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학년도 수능, 국어 - 헤겔 제시문 설명
(가)
정립-반정립-종합. 변증법의 논리적 구조를 일컫는 말이다. 변증법에 따라 철학적 논증을 수행한 인물로는 단연 헤겔이 거명된다. 변증법은 대등한 위상을 지니는 세 범주의 병렬이 아니라, 대립적인 두 범주가 조화로운 통일을 이루어 가는 수렴적 상향성을 구조적 특징으로 한다. 헤겔에게서 변증법은 논증의 방식임을 넘어, 논증 대상 자체의 존재 방식이기도 하다. 즉 세계의 근원적 질서인 ‘이념’의 내적 구조도, 이념이 시ㆍ공간적 현실로서 드러나는 방식도 변증법적이기에, 이념과 현실은 하나의 체계를 이루며, 이 두 차원의 원리를 밝히는 철학적 논증도 변증법적 체계성을 지녀야 한다.
헤겔은 미학도 철저히 변증법적으로 구성된 체계 안에서 다루고자 한다. 그에게서 미학의 대상인 예술은 종교, 철학과 마찬 가지로 ‘절대정신’의 한 형태이다. 절대정신은 절대적 진리인 ‘이념’을 인식하는 인간 정신의 영역을 가리킨다. 예술ㆍ종교ㆍ 철학은 절대적 진리를 동일한 내용으로 하며, 다만 인식 형식의 차이에 따라 구분된다. 절대정신의 세 형태에 각각 대응하는 형식은 직관ㆍ표상ㆍ사유이다. ‘직관’은 주어진 물질적 대상을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지성이고, ‘표상’은 물질적 대상의 유무와 무관하게 내면에서 심상을 떠올리는 지성이며, ‘사유’는 대상을 개념을 통해 파악하는 순수한 논리적 지성이다. 이에 세 형태는 각각 ‘직관하는 절대정신’, ‘표상하는 절대정신’, ‘사유하는 절대정신’으로 규정된다. 헤겔에 따르면 직관의 외면성과 표상의 내면성은 사유에서 종합되고, 이에 맞춰 예술의 객관성과 종교의 주관성은 철학에서 종합된다.
형식 간의 차이로 인해 내용의 인식 수준에는 중대한 차이가 발생한다. 헤겔에게서 절대정신의 내용인 절대적 진리는 본질적으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예술은 직관하고 종교는 표상하며 철학은 사유하기에, 이 세 형태 간에는 단계적 등급이 매겨진다. 즉 예술은 초보 단계의, 종교는 성장 단계의, 철학은 완숙 단계의 절대정신이다. 이에 따라 예술 종교-철학 순의 진행에서 명실상부한 절대정신은 최고의 지성에 의거하는 것, 즉 철학뿐이며, 예술이 절대정신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 지성이 미발달 된 머나먼 과거로 한정된다.
(나)
변증법의 매력은 ‘종합’에 있다. 종합의 범주는 두 대립적 범주 중 하나의 일방적 승리로 끝나도 안 되고, 두 범주의 고유한 본질적 규정이 소멸되는 중화 상태로 나타나도 안 된다. 종합은 양자의 본질적 규정이 유기적 조화를 이루어 질적으로 고양된 최상의 범주가 생성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헤겔이 강조한 변증법의 탁월성도 바로 이것이다. 그러기에 변증법의 원칙에 최적화된 엄밀하고도 정합적인 학문 체계를 조탁하는 것이 바로 그의 철학적 기획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가 내놓은 성과물들은 과연 그 기획을 어떤 흠결도 없이 완수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까? 미학에 관한 한 ‘그렇다’는 답변은 쉽지 않을 것이다. 지성의 형식을 직관-표상-사유 순으로 구성하고 이에 맞춰 절대정신을 예술-종교-철학 순으로 편성한 전략은 외관상으로는 변증법 모델에 따른 전형적 구성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질적 내용을 보면 직관으로부터 사유에 이르는 과정에서는 외면성이 점차 지워지고 내면성이 점증적으로 강화ㆍ완성되고 있음이, 예술로부터 철학에 이르는 과정에서는 객관성이 점차 지워지고 주관성이 점증적으로 강화ㆍ완성되고 있음이 확연히 드러날 뿐, 진정한 변증법적 종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직관의 외면성 및 예술의 객관성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감각적 지각성인데, 이러한 핵심 요소가 그가 말하는 종합의 단계에서는 완전히 소거되고 만다.
변증법에 충실하려면 헤겔은 철학에서 성취된 완전한 주관성이 재객관화되는 단계의 절대정신을 추가했어야 할 것이다. 예술은 ‘철학 이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유력한 후보이다. 실제로 많은 예술 작품은 ‘사유’를 매개로 해서만 설명되지 않는가. 게다가 이는 누구보다도 풍부한 예술적 체험을 한 헤겔 스스로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 때문에 방법과 철학 체계 간의 이러한 불일치는 더욱 아쉬움을 준다.
2022학년도 수능 1교시, 국어 영역 시험지 앞에서 수많은 수험생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범인은 바로 독일 철학자 헤겔이었다.
“변증법? 정반합? 절대정신? 예술이 죽었다고? 으악!!!”
본격적으로 헤겔을 만나기 전에, 잠깐 짚고 넘어갈 게 있다. 변증법, 형이상학, 이성… 도대체 철학 용어는 왜 이렇게 한자어가 어려울까?
범인은 바로 19세기 일본의 학자들(니시 아마네 등)이다. 서양 철학이 처음 동양에 들어올 때, 일본 학자들은 낯선 개념들을 한자어로 번역하느라 진땀을 뺐다. 이때 헤겔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변증법(辯證法, Dialectic, Dialektik)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말(辯)로 증명(證)하는 법(法)’이라는 뜻인데, 사실 이 단어만 봐서는 헤겔의 뜻을 알기 어렵다. 변증법은 단순한 말싸움 기술이 아니라, 모순을 통해 성장하는 삶의 원리니까.
그렇다면 헤겔은 이 어려운 무기를 들고 누구와 싸웠을까? 바로 앞서 배운 칸트다. 칸트는 세상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현상)과 알 수 없는 것(물자체)으로 나누어 엄격한 벽을 세웠다.
"인간은 겸손해야 해. 진리의 진짜 모습은 절대 알 수 없어."
이것이 칸트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헤겔은 이 벽을 허물어버린다.
"왜 몰라? 역사는 끊임없이 흐르고 발전하는데! 그 과정을 다 겪고 나면 우린 진리를 알 수 있어!"
헤겔에게 세상은 멈춰있는 벽이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고 발전하며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거대한 드라마였다.
자, 이제 헤겔이 말하는 그 거대한 드라마, 절대정신이 자신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을 위대한 걸작 영화 한 편이 탄생하는 과정에 비유해 보겠다. 놀랍게도 그 어렵던 논리가 술술 풀린다. 제발 그래야 할 텐데...
헤겔 철학의 핵심 엔진은 ‘변증법’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를 A와 B를 적당히 섞는 것쯤으로 오해하지만, 헤겔의 변증법은 치열한 성장통이다.
먼저 1단계, 정(正, Thesis, These)은 ‘책상 위의 완벽한 시나리오’다.
감독(절대정신)의 머릿속에는 완벽한 아이디어와 대본이 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이념’ 그 자체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종이 뭉치에 불과하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다음으로 2단계, 반(反, Antithesis, Antithese)은 ‘흙먼지 날리는 촬영 현장’이다.
이제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려면 카메라와 배우가 있는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이곳은 혼란스럽다. 비가 와서 촬영이 취소되고, 배우는 대사를 틀리고, 감독의 의도대로 그림이 안 나온다. 이것이 바로 ‘반’이다. 나의 생각(정)이 거친 현실(반)과 충돌하며 깨지는 단계다. 헤겔에게 이것은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작품이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모순이자 자기부정의 과정이다.
마지막 3단계, 합(合, Synthesis, Synthese)은 ‘스크린에 걸린 영화’다.
치열한 촬영(반) 끝에 편집을 거쳐 드디어 영화가 완성된다. 이 영화는 처음에 책상 위에 있던 시나리오(정)의 의도를 다 담고 있으면서도, 촬영 현장의 생생함(반)까지 녹여낸 더 높은 차원의 결과물이다. 이것이 바로 종합이자 ‘지양(止揚, Sublation, Aufheben)’이다. 시나리오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영화 속에서 완성된 것이다. 헤겔은 우주가 바로 이 [이념(시나리오) → 현실(촬영) → 진리(영화)]의 과정을 거쳐 발전한다고 믿었다.
[tip] 정반합은 헤겔의 말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정-반-합이라고 배우지만, 사실 헤겔 본인은 책에서 이 용어를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선배인 피히테가 주로 썼던 표현이죠. 헤겔은 훨씬 더 어려운 말인 즉자(In-itself, An sich)-대자(For-itself, Für sich)-즉자대자(In-and-for-itself, An und für sich)이라는 표현을 즐겨 썼습니다. 하지만 칼리바우스라는 후배 학자가 헤겔 철학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해설서를 쓰면서 헤겔의 복잡한 논리를 피히테의 정-반-합에 끼워 맞추어 설명했답니다. 대한민국 교과서와 수능에서는 정-반-합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화(진리)가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관객(인간)은 이 영화 속에 담긴 감독의 뜻, 즉 절대정신(絶對精神, Absolute Spirit, Absoluter Geist)을 어떻게 파악할까? 헤겔은 그 인식 수준에 따라 예술, 종교, 철학이라는 세 가지 등급을 매긴다.
가장 기초적인 단계는 예술(藝術, Art, Kunst)이다.
관객은 스크린에 나오는 배우의 연기와 화려한 CG를 눈(감각)으로 본다. 물질적 대상(화면)을 통해 진리를 느끼는 단계, 이것이 바로 직관하는 예술이다.
그다음 단계는 종교(宗敎, Religion, Religion)다.
영화가 끝나고 집에 간다. 화면은 사라졌지만, 내 머릿속에 주인공의 희생과 사랑의 이야기가 남아 감동을 준다. 물질은 없지만 마음속 이미지(심상)로 진리를 떠올리는 단계, 이것이 표상하는 종교다.
가장 높은 단계는 철학(哲學, Philosophy, Philosophie)이다.
이제 영화 평론가나 학자가 되어 영화를 분석한다. "이 장면의 미장센은 부조리를 상징한다." 감동이나 이미지를 넘어, 순수한 논리와 개념으로 영화의 메시지를 완벽하게 파악한다. 가장 명확하고 논리적인 단계, 이것이 사유하는 철학이다.
여기서 헤겔의 그 유명한 '예술의 종말'이 등장한다. 헤겔은 철학(사유)이 영화의 메시지를 가장 완벽하게 이해한 단계라고 보았다. 인류의 지성이 발달할수록, 우리는 화려한 눈요기(예술)나 막연한 감동(종교) 없이도 논리(철학)만으로 진리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헤겔에게 예술은 과거의 것이다. 마치 어른이 되면 그림책(예술)을 졸업하고 전공 서적(철학)을 보는 것처럼, 절대정신은 예술이라는 감각의 옷을 벗어던지고 순수한 철학의 세계로 나아간다.
헤겔의 예언은 현대 미술에서 소름 돋게 들어맞았다. 1917년, 마르셀 뒤샹은 남성용 소변기 하나를 덜컥 전시장에 갖다 놓고 <샘(Fountai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람들은 당황했다. 아름답지도 않고, 작가가 만든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뒤샹은 말했다. "이것을 예술로 만드는 것은 나의 생각(개념)이다." 이제 관객들은 변기의 곡선(감각)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철학)을 던지게 되었다. 헤겔의 말처럼, 예술에서 '물질적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오직 '철학적 개념'만 남게 된 것이다.
[tip] 예술이 진짜로 죽었다고?
헤겔이 "예술은 죽었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예술가가 태어나지 않는다거나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과거에는 예술이 진리를 전달하는 최고의 왕좌에 있었지만, 이제 인간 이성이 성숙해지면서 그 왕좌를 철학에게 넘겨주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술의 역할이 축소되었다는 선언이지요.
여기까지가 헤겔의 웅장한 주장이었다. 그런데 2022 수능 지문은 (나)파트를 통해 헤겔에게 뼈 때리는 질문을 던진다.
“헤겔 감독님, 당신은 종합을 말했지만, 그건 가짜 종합 아닙니까?”
진정한 종합(영화)이라면 시나리오의 메시지(내면)와 촬영 현장의 생생한 영상(외면)이 둘 다 살아있어야 한다. 그런데 헤겔이 최고라고 치켜세운 철학에는 영상(감각/직관)이 싹 제거되어 있다. 오직 논리(메시지)만 남았다.
비판자는 말한다.
“감독님, 영상도 없고 배우도 없고 오직 메시지만 낭독하는 걸 우리가 영화(종합)라고 부릅니까? 그건 그냥 대본 리딩이거나 평론일 뿐이잖아요!”
헤겔의 철학에서는 예술이 가진 소중한 본질인 감각적 즐거움(객관성)이 실종되었다. 그러니 이것은 조화로운 종합이 아니라, 논리(철학)의 일방적인 승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 지문은 제안한다. 진정한 완성이라면, 철학(논리)의 단계에서 끝날 게 아니라, 그 논리가 다시 생생한 감각(예술)을 입고 나타나는 '제4의 단계(새로운 예술)'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헤겔은 철학이 예술보다 우월하다고 했지만,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보자. 이 영화는 '자본주의의 계급 갈등'이라는 아주 철학적이고 무거운 주제(사유)를 다룬다. 하지만 지루한 논문 형식이 아니라, 냄새, 반지하의 곰팡이, 짜파구리 같은 아주 생생한 감각(직관)을 통해 보여준다. 전 세계 사람들은 두꺼운 사회학 책 보다 이 한 편의 영화에서 더 강렬한 진리를 느꼈다. 이는 "감각은 사라져야 한다"는 헤겔의 주장이 틀렸음을 말한다. 최고의 진리는 철학책 속에 갇히는 게 아니라, 다시 예술의 옷을 입고 우리 눈앞에 나타날 때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학생이 변증법의 반(Antithesis)을 반대(Opposite)로 착각한다. 이 오개념을 바로잡기 위해 건축 설계도를 상상해 보자.
오해 (절충): 뜨거운 물(정) + 차가운 물(반) = 미지근한 물(합)
이건 변증법이 아니다. 두 성질이 다 죽어버렸으니까. (중화)
진실 (모순과 저항): 설계도(정) vs 중력과 벽돌(반) 건축 → 물(합)
정(Thesis) - 설계도(정신) - 건축가의 머릿속에 있는 완벽한 건물의 개념이다. 하지만 아직 종이 위의 선일뿐이다.
반(Antithesis) - 중력과 벽돌(현상) - 이제 건물을 지으려면 무거운 돌을 쌓고 중력을 거슬러야 한다. 벽돌은 무겁고, 땅은 울퉁불퉁하다. 나의 완벽한 설계도(정신)가 지독한 물리적 현실(현상)의 저항을 만난다. 헤겔은 이 저항을 모순이라고 본다.
합(Synthesis) - 건축물(진리) - 그러나 이 저항을 이겨내고 벽돌을 쌓아 올렸을 때, 비로소 설계도는 종이를 찢고 나와 거대한 대성당(진리)으로 실현된다.
기억하자. 헤겔에게 반(Anti)은 나를 방해하는 적군이 아니라, 나의 추상적인 생각(정신)을 구체적인 현실(진리)로 만들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무게이자 저항이다. 현실의 무게를 견디지 않은 생각은, 결코 진리가 될 수 없다.
헤겔이 꿈꾼 세상은, 그리고 우리네 인생은, 적당히 타협해서 미지근해지는 것이 아니다. 99도까지 끓어오르는 고통(반)을 견뎌내면, 마침내 100도가 되는 순간 액체가 기체로 변하듯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질적 도약(Quantum Jump)'을 하는 과정이다.
[tip] 물이 끓는 순간, 양질전화!
물 끓이기 비유는 헤겔 논리학의 핵심 법칙인 양질전화(量質轉化)를 설명한 것입니다. 양(온도)이 꾸준히 쌓이면 어느 순간 질(기체)이 급격하게 변한다는 원리죠. 여러분이 공부를 해도 성적이 안 오르는 것 같아 답답한가요? 지금은 99도입니다. 멈추지 않는다면 곧 100도가 되어 펄펄 끓어오르는 기적(도약)을 맛보게 될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정-반-합, 끝!" 하고 멈추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헤겔에게 합(Synthesis)은 종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New Thesis)이다.
아까 만든 위대한 영화(합)를 떠올려 보자. 이 영화는 개봉 당시에는 혁명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에게 익숙해지고, 나중에는 뻔한 고전이나 클리셰가 되어버린다. 즉, 오늘의 합(혁명)은 내일이 되면 내일의 정(기득권/상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또 다른 반(Antithesis)이 덤벼들고, 역사는 끊임없이 위로 올라가는 나선형 구조를 그리며 발전한다.
"어제의 혁명(합)은 오늘의 상식(정)이 되고, 그 상식은 내일의 저항(반)을 부른다."
이 끊임없는 '합 → 정 → 반 → 합...'의 연쇄 반응 덕분에 인류의 역사는 멈추지 않고, 절대정신을 향해 계속해서 역동적으로 굴러가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제시문 (나)의 비판을 다시 봐야 한다. (나)의 필자는 "왜 철학에서 멈추냐, 철학이 다시 감각을 입고 '새로운 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사실 이 주장조차도 헤겔의 변증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합은 고정불변이 아니라 또 다른 정이 되어야 한다’는 헤겔의 논리(역동성)를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다. 헤겔 본인은 “철학이 끝이야”라고 문을 닫고 싶어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가 만든 변증법이라는 도구는 “철학에 머물지 말고 다시 현실로 나아가라”고 가리키고 있다. 즉, 새로운 예술의 탄생은 헤겔의 말과는 달랐을지 몰라도, 헤겔의 방법(변증법)에는 완벽하게 부합하는 필연적인 미래였던 셈이다.