신하들이 아첨하지 않고 일만 한다.” 신비로운 자연의 섭리를, 군주가 권력을 휘두르고 신하를 부리는 ‘처세술’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한비자에게 노자는 백성을 휘어잡을 ‘권력의 칼’이었다.
시간이 흘러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가 되었다. 유교가 국교가 되었지만, 대중들 사이에서는 도교와 불교가 엄청난 인기였다. 위기감을 느낀 유학자들은 “적을 이길 수 없다면 흡수하라”는 전략을 쓴다.
1단계, 송나라 왕안석 - 엔진 교체
나라 꼴이 엉망이라 개혁이 필요했다. 왕안석은 노자의 도를 만물의 에너지인 ‘기(氣)’로 해석한다. “기는 역동적이다. 그러니 우리도 제도를 적극적으로 만들어서 세상을 개혁해야 한다!” 노자의 ‘무위’를 정반대인 ‘유위(적극적 개입)’로 해석해 버린 셈이다.
2단계, 원나라 오징 & 명나라 설혜 - 동료 만들기
사람들이 도교 미신에 빠지자, 오징은 말한다. “노자는 그런 사이비가 아냐. 공자님이 말한 인의예지가 바로 도가 현실에 나타난 거야.” 명나라의 설혜도 거든다. “공자님도 노자를 스승이라 했어. 둘은 한 몸이야.” 노자를 유교의 수호신으로 만들어 도교 신자들을 유교 시스템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3단계, 청나라 왕부지 - 팩트 폭격기 (아래, 16번 문제 지문)
자, 이제 마지막 반전이다. 수능 16번 문제의 주인공, 청나라의 왕부지가 등장한다. 그는 앞선 유학자들에게 소리친다. “야! 너희들 왜 노자를 좋게 포장해 줘?” 그는 『노자연』을 써서 노자의 본래 뜻을 적나라하게 깐다. “봐라, 노자는 아무것도 안 하면(무위) 세상이 잘 돌아간다고 뻥을 친다. 이게 현실적으로 말이 되냐?” 그는 노자를 왜곡해서 내 편으로 만드는 대신, 노자의 허구성(비현실성)을 폭로함으로써 반대로 유교의 규범이 얼마나 실용적인지를 증명하려 했다. 일종의 ‘공개 처형’ 전략이다.
[참고 - 16번 문제 지문]
청나라 초기의 유학자 왕부지는 노자의 본래 뜻을 드러 내어 노자 사상을 비판하고자 노자연을 저술했다. 노자 사상의 비현실성을 드러내어 유학의 실용적 가치를 부각 하고자 했던 그는 기존의 노자주석서가 노자 사상이 아닌 사상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노자뿐만 아니라 주석자의 사상마저 왜곡했다고 비판했다. 노자에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천하가 다스려진다고 한 것 등을 비판한 그는, 노자에서처럼 단순히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유학 규범을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노자를 훔친 건 유가와 법가뿐만이 아니었다. 인도에서 건너온 불교도 마찬가지였다.
불교는 앞서 말한 제자백가보다 시기적으로 조금 늦다. 기원전 6세기경 인도에서 석가모니가 창시하였으며, 중국에는 한나라 때인 기원후 1세기경 비단길을 통해 들어왔다. 처음 불교가 들어왔을 때 중국인들은 기겁을 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신체는 부모가 준 것)라 했거늘, 머리를 깎아? 게다가 결혼도 안 하고 자식도 안 낳아? 이런 근본 없는 오랑캐 사상을 봤나!” 유교적 세계관에서 불교는 패륜 그 자체였다. 이때 불교 승려들은 중국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가 막힌 노자 마케팅을 시작한다. 이른바 격의불교(格義佛敎)다.
낯선 인도의 개념을 중국인에게 익숙한 노자의 용어로 번역(의역)하는 전략이었다.
인도의 ‘공(Śūnyatā, 비어있음)’ → 노자의 ‘무(無, 없음)’
인도의 ‘진리(Dharma)’ → 노자의 ‘도(道)’
중국 지식인들은 무릎을 쳤다. “아! 부처라는 양반이 알고 보니 우리 노자 선생님이랑 비슷한 말을 했네? 그 무(無)가 그 공(空)이구나! 그럼 믿을만하지!” 불교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문명에 진입하기 위해 노자라는 문화적 비자(Visa)를 발급받아 통과한 것이다.
[Tip] 격의불교(格義佛敎)란 무엇인가요?
격의불교란 한마디로 인도에서 건너온 낯선 불교 개념을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노자와 장자의 용어를 빌려 설명한 ‘불교의 현지화 전략’입니다.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 중국인들이 내용이 너무 어렵다며 거부감을 느끼자, 승려들은 "여러분이 아는 노자 선생님 말씀과 똑같다"며 낯선 개념을 익숙한 개념에 빗대어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인도의 ‘공(空)’을 노자의 ‘무(無)’로, ‘진리(Dharma)’를 ‘도(道)’로 번역하는 식이었죠. 마치 커피가 처음 들어왔을 때 이해를 돕기 위해 ‘서양 숭늉’이라고 불렀던 것과 비슷합니다. 이 전략 덕분에 불교는 초기에 중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지만, 점차 본래의 뜻이 왜곡된다는 비판을 받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치열한 섞임과 쟁탈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우리가 흔히 동양 철학이라 부르는 것은 어느 한 사상의 독주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생각들이 충돌하고, 훔치고, 융합하며 만들어낸 거대한 지혜의 생태계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매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성취를 향해 달려가는 유가적 삶을 살다가도, 문득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도가적 자유를 꿈꾼다. 그러다 삶의 고통과 허무가 밀려올 때면 마음을 비우고 내면을 응시하는 불교적 성찰을 필요로 한다. 이 모든 사상은 서로 모순되는 듯하지만, 사실은 복잡다단한 우리 인생의 각기 다른 국면을 지탱해 주는 다층적인 지혜로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다.
현대 중국 철학의 거장 풍우란(馮友蘭)은 『중국철학사』에서 그 흐름을 크게 두 시기로 나눈다.
자학(子學) 시대: 제자백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오리지널 사상을 창조하던 '철학자의 시대'. (춘추전국시대)
경학(經學) 시대: 앞선 천재들이 남긴 경전(經)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철학의 전부가 된 '주석의 시대'. (한나라 이후)
이번 2024 수능 지문은 바로 이 경학 시대의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언뜻 보면 경학 시대는 남의 글에 줄이나 긋는 지루한 암흑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풍우란의 통찰은 다르다. 옛사람들은 경전이라는 오래된 술병에 시대 정신이라는 새 술을 끊임없이 채워 넣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없다면, 옛것을 해석하는 방식이라도 바꿔라!” 그것이 동양 철학자들이 사상의 생명력을 유지해 온 처절한 생존 방식이자 혁신이었다.
결국 2024 수능이 학생들에게 묻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고전을 박제된 화석으로만 읽니? 옛사람들은 텍스트(노자)를 있는 그대로 외운 게 아니라, 시대의 문제(전쟁, 개혁, 종교 갈등)를 해결하기 위해 치열하게 ‘재해석(아전인수)’했단다.”
오늘날 우리가 노자를, 그리고 수많은 고전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전은 정해진 답을 주는 해답지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고민과 해석을 기다리는 열린 질문지다. 철학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 땅 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옛 지혜를 끌어다 쓰는 치열한 지적 투쟁이다. 한비자가 노자를 칼로 만들고 유학자가 방패로 만들었듯, 여러분도 이 지식을 여러분의 삶을 지키는 무기로 만드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